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생각지 못한 만남
바들거리는 손바닥이 차가운 흙바닥을 쓸었다. 밤새 이슬이 내려 축축한 바닥을 쓸던 손바닥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본래 유리의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작게 존재하는 옅은 초록빛의 무언가.
“…싹이 피었어.”
분명, 작은 잎사귀 하나가 움터있었다.
싹은 작았지만, 잔디나 잡풀은 아닌 것 같았다.
봄도 아닌데 싹이라니. 그 자체가 쓸데없이 상서롭게 느껴졌고, 하필 이 위치에 피어났다는 것에 자연스럽게 애정이 부여되었다.
‘이 싹이 더 자라면 무엇이 될까? 혹시… 나무가 될까?’
사이나로서는 싹만 보고서 이게 과연 무엇의 어린잎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싹 하나가 어쩐지 사이나를 안심시켰다.
완전히, 아주 완전하게 유리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아서…….
* * *
다음 날부터, 사이나는 극적으로 밝아졌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후, 묘하게 어두운 기색이던 그녀의 얼굴에서 구름이 걷힌 것이다.
그런 변화에 백작과 세이지, 유모 등은 반색했으나, 또 다른 고민에 부딪혀야 했다.
갑자기 꿈이 정원사로 바뀌기라도 한 것인지 매일 정원으로 나가 작은 싹 하나를 애지중지 돌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잘못되거나 죽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가문의 정원사에게 수시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물론,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그 어린 식물 근처에 장막을 치고 옆을 지키는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사이나의 묘한 집착증에 다들 걱정을 했지만 그녀가 밝아진 것도 사실이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사이에 시간은 흘러 가을이 무르익으며, 건국제가 어느새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자베스에게 서신이 도착했다.
[사야.
드레스가 거의 완성되었대!
네 몸 상태가 괜찮으면 같이 보러갈까? 아니면 드보프가로 배달하라고 할게.
-베쓰.]
혼자였다면 당연히 배달을 골랐을 것이다.
하지만 서신을 읽을 때 어쩌다 유모가 같이 있게 된 바람에 사이나는 강제 외출행이 확정되었다.
“이럴 때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요즘 아가씨 진짜 너무 집에만 계시는 거 아시죠?”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정원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참이다.
‘아가씨, 너무 곱게 자란 식물은 오히려 약해집니다. 자연이 주는 눈과 비바람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것을 겪어보는 겁니다. 아가씨의 과보호가 오히려 이 식물을 더 빨리 죽게 할 수도 있어요.’
사이나로서는 애틋하고 애틋해서 그리한 것인데 오히려 싹에게 안 좋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아가씨께서 신경 쓰시는 만큼,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이게 제 일 아닙니까.’
허허허 웃으며 고운 손에 흙을 그만 묻히라는 정원사의 말에 사이나는 자신이 좀 집착했음을 깨닫기는 했다.
* * *
약속 당일이 되었다.
사이나는 적당한 준비를 마치고 외출했다.
그녀의 외출에 세이지와 유모는 걱정을 하면서도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피곤하면 얼른 돌아오라며 신신당부를 늘어놓았다.
‘가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로하튼 거리.
사치와 향락을 위한 물품부터 일상용품까지, 귀족들을 위한 상점들이 총망라되어 늘어선 황도 최고의 번화가였다.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는 이 거리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고급 매장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급 의상실 중 하나였다. 입구부터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
마차에서 내린 사이나는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그 화려한 입구를 보고 멈춰 섰다.
‘결혼하고서는 근처에도 못 갔지.’
결혼 전에는 별생각 없이 맞춰 입던 의상실인데, 결혼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마담 샤를리즈 부티크의 모든 용품은 정말 매우, 매우 비쌌다. 드레스 한 벌 가격이 다른 의상실의 열 배를 호가했다.
돈도 돈이지만 황실이나 공·후작가의 영애들이 주요고객인지라, 돈이 있다고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백작가의 영애인 사이나로서는 들어갔다가 ‘예약이 꽉 차서 안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물론, 예약이 꽉 찼다는 말은 ‘급이 맞지 않으므로 거절한다.’는 뜻을 돌려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러나 사이나는 마담 샤를리즈에게서 드레스를 맞춰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은 사이나의 아버지와 마담 샤를리즈가 사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드보프 백작은 남부 왕국에서 귀한 옷감 몇 가지를 독점 거래하고 있었고, 그 옷감을 마담 샤를리즈의 부티크에서 받아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마담 샤를리즈는 자신을 고객으로 받아주었을 것 같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아가씨.”
사이나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구로 들어섰다.
“고마워요, 루퍼트 경.”
“아직 아니라니까요.”
