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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3화 (13/233)

13화. 맹용의 흑사자, 모레프

건국제의 퍼레이드는 수호령이 맥페이든 제국을 비호한다는 기치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행사다.

이 퍼레이드 하나를 보기 위해 한 달 전부터 황도로 올라오는 지방 영지민이 있을 정도였다.

귀족이라고 해서 열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호령은 누구에게나 신비한 존재니 말이다.

이처럼 퍼레이드는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제국민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그렇다고 섞여서 관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귀족에게는 전용 전망대가 따로 있었다. 예전의 사이나라면 평민들 사이에 끼어 보는 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번잡하기는 하지만 더 가까이서 관찰이 가능한 데다 분위기가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퍼트의 안내를 따라 얌전히 전망대로 향했다.

“이쪽에 앉으시죠, 아가씨.”

전망대에 들어서자 이미 와 자리 잡고 있던 귀족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타인의 면면을 살피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족들의 습성이었다.

하지만 사이나는 아직 데뷔도 치르지 않은 입장인지라 적당히 얼굴을 가리며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가서 앉았다.

모자를 쓰고 나오길 잘했다.

챙이 크고 베일이 작게 달린 모자는 이번에 마담 샤를리즈가 드레스와 함께 챙겨 보내준 것으로, 스리슬쩍 얼굴을 가리기에 딱 좋았다. 해가 강한 시간이라 차광용으로도 괜찮았다.

루퍼트가 한쪽에 가서 섰고, 하녀들은 사용인 전용 공간으로 가서 대기했다.

“와아아아-!”

시간이 차자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려왔다. 덩달아 기대감에 심장을 뛰게 하는 그런 함성이었다.

사이나는 중앙 광장으로 반짝이는 시선을 고정했다.

빰빠라밤-!

증폭된 뿔 나팔 소리에 맞추어 황성의 거대한 정문이 열리자 함성은 더 커졌다.

착착착.

사열에 맞춘 보병이 먼저 나와 각 잡힌 군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제국기를 높이 든 기수들이 열 맞춰 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행렬 뒤, 8두마가 이끄는 개방형 마차에 탄 황자와 그의 약혼녀가 화려한 휘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맥페이든 제국 만세!”

“황자 전하 만세!”

황자의 모습이 드러나자 함성은 또 한 번 커졌다.

북과 나팔을 든 행악대가 행렬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두둥. 두둥. 둥둥둥.

그 뒤로 절도 있게 검무를 추는 병사의 무리가, 더 뒤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전신 갑주를 입은 창병대가 말을 타고 위엄 있게 행군했다.

여러 가지 조합으로 꾸며진 퍼레이드의 행렬은 매년 보는 것임에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와아아아-!!”

“수호령이다!”

마침내 행렬의 뒤쪽, 우뚝 솟은 형상이 보이자 사람들의 함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퍼레이드의 꽃, 수호령의 등장이었다.

“드디어….”

사이나는 기대감을 품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로소 실물을 보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일렁이는 갈기였다.

어둠이 일렁이는 것처럼 너울거리는 갈기가 사방으로 뻗친 흑색의 사자. 이마에는 검은 피부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반짝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하고 늠름한 맹수의 왕.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은 반투명한 몸으로 어슬렁어슬렁 행렬을 따라 움직였다.

맹용의 흑사자, <모레프>.

금색의 눈을 가진 웅대한 사자의 형상은 경이로웠고, 신비로웠다.

“흠, 근데… 저건 수호령이 아니지 않나?”

사이나는 문득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한 말에 혼자 당황했다.

‘수호령이 아니라니……?’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거지?

그녀가 아무리 <아를-프로메사>의 광팬이라고 한들 수호령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작금, 남아 있는 수호령은 열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가까이서 볼 기회는 없었고, 세간에 퍼져있는 정보도 많지 않았다. 남들처럼 퍼레이드 때나 구경하는 것이 다였다.

스스로에 대한 황당함과 함께 모레프를 눈으로 꼼꼼하게 살피던 사이나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

육중한 흑마 위에 앉아 수호령과 나란히 행진 중인 모레프의 맹약자.

크레이머 공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거리지만 정확하게.

어째서인지 자신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묶여 속박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든다.

하얀 예장을 차려입고 거대한 흑마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뒤로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사이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이나?”

헛.

이상하리만치 시선에 붙잡혀 있다가, 귓가에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사이나는 화들짝 풀려났다.

“아…?”

고개를 들어보니…….

“…카이언?”

“미안. 내가 놀라게 했어?”

남이 보기에도 자신이 놀란 모습이기는 했나 보다.

“너무… 집중해서 구경했나 봐. 조금 놀랐는데 괜찮아.”

