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너 좀 변한 것 같아
‘라피스라…….’
‘라피스’는 드보프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보석 상점이다.
사이나는 몸에 주렁주렁 뭘 달고 다니는 것을 불편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원래 있는 장신구도 잘 착용하지 않았다.
중요한 날이면 아버지가 직접 보석 세트를 선물해 주시곤 해서 라피스를 찾을 일은 더 없었다.
그렇다고 라피스가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석 상점 중 하나라는 것을 사이나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드보프 가문이 가진 자체 광산은 없지만 몇몇 가문과 계약을 맺어 원석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가공, 유통하는 사업이 드보프 가문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으니까.
‘어디더라…. 동남의 로즈데일이었던가? 애버딘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혼 이후, 가문의 이런저런 사정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자각도 못 했다.
그래서인지 사이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미 라피스 지배인이 엘리자베스, 널 알고 있지 않니?”
“그렇긴 하지. 그래도….”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말이 없는 사이나를 보던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서운함이 터져 나왔다.
“사야, 너… 이상해.”
…내가?
“뭐랄까… 좀, 변한 것 같아.”
“…….”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
“나, 더 이상 너의 베스트 프렌드가 아닌 거야?”
그 말에 사이나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베스트 프렌드?’
엘리자베스는 확실히… 사이나의 유일한 동성 친구였다. 그러면 베스트 프렌드인가?
친구가 많지 않아 비교 대상은 없지만,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오래 산 것은 아니어도 전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거지 같은 결혼 생활을 이겨내는 데에 친구라는 존재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움이 되는 친구들도 어딘가에는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엘리자베스는 분명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엘리자베스는 결혼 후 신분이 더 올랐고, 자신은 떨어졌다. 그래서 당시 사이나는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멀어졌다고 해서 불평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더랬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
서운한 듯, 입술이 약간 나온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눈으로 사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했다라…….’
이전 생의 자신과 비교해 변한 게 맞는다면, 자신은 어떤 식으로 변한 것일까.
좋은 방향으로? 아니면 나쁜 방향으로?
시간을 되돌아온 놀라운 기적의 순간을 살고 있으면서, 너무 성의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리브 그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유리의 나무 자리를 뚫고 올라온 여린 싹이 떠올랐다.
‘그래…. 유리는 없지만…….’
사이나는 속으로 한숨을 짧게 쉬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그럼 이렇게 하자.”
* * *
사이나는 외출할 때 세이지가 동행시킨 하녀 중 한 명을 불렀다.
지난 시간의 사이나였다면 뒤에 줄줄이 누구를 달고 다니는 것을 질색했겠지만, 지금은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사이나는 하녀에게 엘리자베스를 따라가라고 명했다.
“‘내가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급한 일이 있어 같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친구인 발데즈 영애를 부족함 없이 모셔주길 부탁하셨다.’라고 지배인에게 전해. 할 수 있겠지?”
“네. 아가씨.”
오라버니 말대로 외출에 하녀를 동행하길 잘했다.
사이나 개인 인장이 찍힌 카드를 주며 같이 전하라 명했다.
이것만 보아도 라피스의 지배인은 엘리자베스를 충분히 귀빈으로 접대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다행히 그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보낸 사이나는 잠시 길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생각을 좀 해보자. 기왕 돌아온 거, 전과 똑같이 흘러가서는 안 돼.’
유리 때문에 실의에 빠져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지만, 이러다가 또 전처럼 살게 되면 큰일 난다.
나중에 언젠가 유리를 만나면 매우 호통을 치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해져야 한다.
아니,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날 사랑해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후회가 없도록 아버지께, 오라버니에게도 사랑을 많이 표현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그럼 바꿔야 한다. 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이 삶의 흐름을.
‘뭐부터 바꾸지?’
지난 생에서 사이나의 인생은 열여덟에 치렀던 데뷔탕트 볼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시점에 혼수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기에 기점이 좀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데뷔 이후 어그러지기 시작한 삶이 또 반복될까 봐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엘리자베스는 작년에 데뷔를 대체 왜 안 했지?’
사교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이나와 다르게, 엘리자베스는 굉장히 그곳을 동경했다.
하루라도 빨리 데뷔해서 얼른 여러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데뷔를 미뤘다고? 아무도 누운 이유를 몰라 치료도 못 하고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
뭔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진득한 설득에 넘어가 건국제 데뷔탕트 볼에 참석한다고 결정은 했으나 찜찜한 구석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데뷔탕트 볼이 어그러짐의 시작점이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바꾸자. 하긴 해야 하는 데뷔지만, 저번처럼 흘러가지 않게 바꿔야겠어.’