“미리 불러 드리는 거예요.”
“으으,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서임 받는 것이 진짜 귀찮다는 기색이 선명했다.
주황색의 현란한 고수머리를 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퍼트를 보고 사이나는 작게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드보프가의 영애님. 발데즈가의 영애님은 도착하셔서 안쪽에 계십니다.”
벌써 도착했다고? 약간 의아함을 느끼며 사이나는 여러 개의 응접실들이 늘어선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도 급이 있었다. 사이나가 안내받는 곳은 아마 ‘일반’ 응접실쯤 될 것이다.
최고위 귀족가가 고객이다 보니 샤를리즈 부티크는 일반 응접실만 해도 엄청나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귀빈용 응접실은 더 어마어마할 것이다.
저 복도 안쪽에 있는 응접실이 귀빈용 응접실이 아닐까 싶다. 문부터 벌써 화려함이 남달랐다. 그 문짝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을 사이나가 무심코 보고 있는데.
딸깍. 문이 갑자기 열렸다.
사이나는 훔쳐보고 있다가 들킨 기분이 들어 잠시 흠칫했다.
“어, 이게 누구야?”
그런데 놀랍게도 안쪽 응접실에서 나온 사람이 사이나를 보고 반색하며 다가왔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선명한 적발에 암흑 같은 흑안을 가진 잘생긴 남자.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나이답게 이제는 다 컸다 싶으면서도 약간의 싱그러움이 남아 있었다.
카이언 애크로이드.
사이나는 말문을 잃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사이나?”
흠칫. 사이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흡사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에 카이언의 표정도 오묘해졌음은 물론이다.
“왜 이리 놀라? 내가 그렇게 널 놀라게 했어?”
“아가씨?”
여태 가만히 지켜보던 루퍼트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둘 사이로 매끄럽게 몸을 넣으며 공간을 갈랐다.
그 반응에 카이언이 한쪽 눈썹을 치키며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불쾌하다는 기색이었다.
“아, 루퍼트 경. 괜찮아요. 그저… 여기서 볼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봐서 그런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각 잡힌 자세로 다시 그녀의 옆쪽으로 물러나 선 루퍼트에게서는 평소 껄렁하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방문객을 받지 않아서 못 갔어. 일어난 걸 보니 반갑다.”
그의 말은 사실인 듯, 눈빛 안에 걱정스러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사이나는 여전히 놀라운 것을 보듯 커진 눈으로 그를 살피는 중이었다.
“…사이나?”
“아, 미안. 그….”
사이나가 놀란 이유는 이러했다.
유리와 사이나는 쌍둥이다 보니 항상 함께였다. 그 사이에 친구가 한 명 끼면 대개 셋이 함께 어울렸다.
그러나 카이언은 기본적으로 유리의 친구였다.
유리와 먼저 말을 텄고 친해져서 사이나까지 어울리게 된 경우였다.
그렇기에 유리가 없는 지금, 카이언이 사이나를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이나의 예상은 틀렸다. 카이언은 거리낌 없이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했다.
약간 당혹스럽다. 혹시 카이언에게 어떤 작은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카이언, 혹시 말이야….”
“음?”
“너, 음….”
“…….”
“…유.”
‘-리 기억나?’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찰나의 순간에, 눈앞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사야?”
사이나가 본래 들어가려고 했던 응접실이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엘리자베스였다.
“어, 이분은?”
갑작스럽게 질문이 끊긴 사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카이언은 그녀의 물음을 듣고 있다가 사이나의 입이 다물리는 것을 보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야? 이분은 누구셔?”
사이나의 애칭을 부르며 소개를 해주기를 돌려 묻는 엘리자베스의 웃음이 해맑았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안에서 동행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깜박했네. 여긴, 발데즈가의 영애, 엘리자베스.”
저도 모르게 친구 대신 ‘동행’이라고 표현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쪽은…….”
사이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친구? 그냥 아는 사람?
카이언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는 유리의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떤 관계인 거지?
그러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카이언이 나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애크로이드가(家)의 카이언입니다.”
“-애크로이드가요?”
카이언의 소개를 들은 엘리자베스의 미소가 한껏 더 진해졌다.
“베쓰라고 불러주세요.”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것을 참 잘했다. 귀족들 사이에 정해진 딱딱한 선의 경계를 조금씩 살짝 넘나들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의 그런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여겼다.
“카이언 공자님. 이름이 굉장히 잘 어울리시네요.”
“영애도 예쁜 이름을 가지셨군요.”
“어머, 감사해요.”
순식간에 대화에서 배제된 채 둘을 멀뚱히 바라보는 형태가 된 사이나였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좀 생뚱맞은 종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