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난 널 그 정도로 좋아했었나?
엄청 오랜 산 것은 아니어도 10년여를 더 살다가 돌아와서인지 열아홉 살짜리 남녀 둘이서 경어를 써가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예의를 한껏 차린 격식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귀여웠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루퍼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도 비슷한 느낌이었는지는 몰라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씨익 웃었다.
루퍼트의 미소를 보고 사이나는 결국 반사적으로 크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카이언이 이상한 표정을 하고 사이나를 보고 있었다.
“…너.”
“카이언?”
“웃으니…….”
카이언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가를 가린 채 잠시 있다가, 다시 고개를 세웠다.
“아니야.”
그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쩐지 좀 당황한 얼굴이어서 의문이 들었으나, 복도 끝에서 끼어들지 못하고 대기 중인 직원을 보니 그제야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복도에 너무 오래 있었다. 멀쩡한 응접실 놔두고 서서 이게 뭔 짓인지.
“카이언, 나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이나를 들여다보는 카이언의 눈동자가 깊어 보였다.
“잠깐, 사이나.”
“음?”
들어가려던 사이나를 카이언이 가볍게 불렀다.
“조만간 드보프 저에 한번 방문할게.”
“왜?”
“차나 한잔하자. 오랜만에.”
유리가 없는데 우리가 따로 만날 만큼, 그런 사이였던가?
사이나는 좀 이상한 느낌이었다.
“미리 연락하고 와.”
“알았어.”
카이언은 자리를 뜨다가 ‘아차’ 하는 느낌으로 돌아서더니 엘리자베스에게 인사를 남겼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영애.”
“아, 네에…. 저도요.”
왜인지 엘리자베스는 약간 떨떠름한 기색이었으나 카이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성큼성큼 돌아 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보지 않고 사이나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텀을 두고 들어온 엘리자베스가 반대편 의자에 앉는데 표정이 어째 쀼루퉁했다.
예전이라면 그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이야기를 경청했겠지만, 지금의 사이나는 어린 날 둘의 사이가 어떤 식으로 돌아갔는지조차 잊은 상태였다.
사이나는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카탈로그를 설렁설렁 넘기며 잡스러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을 그리 있어도 사이나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는 잠시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사야, 근데 너… 카이언 공자 이야기 나한테 한 번도 한 적 없지 않아?”
뜬금없는 질문에 사이나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음? 뭐라고?”
“카이언 공자 말이야. 친해 보이던데.”
“안 친한데?”
“…무슨 소리야. 서로 평어 쓰고 이름까지 부르면서.”
정말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귀족의 등급이니 권력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만나서 알던 사이니 아무래도 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겠지.
“그건 그냥 어릴 때부터 가끔 보다 보니 그런 거지. 딱히 친하진 않아.”
게다가 자신은 유리도 아니고, 현재의 카이언과 어느 선까지 기억이 얽혀 있는지도 구분 못 하는 상태다.
“어릴 때부터?”
“응. 드보프가와 애크로이드가는 영지가 가까운 편이라.”
“세상에.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비밀로 할 수가 있어?”
사이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비밀로 한 적은 없는데? 말할 만한 계기가 없었던 거겠지.”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사실은 말해줄 수 있잖아!”
사이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이게 왜 중요한 사실이야?”
“…애크로이드는 후작가잖아! 카이언 공자는 가문의 후계자고!”
흠,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하지만 사이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남편이었던 사람은 훨씬 대단한 사람인걸.’
그 사람을 만나면 카이언은 눈에도 안 찰 테니 걱정 말라고 해주고 싶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굳이 나서서 말할 만큼 친한 건 아니지만, 이미 안면 텄으니 앞으로 잘 지내봐, 그럼.”
너 그런 거 잘하잖니.
생판 처음 본 사람과 말도 잘하고, 상냥하니 붙임성도 좋고.
굳이 사이나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아도 엘리자베스는 사람을 잘 사귀었다.
“그럼… 사야.”
“응?”
“너… 카이언 공자랑 티 타임 할 때 나도 불러주면 안 돼?”
사이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뭐?”
“걔랑 차 안 마실 거라서.”
“왜, 왜? 아까 드보프 저에 방문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조용하게 사이나에게만 말했는데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요청 오면 거절할 거야.”
“…왜? 너, 설마 지금 내가 같이 불러 달라고 해서 그래?”
엘리자베스의 상냥한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네가 오는 것과는 상관없는데?”
“그럼 뭔데?”
“그냥, 귀찮아. 할 것도 많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이나를 그제야 알 만하다는 눈으로 보며 엘리자베스가 타박했다.
“너, 또 그 아를어(語) 공부한다고 그러는 거지? 어휴!”
“…….”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
돌아오기 전의 사이나였다면 분명 ‘그 시간에 아를어를 한 자라도 더 파겠네.’라고 생각했을 거다.