정확히 무얼 바꾸어야 불행을 비껴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같은 시간을 두 번 사는 사이나로서도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가장 간단하게 나오는 결론은 이랬다.
‘무조건 다르게 가자. 반대로 가든지, 다르게 가든지.’
그리고 우선 바꿀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만만하면서도 가장 거슬리는 것부터 바꾸자.
사이나는 몸을 돌려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로 다시 들어갔다.
“어서 오세-. 어머, 드보프가의 영애님? 뭐 놓고 가셨나요?”
“마담 샤를리즈를 다시 불러주게.”
“…예?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이나는 아까 썼던 응접실로 다시 안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담 샤를리즈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드보프가의 영애님? 호호. 금세 다시 오셨네요. 무슨 일이세요?”
웃고는 있지만 미묘하게 접힌 미간에서 ‘귀찮음’이 묻어났다.
진짜 열아홉인 사이나라면 구분하지 못했을 아주 엷은 기색이었다.
드보프 백작의 면을 봐서 함부로 할 수는 없는데, 뭘 모르는 어린애가 설치며 오라 가라 하는 기분이 들 테니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이나는 그런 기색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를 다시 맞추고 싶어요.”
“…네? 데뷔탕트 볼 드레스 말인가요?”
“네.”
“……지금 건국제가 한 달밖에 안 남은 건 아시죠?”
귀족 여성들은 보통 행사 몇 달 전쯤부터 드레스를 준비한다. 최소가 석 달이고, 데뷔나 약혼, 결혼 같은 경우 일 년 전부터 신경을 쓰기도 했다.
연회용 드레스라는 것이 워낙에 공수가 많이 들어가는 데다, 좋은 의상실은 예약이 금방 차버리기 때문이다.
“열 배. 지금 맞춘 것과 별개로 열 배 드리겠습니다.”
“……네에?”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던 마담 샤를리즈의 눈이 더 커졌다.
“원래 만들던 것 역시 가격을 지불하지요. 하지만 찾아가지는 않을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파셔도 됩니다.”
“아니, 갑자기… 무슨.”
“그것으로 모자란가요? 스무 배로 드리죠, 그럼.”
“아니, 아니에요! 영애님.”
마담 샤를리즈가 손사래를 쳤다.
귀족 여성의 연회용 드레스는 비싸다. 마담 샤를리즈의 드레스는 열 배쯤 더 비쌌다.
그런데 사이나가 한 벌에 열 배 값을 내겠다고 한 것이다.
열 배의 열 배. 이는 다른 의상실의 백 배 가격으로, 아무리 마담 샤를리즈라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바꾸시려고요?”
샤를리즈는 넌지시 사이나에게 물었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지만, 영애님이 그렇게 해달라고 하신 것 아니었나요?”
엄밀히 말해 그 색을 고른 것은 사이나 본인이 아니었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게 드레스를 만드는 장인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두죠. 하지만 발데즈 영애는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할까요?”
사이나는 물끄러미 마담 샤를리즈를 바라보았다.
마담은 내심 놀랐다. 조용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 아가씨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독대를 하고 있으니 어쩐지 어린 영애를 상대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마담은 의아해졌다.
“아, 물론이죠. 호호.”
“…….”
당황스러웠지만 마담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웃었다.
친구라고 표현해도 귀족 사이는 이득으로 인해 관계가 맺고 끊긴다. 별로 큰일도 아니다.
사실 마담 샤를리즈는 사이나의 외양에 더 잘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적극 추천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그냥 요구대로 만들었다.
다른 공·후작가 귀족들에 비해 신경이 덜 쓰이는 손님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드레스 맞추는 날 방문조차 하지 않는 손님을 위해 갖은 정성을 기울이자니 괘씸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마담은 장사꾼 이전에 장인이다. 자신의 드레스를 높은 가격대로 책정한 것은 곧 드높은 자부심을 말한다. 그런데 마담이 보기에 드보프가의 영애는 그 가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마담 샤를리즈가 만든 드레스의 가치는 발데즈 영애가 매우 더 잘 알고 있었다.
‘드보프 영애의 동행이 아니었다면 입장조차 불가했을 테지만.’
같은 백작가여도 드보프가와 발데즈가는 속된 말로 급이 다르다. 본래라면 발데즈 영애는 마담 샤를리즈의 드레스를 입을 수 없었다.
이러니 마담 샤를리즈에게 사이나는 이러나저러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만 하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흠흠. 그럼 우선 색상부터 정해볼까요?”
하지만 그런 평가는 이제 접어두고, 마담 샤를리즈는 색부터 고르자고 운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