14화. 나만 달라진 게 아니라
“어차피 오라버니랑 가려던 참인걸. 잘 부탁하면 돼.”
세이지도 당연히 자신이 사이나를 에스코트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황당해하기는 하겠지만, 뭐 결국은 들어주지 않을까.
“아, 그래. 대기실로 가면 된다는 거지? 알았어.”
카이언이 웃으며 대답했다.
붉게 일렁거리는 적발이 강한 태양 아래에서 환히 빛났다.
“근데 넌 정해 놓은 파트너 없었어?”
카이언이라면 분명 꽤 인기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여태 파트너가 없었을까?
순수한 질문이었으나 카이언은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누나랑 가려던 참이었어.”
“누나?”
“크흠, 음.”
대체 왜 누나랑? 카이언의 누나가 누구였더라?
잠시 떠올려본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분.”
사교계 마당발인 카이언의 누나를 떠올리고 나름 수긍했다. 우선 같이 파티에 참석하고 나면 알아서 주변 영애들을 데려다가 카이언에게 붙여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네 누나는 갑자기 파트너가 없어지는 거 아니야?”
“…그, 그렇겠지? 근데, 눈에 차는 남자가 없다고 그냥 나랑 가는 거라서 뭐. 흠흠. 괜찮아.”
카이언의 누나를 떠올려보면 눈에 차는 남자가 없을 만도 했다.
“혹시 여쭈어보고 그분이 우리 집 큰 오라버니라도 파트너로 괜찮다 하시면 대기실에 같이 와.”
“응.”
알았다며 대답한 카이언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근데… 왜 큰 오라버니라고 불러? 작은 오라버니도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카이언의 지적에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 그게….”
고작 삼십 분 일찍 태어난 유리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항상 박박 우기듯 오라버니 입장을 고수하던 유리였기에 세이지를 큰 오라버니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그냥 입에 그렇게 붙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녀는 대충 얼버무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세이지 형이 유독 장남 같아서 그런가.”
카이언은 혼자 적당히 추리를 하고서는 씨익 웃었다.
“…세이지 오라버니가 눈에 차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말이야.”
“알았어.”
저도 모르게 유리가 있던 시절처럼 말을 했던 것을 자각해 버려서 기분이 이상했다.
사이나는 카이언을 한번 보았다가 다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뒤통수만 보이는 퍼레이드의 행렬을 보며, 사이나는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렬이 돌아 들어오기까지 아직 남은 볼거리가 더 남아있기는 할 테지만 끝까지 보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나도 이제 준비하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적당히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차에, 카이언이 먼저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는 행동이 제법 신사 같아서 사이나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
“…별것 아냐.”
카이언이 자신의 손 위에 살포시 올라온 작은 손을 잡아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래, 그럼 이따 저녁때 보자.”
“응……. 이따가, 대기실에서 보자. 사이나.”
사이나는 카이언에게 인사를 남기고 루퍼트에게 가자고 눈짓했다.
루퍼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이나는 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 전망대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카이언의 시선이 한참 동안 따랐지만, 사이나는 알 수 없었다.
* * *
“도련님이 아주, 매우, 속상해하시겠군요.”
대기소에 세워두었던 마차를 마부가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루퍼트가 대뜸 내뱉었다.
“네? 오라버니요?”
“예에. 괜히 또 저만 쥐 잡듯 잡으실 거 아닙니까아. 크으.”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루퍼트가 인상을 썼다.
“경? 무슨 소리예요?”
“도련님이 파트너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을 들으시면 분명 저한테 화풀이를 하실 거란 말이죠. 웬 놈이 아가씨한테 접근하는 동안 너는 뭘 했느냐, 하면서…….”
“네? 놈이요?”
사이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루퍼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그사이 마차가 도착했다.
루퍼트는 사이나가 마차에 탈 수 있도록 도우며 그 와중에도 한마디 했다.
“아가씨.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웃어 주시면 안 됩니다. 아주, 치명적이라니깐요?”
사이나는 마차에 앉아 자리를 잡으면서 아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치명적이라는 단어를 왜 이런 데다가 쓴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루퍼트가 딴에는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덧붙였다.
“제가 동네에서 인정받은 연애박삽니다. 아가씨, 진심으로 드리는 조언이에요.”
“그거… 경이 바람둥이라는 뜻이죠?”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니, 무슨 그런 억울한 오해를 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그만큼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에 민감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루퍼트는 마차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더니 조용히 한마디를 남겼다.