똑똑.
“영애님들, 들어가겠습니다.”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데, 적당한 시점에 부티크의 직원들이 들어왔다.
앞선 두 직원의 손에는 연하게 연둣빛이 도는 새 드레스 두 벌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마담 샤를리즈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보프가의 영애님, 발데즈가의 영애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엘리자베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담 샤를리즈. 반갑군요.”
드레스에 넋이 팔린 엘리자베스의 몫까지 인사하며 마담 샤를리즈를 맞았다.
“네. 거의 다 완성된 건 보이시지요? 오늘 입어 보시고 세부 사이즈와 디테일 확정할 거예요.”
마담 샤를리즈는 직원들을 시켜 사이나와 엘리자베스가 각자 옷을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이 이끄는 대로 응접실 한쪽에 있는 파티션 뒤쪽 공간으로 가자, 능숙한 손길로 기존 드레스를 벗기고 새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파티션 밖으로 나오자 직원들이 사이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사이나가 거울에 비친 앞면의 자태를 살피는 동안, 뒤에서는 직원들이 허리께의 남는 공간을 접어 표시하고 치맛단 아래를 피기도 하며 전체적인 매무새를 살폈다.
“어머, 너무 예쁘세요.”
“그러게요. 데뷔탕트 볼에 참석하시면 남자분들이 눈을 못 떼실 거예요.”
“세상에.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직원들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뻔한 찬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이나에게도, 엘리자베스에게도.
‘또 연두색이네.’
사이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안의 자신을 살피며 생각했다.
이 시기의 그녀는 연두색을 그리 좋아했었나?
게다가 둘 다 같은 연두색이라니.
남이 입는 색을 피해서 입으려고 ‘어느 가문의 누가 무얼 입는다더라.’는 정보를 돈을 주고 사기도 하는 판국에, 엘리자베스는 어째서 둘의 드레스를 같은 색으로 맞추었을까.
“숲의 요정 같아요.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호호.”
엘리자베스를 향해 직원들이 하는 찬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과연. 정말 숲의 요정 같은걸?’
싱그러운 라임 블론드에 올리브색 눈동자를 지닌 엘리자베스가 연둣빛의 드레스를 입으니 화사하기가 말도 못 했다. 맞춤 색이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후훗. 아, 사야? 넌 어때?”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한참 살피고 만족스러웠는지 엘리자베스는 사이나 쪽으로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어머, 너무 예쁘다. 잘 어울려.”
“…….”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솔직히 그런 의문이 든다.
엘리자베스는 꽤 잘 꾸미는 축에 속했다. 아니, ‘꽤’가 아니고 ‘상당히’.
본판도 예쁘지만 그 매력을 배가시키는 꾸밈법 역시 잘 알았다.
고위 귀족가에 태어났으면 잘은 몰라도 유행을 선도하는 입장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나간 과거에서 공작부인이 된 엘리자베스가 그랬으니까.
물론 지금은 나이가 어리고 데뷔 전이기 때문에 더 경험이 있던 시절의 엘리자베스에 비하면 미숙하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미적 센스가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정말 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이렇게 들어가면 우리가 친구 사이인 줄 다 알 거야. 신난다. 그치?”
…아, 그거였나.
상냥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는 사이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 시절 자신이 연두색을 자주 챙겨 입었던 이유는 그런 이유였나 보다.
그런데 지금의 사이나에게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이 색상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 아닐 뿐더러, 친구라고 쌍둥이 같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같이 파티를 가는 것 자체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사이나는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았다.
‘난 당시에 엘리자베스를 그 정도로 좋아했었나?’
지나간 과거에서 사이나와 엘리자베스는 각자의 결혼을 기점으로 엄청나게 멀어졌었다. 둘이 친구였던 접점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이나는 멀어진 사이에 적응한 상태다. 신체의 나이가 어려졌다고 해서 기억이 지워진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같은 색깔 옷을 챙겨 입는 친구 사이라.’
그저, 지금의 사이나는 이해하지 못할 소녀 감성이었다.
* * *
열의를 가지고 임하는 엘리자베스와 달리 사이나는 건성건성 가봉을 끝냈다. 그것만으로도 지겨워져서 그녀는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사이나가 보석점과 소품점까지 같이 쇼핑해 주기를 원했다.
“사야~, 같이 가자, 응?”
“난 딱히 필요한 것도 없어.”
“그래도, 응? 나한테 어울리는 것도 좀 골라주고. 응?”
쇼핑 안목은 엘리자베스가 자신보다 낫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어차피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살 텐데 왜 구태여 같이 가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혼자서도 넌 예쁜 걸 잘 찾아내잖니. 굳이 내 도움 필요 없을걸?”
“…하지만 ‘라피스’에 갈 건데 네가 없으면 좀 그렇잖아!”
사이나는 그 말에 새삼 놀란 눈이 되어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