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2화 (12/233)

12화. 드디어 실물을 보겠구나

전생에서 남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끔찍했다. 영지민의 삶이나 경영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았다.

사이나가 가져간 막대한 지참금조차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동이 났다.

돈을 쓰기만 할 뿐 아무도 영지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이나가 일을 해야 했다.

그녀마저 외면하면 영지민이 죄다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후계자도 아니었던 그녀가 영지 살림에 대해 뭐 배운 것이 있었겠는가.

그나마 원체 영민한 머리를 타고나서 몇 년에 걸쳐 하나둘 깨우쳐가며 겨우겨우 업무를 처리해 나가기는 했으나, 해도 욕을 먹고 못 하면 못 한다고 욕을 먹었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5년째에 시어머니인 대부인이 사고로 죽었다. 정부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치정에 휘말려 죽은 터라, 남편은 그 죽음을 대강 덮었다.

사이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사치를 하는 사람이 한 명 줄자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림이 피지는 않았지만.

벌어오는 사람은 없고 쓰는 사람만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실제 입지가 어떠하든 겉으로 사이나는 한 집안의 안주인이었고 참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임이 분명 존재했다.

‘드레스를 맞출 돈이 없어서 알게 되었다고 하면… 웃긴 일이지.’

정말로 돈이 없었다. 삼류 의상실에 갈 돈조차.

그런 과거의 사이나가 선택한 것은, 죽은 시어머니의 드레스를 고쳐 입는 것이었다.

대부인이 철철이 어지간히 사들였던 탓에 양으로만 치면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웃긴 것은 이후의 일이다. 대부인의 드레스를 고쳐 입었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어울리는 것이 많았다. 오히려 전에 입던 것들보다 더 나아 보일 때가 많아서 사이나 스스로도 놀란 적이 많았다.

어디서 돈이 나 비싼 드레스를 사서 입느냐며 남편이 난리를 부릴 정도였으니.

당시에는 새 드레스를 못 입는 것도 서러운데, 이런 노티 나는 것들이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것이 속상했었다.

지금에야 사람마다 어울리는 것이 다르고, 자신은 이런 색상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에 수긍하지만 말이다.

“아가씨. 이 드레스 입고 내일 나가시면 어때요?”

“내일?”

사이나는 유모의 말에 회상에서 돌아왔다.

“내일 건국제 첫날이잖아요. 낮에 퍼레이드라도 구경하고 오세요.”

…퍼레이드?!

사이나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호호. 반색하시는 것 봐. 말씀 안 드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어차피 몰래라도 나가실 거 아니었어요?”

데뷔탕트 볼은 일 년에 두 번이지만, 수호령을 필두로 하는 퍼레이드 행사는 건국제뿐이다.

그리고 건국제 퍼레이드는 1년 중에 사이나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혼하기 전의 사이나는 그랬다.

“올해는… 어느 가문이더라?”

사이나가 살고 있는 맥페이든 제국에는 4대 공작가가 있다.

동남의 로즈데일.

남서의 프랜시스.

서북의 애버딘.

그리고 북동의 크레이머.

이 4대 공작가는 모두 수호령의 전승 가문이다.

이 대륙에는 한때, <아를-프로메사>라고 이르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한다.

일명, <언약의 시대>

그리고 그 시대에 쓰이던 고문자 및 고어를 <아를어>라고 부른다.

그 시절에는 계약과 맹약에 따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수호령을 부렸다고 한다.

이 시기를 <언약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수호령과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하고, 그 조건은 수호령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많은 가문이 맹약의 조건을 잃어버렸거나 잊고 말았다.

이런 시대에 유일하게 수호령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 바로 4대 공작가였다.

맥페이든 제국은 대륙에서 생명체가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을 독점하다시피 점유하고 있어서 그만큼 그 자원을 노리는 시도 또한 빈번하게 벌어지는 편이었다.

북방의 야만족과 남부의 연합국도 골치였지만, 가장 골칫덩이는 마수들이다.

특히 마수 중에서 거대종과 특수 종은 수호령의 능력자만이 처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4대 공작가의 영지는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마수의 방벽이 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이런 보안상의 이유로 4대 공작들은 보통의 중앙 귀족과 달리 영지에 머무르는 기간이 더 길었다. 어떻게 친해지고 싶어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건국제가 얼마나 귀한 행사겠는가.

특히 사이나는 더 그랬다.

전생의 사이나는 <언약의 시대>에 관련한 모든 것에 푹 빠져서 열광하던 소녀였다. 아를어에 미친 듯이 파고들던 것도 <아를-프로메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호령은 <아를-프로메사>의 실질적인 증거나 다름없다.

