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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1화 (11/233)

11화. 그래. 달라져야 해

“흰색이면 될 것 같네요.”

“흰색이요? 제일 흔한 색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데뷔탕트 볼에 참가하는 영애들은 밝은 계열의 드레스를 입는다. 흰색이 기본이고 색이 추가된들 옅은 파스텔 톤의 색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데뷔한 귀족들이 데뷔탕트 볼에 참석할 시, 그 색을 피해서 입는 것이 암묵적 예의였다.

하지만 흰색이 기본이라고 해도 대부분 순수한 흰색은 잘 고르지 않았다. 황실에서 대여해주는 드레스가 흰색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이나는 흰색을 골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제일 낫기 때문이었다.

흑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그녀는 애매한 유색보다 그냥 흰색이 더 나았다.

“네. 흰색이요. 디자인도 그냥 심플하게 가죠. 러플, 프릴, 리본 이런 거 다 뺀 디자인으로 보여주세요.”

마담 샤를리즈는 내심 놀랐다.

예전에 샤를리즈는 사이나를 두고 ‘꾸미면 상당할 외모인데 왜 저렇게 안 어울리는 옷만 골라 입고 다니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이런 옷보다는 저런 게, 아님 저런 게 더 낫지.’ 하며 떠올렸던 디자인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본인의 매력 포인트를 알았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의상실을 운영하는 만큼, 꾸몄을 때 그 효과가 확실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담은 벌떡 일어나 바깥 직원을 불렀다.

“디자인 북을 좀 가져오렴. 10번 대 라인 다 가져와.”

응접실 탁자 위에 금세 디자인 북이 잔뜩 쌓였다.

마담 샤를리즈는 의욕적으로 추천을 하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말도 꺼내기 전에 사이나가 이미 몇 가지를 짚으며 말했다.

“상체는 이런 식으로. 어깨가 드러나게요.”

“골반 위쪽까지 딱 붙듯이 내려오게 하다가 엉덩이 부분부터 이런 식으로 해주시면 될 것 같네요.”

“치마 천은 겹겹이… 그리고 나머지는…….”

마담 샤를리즈는 깜짝 놀랐다.

기존에 있던 디자인을 적당히 섞어서 말하는데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상당히 예쁜 옷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거…… 괜찮은데?’

특히 디자인 북에 없는 요청이 하나 있었는데 잘하면 유행을 탈 수도 있을 정도로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마담 샤를리즈는 다급하게 펜을 가져다가 디자인 북 뒤쪽 공간에 러프하게 스케치를 했다.

“이런 느낌이면 맞나요?”

“아, 네.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 역시 마담이세요.”

“좋습니다. 최대한 금방 제작해 보도록 하죠. 가봉이 필요해지면 저택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추가로요.”

사이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옷 방에 있는 드레스들 역시 죄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가 좀 더 필요해요. 파티용 드레스도 더 필요하고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 실내용도요.”

“…네?”

“디자인은 이런 느낌, 이것도 괜찮네요. 마담 샤를리즈가 보셨을 때 저와 어울리는 디자인과 톤으로 각각 스무 벌씩.”

마담 샤를리즈는 계속해서 놀라고 있었다.

사이나가 손가락으로 짚은 디자인은 그 나이대의 영애들이 잘 입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머릿속으로 매칭을 해보자 상당히 잘 어울렸다.

“급하긴 한데, 요즘 바쁘신 것 아니까 완성하는 대로 한 벌씩 보내주세요. 대신 한 달 안에 보내주시는 드레스에 한하여 마찬가지로 열 배 쳐드리죠.”

“네에-?”

마담 샤를리즈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계절 바뀔 때마다 종류별로 스무 벌씩 고정 구매할 테니 정기적으로 저택으로 보내주세요. 제게 어울리는 디자인은 마담이 잘 아시리라 믿어요.”

마담 샤를리즈의 입이 더 벌어졌다.

‘이 아가씨… 이래도 되나?’

드보프 백작가가 부유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니, 결제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은 이렇게 못 한다. 공·후작가 영애일지라도 파티용 드레스만 여기서 맞추고 실내용 드레스는 다른 곳에서 맞춰 입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마담 샤를리즈의 드레스는 그만큼 비쌌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마담.”

“아, 네. 연락, 드리겠습니다.”

드레스를 하나만 맞춰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영애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수십 벌을 맞추면서 삼십 분도 안 되어 요점만 말하고 일어서서 나가버리는 사이나를 보니 마담 샤를리즈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이 영애가 본격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려 마음먹은 거라면, 이건 매우 큰 기회야.’

드보프 백작가는 사실 명성 면이나 재력 면에서 어지간한 후작가는 씹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보프 영애 자신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본인의 미모도 상당했다.

본격적으로 꾸미고 활동을 하면…….

‘혹시 알아? 후작 아니면 공작부인이 될 수도 있지.’

그러면 자신의 부티크의 명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계절마다 고정 맞춤을 약속한 엄청난 우량고객이 아닌가.