사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으로 굳었던 몸을 살짝 늘어뜨리며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방금… 뭐였지?’

다시 광장을 내려다보니 크레이머 공작은 더 이상 사이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면을 보며 광장을 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이쪽으로 시선을 던진 건데 내가 착각한 건가?’

…그래. 착각인 것 같다. 거리가 얼만데.

모레프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아까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이내 털어버렸다.

그건 그렇고,

“왜 그래? 목 아프게 서서.”

이 녀석은 왜 서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건지.

“금방 갈 거 아니면 앉아서 이야기해.”

사이나는 카이언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음, 그럴까. 같이 구경해도 되지?”

“물론이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혼자 멀뚱멀뚱 있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카이언은 사이나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사이나, 너도 수호령 보러 나온 거야? 의외네.”

“응. 나 좋아해.”

“…어?”

카이언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수호령 보는 거 좋아한다고.”

“아, 그렇지.”

카이언은 약간 움찔하며 대답했다.

광장에서는 여전히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 온 꽃비를 뿌려가며 환호성을 내뱉었다.

한낮에 황성을 배경으로 건물 높이만큼이나 커다란 수호령이 뒤를 따르는 모습은 확실히 소름 돋을 만큼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사이나, 근데 너… 오늘 데뷔하는 날 아니야?”

묵묵히 구경을 하다가 카이언은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 물었다.

“응.”

어찌 여기에 있느냐, 그 말이다.

“그런 카이언, 너도 참석하잖아?”

“난… 남자고. 여자들에 비하면 꾸미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

그래. 오늘 데뷔하는 영애들은 지금쯤 전신 마사지를 받고 있거나,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온갖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러나 사이나는 단장이 세 시간을 넘어가면 다섯 시간이나 일곱 시간이나 결과는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으로는 별 차이를 잘 못 느꼈다.

“나도 시간은 충분해. 뭐 입을지는 이미 다 정해져 있는걸.”

“그래? 우리 누나는 자기가 데뷔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 준비하고 있던데?”

사이나는 짧게 웃고는 말했다.

“수호령이 보고 싶어서 잠깐 나왔어. 나도 이제 금방 들어가서 준비해야지.”

“…바쁘네. 차 한잔할 시간도 안 내주더니 말이야.”

카이언이 고개를 틀어 사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에서 보고 처음이다.

카이언은 그때 말했던 대로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을 해 왔었다.

처음에는 받아들일까 하다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서 거절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있었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계속 날이 안 맞더라고. 미안.”

그래도 거절한 것이 미안해서 사이나는 사과했다.

따로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말로 하는 사과는 또 다를 것이다.

“흠. 미안하면 이번 파티에서 첫 춤은 나에게 주는 것이 어때?”

카이언은 넌지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파티? 그럼…… 데뷔탕트 볼에서의 첫 춤?’

그건…….

사이나는 놀라서 물었다.

“나한테 파트너 신청하는 거야?”

데뷔탕트 볼의 첫 춤은 데뷔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파트너가 함께 추는 춤이다.

카이언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데 마치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맞다. 그렇지.’ 이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말했다.

“…그, 그렇다면? 해, 줄래?”

“…….”

“아, 물론 아직 파트너가 없다면 말이야. 아니, 아니지. 당일인데 없을 리가 없지.”

카이언은 어쩐지 말을 더듬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음. 아니야. 미안하다. 방금 내 말은 잊어줘.”

면구함을 잔뜩 담은 얼굴로 카이언이 자신의 제안을 취소했다. 하지만 사이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괜찮지 않나?’

이전 생에서 그녀는 쌍둥이였다.

동갑인 유리와 같이 파트너가 되어 나가면 딱 맞았겠지만, 남자 형제가 없던 엘리자베스가 파트너가 없다며 부탁을 해왔다.

그에 세이지가 옳다구나 하며 유리에게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이긴 사람이 사야의 파트너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형!」

그리고 유리는 장렬하게 졌다.

5판 3승제였는데 어쩜 한 번을 못 이겼다.

지금은 유리가 없어서인지 엘리자베스가 부탁을 해오지 않았다.

‘알아서 파트너를 구했겠지.’

지난 생에 사이나의 파트너는 세이지였고, 이번에도 당연히 세이지의 에스코트로 데뷔하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떠올려보니 세이지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데뷔탕트 볼을 대하는 자세가 이리 건성일 수가 있나.

“응. 난 좋아.”

“……뭐?”

“너도 괜찮으면 이따 대기실로 찾아와.”

사이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카이언이 멍한 표정을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이걸 원한 거 아니야?”

그냥 농담이었나?

“어… 그, 그렇게 해도 괜찮아?”

그 흔쾌한 승낙에 카이언이 더 당황한 모양새였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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