그 증거를 내일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삶의 열정 같은 것이 다시금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크레이머 가문이었죠, 아마?”

그래,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을 보러 가는 거야…!

‘……아니, 근데 잠깐. 크레이머?’

뭔가… 이상한데?

사이나는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데뷔탕트 볼이 있던 열여덟 건국제 때가 프랜시스가의 차례였으니 열아홉인 올해는 애버딘가의 차례가 아닌가?

“…크레이머 가문이라고?”

“네.”

유모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크레이머가의 순서가 확실하다는 뜻이겠지.

뭔가 분명 이상하다. 지난 생에서는 올해 애버딘 공작이 올라와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애버딘가의 차례 아니야?”

사이나가 왜 이걸 기억하느냐 하면, 전생에 그녀가 본 마지막 퍼레이드가 바로 열아홉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엔 애버딘가가 아닌 거지?

“아, 이번에 애버딘 쪽 영지에 마수가 들끓어서 크레이머가와 순서를 바꾸었대요.”

“…마수?”

“네. 안 그래도 마수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작년부터 제국 전체의 마수들의 개체 수가 이상하게 많아진 데다, 평소와 다른 패턴을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공작가마다 작년에 엄청 바빴다고 하더군요.”

…마수가 들끓는다고?

사이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생엔 분명 이런 일이 없었다.

뭔가 다르다.

한 해 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났더니, 자신의 인생 흐름은 물론 외부의 사건도 달라졌다.

특히, 유리가 없다. 아무도 그를 기억조차 못 한다. 사이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여긴 자신이 살았던 곳과 같으면서도 다른 곳인 걸까?

“그러고 보니 아가씨, 드디어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을 보실 수 있겠네요.”

“응?”

“왜 매번 크레이머가의 차례만 되면 일이 생기셔서 못 보곤 하셨잖아요.”

“아…. 맞아, 그랬지.”

사이나는 크레이머가의 수호령만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북동의 공작가(家)가 퍼레이드를 하는 해만 되면 그녀는 못 갈 일이 생겼다. 심하게 아프다든지, 더 급한 일이 생긴다든지 그랬다.

직접 본 자들의 묘사나 책에 실린 삽화를 통해 대략적인 생김새는 알고 있지만 실물로는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요. 유모, 내일 외출해야겠어.”

“네. 타운 하우스로 이동해야 하니 얼른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응.”

뭔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쩌랴.

어쨌든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을 드디어 직접 볼 수 있는 건가.

두근.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 새삼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도무지 오르지 않던 사이나의 기분이 드물게 들떠오는 것이 보여 유모도 함께 웃었다.

* * *

건국제.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동시에 유구한 역사가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행사다.

건국 선포 시기가 가을의 한창이라 수확제를 겸하는 덕에 건국제는 매년 화려하고 풍부한 자원과 함께 치러지고는 했다.

제국 차원에서나 영지 차원에서나 한창 세금이 쌓이는 시기라 먹거리며 놀거리가 넘쳤다.

그 첫날.

드보프가의 식솔들은 건국제 참석을 위해 전날 모두 타운 하우스로 이동한 상태였다.

사이나는 퍼레이드를 관람하기 위해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퍼레이드는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정오에 시작한다.

“아가씨. 퍼레이드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이따 데뷔탕트 볼에 참석하셔야 하니까 너무 늦지는 않게 오세요.”

오늘 데뷔하는 영애라면 보통 퍼레이드 관람은 생각도 안 할 것이다.

귀족 영애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 시간은 상상을 초월하고는 했으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톱 끝부터 발톱 끝까지 일일이 점검하고, 신체 부위별로 다른 향유를 써서 목욕과 마사지를 하고, 말 그대로 몸이 향기에 절여질 때까지 욕실에 갇혀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저녁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아니 전날부터 준비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드레스부터 구두, 장신구까지 미리 다 정해 놓았음에도 그 정도다.

그러나 사이나는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 단장을 받는 것을 질색하는 편이었고, 퍼레이드를 꼭 보고 싶었기에 최소한으로 줄여버렸다.

“알았어. 유모.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미리 동행하기로 배정된 하녀와 함께 사이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호위기사인 루퍼트는 마차 바깥에서 따로 말을 몰 것이다.

한참 후, 마차가 멈춰 섰다.

“아가씨.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루퍼트가 말했다.

중앙 광장이 통제 상태다 보니 마차가 가까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사이나는 루퍼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거리는 활기찼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왔다.

사이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풍경을 즐겼다.

‘어쨌든, 좋네.’

유리의 부재는 애석하지만, 그래도 결혼 전으로 돌아오니 이런 일상이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사이나는 거리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벌써 난리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