“그 미소, 아껴두었다가 ‘아, 내가 이놈을 한번 꼬셔 봐야겠다.’ 싶은 사람이 있거든 써먹으세요. 직방일 겁니다.”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공수표 같은 말을 잘도 하네.
그저 모시는 아가씨에게 떠는 아부 같은 말이려니 여기며 사이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 * *
루퍼트의 말은 일부 맞았다.
사이나가 파트너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세이지는 매우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루퍼트를 구박했다.
“호위라고 붙여놨더니 하등 쓸모없는 자식.”
데뷔탕트 볼에 참석하기 위해 황성까지 마차를 함께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구시렁거렸다.
“칼 좀 쓰는 거 빼고는 아주 젬병이야. 사야, 호위를 갈아치우는 게 낫겠다. 그렇지?”
‘칼 좀 쓴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그거 아닌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라버니, 루퍼트 경은 아무런 잘못 없어. 파트너 제의는 내가 먼저 했는걸.”
“…뭐? 네가?”
“응.”
“왜, 왜, 왜? 설마…….”
“설마?”
확실히 세이지 오라버니의 성격이 좀 바뀐 것 같다.
유리가 없는 것이 오라버니의 성격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유리의 성격이 세이지 오라버니와 반쯤 섞인 것 같다.
진중함은 희석되고 어째 좀 촐싹거리는 것 같다는…….
“설마… 사야, 애크로이드 공자를 좋아해 왔다거나……?”
“엑?”
결론이 왜 그렇게 나와?
사이나는 예상치 못한 추측에 잠시 당황했으나, 생각해보니 그렇게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냥 전과 다르게 파트너를 바꿔야겠다는 생각만으로 행동했던 거라서 따로 핑계를 고심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카이언의 누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언니가 그렇게 예쁘대.”
“…….”
“그, 왠지 오라버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설마 나를 짝지어 주려고 그랬다는 거야?”
“아니, 겸사겸사. 흠.”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어서 사이나는 대강 얼버무렸다.
“후, 사야…. 이 오라비는 너만 있으면 돼. 다른 여자는.”
“그, 그만!”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을 쓸며 사이나가 외쳤다.
진짜 이상하다. 세이지 오라버니 성격은 절대 이렇지 않았는데…….
유리 몫의 성격을 담당하기라도 하려고 저렇게 된 건가? 아니면 원래 저랬는데 전에는 사이나 혼자 어려워했던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
“…….”
둘 다 멋쩍은 표정을 하고 서로 바라보는 동안 마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세이지와 사이나가 내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루퍼트가 물었다.
“뭔 일 있습니까?”
사이나는 세이지를 흘끔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느끼해졌어.”
“예?”
“그거 빼고는 별일 없어.”
“…도련님?”
마차는 보관소를 향하고 그들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로 향했다.
사이나는 데뷔를 치르는 당사자인지라 홀로 바로 입장하지 않고 뒤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야가 매몰차졌어.”
“아가씨가요?
“이거 다 캐롯 경 때문인 것 같은데, 맞지?”
“뭐, 다 저 때문입니까? 그리고 캐롯 경 그거 하지 마십쇼.”
“캐롯 경을 캐롯 경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
“아,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 와중에도 세이지와 루퍼트는 둘이 티격태격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가실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이 방 하나를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순서에 따라 홀에 등장하는 것이기에 그 전까지는 대기할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잠시, 말을 해둘 것이 있네.”
돌아서 가려는 시종을 사이나는 잡았다.
“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혹시 애크로이드가의 영식이 내 대기실의 위치를 묻거든 안내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대기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데, 세이지와 루퍼트의 표정이 묘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사이나가 묻자, 세이지가 루퍼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아…. 우리 사야가 다 컸구나. 말만 데뷔인 줄 알았더니 저렇게 어른스럽게 말도 잘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도련님보다도 나으신 것 같습니다.”
“뭐? 이 자식이…….”
세이지가 루퍼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똑똑.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세이지를 피해 루퍼트가 몸을 슬금슬금 물리고 있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퍼트는 이때다, 하는 표정으로 얼른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예, 애크로이드 공자님. 들어오시죠.”
호들갑스러운 루퍼트의 환영을 받으며 카이언이 들어왔다.
기다리던 사람의 등장에 사이나는 문가를 바라보았다.
“어서 와. 카이언.”
“아, 사이… 나.”
카이언이 사이나를 보고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