마담 샤를리즈는 드보프 영애의 매력을 살릴 만한 디자인들을 여러 개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서둘러 일어났다.

“얘들아! 비상이다. 현재 예약 상황 다 가져와!”

한 달 안에 완성하면 열 배라니.

예약이 엄청 밀려 있는 상태였지만, 한 달 내내 밤을 새워서라도 최소 종류별로 두 벌씩은 만들어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마담 샤를리즈였다.

* * *

건국제는 금방 다가왔다.

사이나는 그동안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타임라인을 정리했다.

지난 생을 떠올리면 괴로운 것투성이라 애써 기억 바깥으로 미뤄두었으나, 이젠 그 기억이 필요했다.

안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똑같은 결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게 더 불행한 일이니까.

그러므로 떠올려야 했다. 지난 시간에 자신이 결혼을 해야만 했던 계기와 기점, 몇 가지 분기점들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와, 나 정말 미숙했었네…….’

좁은 인간관계는 그렇다 치고, 세상 물정을 진짜 몰랐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동년배에 비하면 경험이 조금은 더 있으니 나아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자.’

사이나 기준의 ‘적극성’이라고 해보아야 본래 외향적인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좋은 사람 두세 명 정도만이라도 사귈 수 있다면 아주 큰 성과일 것이다.

‘이번에는 여러 남자들과 대화도 좀 해봐야지.’

사이나의 세계는 <아를-프로메사>와 유리라는 존재, 둘만으로도 너무 완전해서 바깥 누구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잘못되었음을 안다.

‘그래도 결혼은 안 할래.’

사이나의 내면에는 [결혼은 곧 불행]이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된 상태였다.

그리고 사이나가 유리 나무의 싹이(자라서 나무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자라나는 것을 볼 때마다 다시금 되새기는 것은 하나였다.

‘행복해지자.’

최소한 불행해지지는 말자.

유리라면 그걸 바랐을 거라고.

분명 그랬을 테니까.

행복, 해지자.

* * *

“아가씨. 마담 샤를리즈 부티크에서 배달이 왔네요.”

“음? 벌써 또?”

마담 샤를리즈는 확실히 대단했다.

열 배의 가격을 걸기는 했으나 요즘 의상실이 워낙 성수기라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데뷔탕트 볼에 입고 갈 드레스를 완성해서 보낸 것도 모자라, 외출용 드레스도 두 벌이나 완성해서 보내왔다.

게다가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음에도 퀄리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마담 샤를리즈는 사이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혹은 돈 욕심이 강한 것이거나.

사이나 자신을 통해 명성을 높일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되었다.

“어머- 너무 예뻐요! 세상에!”

“역시 마담 샤를리즈네요!”

포장용 나무함 안에 감싸진 천을 들춰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하녀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함 안에는 드레스뿐 아니라 거기에 어울리는 모자와 구두, 소품까지 같이 들어 있었다.

가격이 포함인지 별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보프가라면 개의치 않고 지불할 것임을 알아채는 마담의 센스도 대단했다.

사이나는 웃으며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내가 드레스가 급해서 한 달 안에 보내면 열 배로 주겠다고 했으니, 청구서 금액에 놀라지 말고 지불하라고 집사장에게 전해줘.”

“네. 잘하셨어요.”

유모도 드보프가의 재력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드보프 백작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워낙 이런 쪽으로 관심이 없었던 아가씨였기에 드레스를 사느라 돈을 썼다는 것이 더 감격스러웠다.

“그나저나 이번에 보낸 드레스……. 이거 아가씨가 고르신 거예요?”

“음, 색깔만. 왜?”

“아가씨가 이런 색을 고르셨다고요?”

“응.”

마르다는 좀 놀랐다.

사이나 또래의 영애들이라면 전혀 고르지 않을 것 같은 색이었다.

데뷔용 드레스도 무난한 흰색이어서 놀랬었다. 막상 입어보니 너무 예뻐서 상관없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번 입어보세요. 아가씨. 잘 맞게 나왔나 봐야죠.”

“마담 샤를리즈가 어련히 잘 만들었을까.”

“제가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요.”

유모의 부탁에 사이나는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세상에…. 아가씨, 너무 예뻐요.”

“정말 우아하세요.”

드레스를 갈아입은 사이나가 등장하자 하녀들이 탄성을 지었다.

유모도 놀랐다.

“아가씨…. 이런 색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세상에, 어찌 아셨어요?”

연보랏빛이 살짝 도는 어두운 톤의 은청색 드레스였다.

나이 지긋한 대부인이나 주로 입을 것 같은 색이라서 우려를 했는데 사이나가 입으니 말도 못 하게 잘 어울렸다.

거기에다 가슴팍 위쪽부터 팔까지 레이스로 되어 딱 붙는 소매는 아래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며 고혹적인 매력을 자아냈다.

머리를 꾸미고 화장까지 더하면…….

열아홉 소녀가 가지는 싱그러운 미 이상의 매력을 자아내리라.

하지만 사이나는 사이나대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색이 어울리는지 어찌 알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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