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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7화 (7/233)

7화. 이해가 가지 않는 빈틈

전남편을 떠올리자 사이나는 자연스레 인상이 굳었다.

“사야, 넌 너 스스로를 너무 모르는구나.”

“그럼요. 이번 데뷔탕트 볼에서 우리 아가씨가 최고일 것이 틀림없는데 말이죠.”

“그렇지, 그렇지.”

팔은 안쪽으로 굽는 게 당연한 가족이라지만, 지나치게 과한 평가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사이나는 이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야, 너도 곧 데뷔를 앞둔 몸이니 괜히 타인들이 트집 잡을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응. 알았어.”

“네 의도와 상관없이 잣대를 들이대는 곳이 이쪽 생리다. 아예 물어뜯을 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

그랬다. 전생의 사이나는 그 생리에 정말 무지했었다.

결국 그 무지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융통성 없이 혼자 고통을 다 짊어졌더랬다.

“외출 시 루퍼트와 꼭 동행하고, 하녀도 꼭 동행하도록 해. 네가 이런 거 귀찮아하는 건 알지만….”

“알았어. 그럴게.”

사이나를 설득하려던 세이지는 그녀가 너무 선뜻 알았다고 대답하자 또다시 당황했다.

“잘 부탁드려요. 루퍼트 경.”

“아직 ‘경’이 아닌데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충분합니다.”

“아, 그런가요.”

아직 서임을 받지 않은 시점이라 그는 그냥 루퍼트였다.

“그렇군. 너 아직 서임 안 받았지.”

“…….”

그런데 갑자기 세이지가 심각한 얼굴로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너. 우리 사야한테 붙이기에는 결함이 너무 크네.”

“아, 또 왜요!”

“사야의 호위가 ‘경’도 아니라는 것을 남들이 알게 되면 어떻겠어?”

“난 괜찮….”

사이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세이지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루퍼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실력은 좀 딸려도 좀 더 진중한 놈으로 두 명을 붙여주는 게…….”

“-알겠어요! 아, 받으면 되잖습니까.”

두 명씩이나 동행하는 것은 사이나로서도 불편한 일이라 뭐라고 하려던 차에, 루퍼트가 소리쳤다.

투덜투덜 불만 가득한 얼굴이지만 그 내용은 ‘서임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전 삶에 비해 한참이나 당겨진 서임 시기인지라 사이나는 놀랐다.

“그래, 그럼 이번 건국제 서임식에 맞춰 겨우 명단을 넣을 수는 있겠군.”

가문의 등작(等爵)에 따라서 보유할 수 있는 기사의 수가 정해져 있다. 그 안에서 재량에 따라 기사를 임명할 수 있지만, 결국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하기는 했다.

기사의 실력은 곧 가문의 얼굴. 당연히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기사로 임명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명단을 올리면 승인을 내주는 정형화된 허가에 가깝기는 해도 황제의 승인이 없으면 완전한 서임이라고 할 수 없기에, 전쟁 중이 아닌 이상 서임식의 시기는 1년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건국제. 이번 시기를 놓치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서임 받기 전까지 넌 ‘임시 호위’다.”

“…아, 좀. 봐주십쇼.”

여태 고사하던 서임을 받겠다는 계기가 사이나의 호위직인 것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이지는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이 또 루퍼트를 쪼았다.

둘이 하는 행태가 웃겨서 사이나는 오랜만에 다른 것을 다 잊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 * *

엘리자베스의 행동력은 대단했다.

가는 길에 바로 예약을 했는지, 다음 날 바로 서신이 도착했다.

[사야.

네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굳이 외출하지 않아도 되게 부티크에 방문 요청했어.

다행히 마담이 요청을 받아 주었어.

디자인은 내가 다 알아서 말해두었으니 치수 재는 데에만 시간을 좀 내줘.

- 베쓰.]

지난 생에서 사이나는 드레스나 장신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엘리자베스가 다 도맡아 했다.

지금이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들에 대해 나름 잘 알게 되기는 했지만, 사이나는 본래 꾸밈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그러라고 하고 사이나는 다른 쪽에 골몰했다.

요 며칠 사이나는 유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지난 기억을 샅샅이 뒤져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녔다.

후원에는 저택 가까이에 가장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높이마다 금이 그어져 있고, 날짜와 이니셜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사이나와 유리가 어릴 때부터 누가 더 큰지 경쟁하듯이 서로의 키를 재며 표시해 두던 곳이다.

……빗금은 한 명분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다시 몸을 일으켜 후원 한쪽을 향해 달렸다.

꽃보다 나무가 주를 이루는 동쪽 후원, 그곳에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건강을 기원하며 식수를 하는 드보프 백작가의 전통에 따라 각자의 나무가 있었다.

세이지 나무 옆에 율의 나무가, 그리고 그 옆에 사이나의 나무.

본래라면 그랬어야 한다.

그러나, 없었다.

유리의 것이 없었다.

세이지와 사이나의 나무 사이에는 나무 한 그루가 더 들어갈 만큼의 딱 그 공간, 이해가 가지 않는 빈틈이 있을 뿐이었다.

‘제발…….’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몇 가지를 더 생각해냈다.

어릴 때 둘이 함께 숨었던 뒤쪽 숲의 나무 옹이구멍 안, 어릴 때 둘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정리되어 있는 다락방 등.

하지만 나무 구멍 안에 숨어서 새겼던 낙서 자국은 마찬가지로 사이나의 것만 남아 있었고,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산더미 같은 장난감 상자를 다 뒤졌으나, 유리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먼지만 잔뜩 뒤집어쓴 사이나는 상실감을 품고 돌아와 침대로 쓰러졌다.

과도한 집착 때문일까. 사이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

『사야. 내 나무가 더 크지롱.』

『아니거든? 그냥 잎사귀 하나가 조금 더 튀어나온 것뿐이잖아.』

햇살 밝은 어느 날, 일고여덟 즈음 먹은 어린 유리와 사이나가 동쪽 후원에서 나무 두 개의 길이를 어림잡아 재가며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둘이 태어나던 해에 나란히 심긴 각자의 식수(植樹)였다.

같은 나이를 가진 동류의 나무다 보니 높이는 사실 고만고만했다.

『무슨 소리야. 딱 봐도 내 나무의 가지가 더 길쭉하고 곧다!』

『가지가 길고 곧은 게 뭐 어쨌는데? 내 나무가 더 풍성하고 잎들도 훨씬 예쁘거든?』

『나뭇잎이 다 똑같지. 예쁘긴 뭐가 더 예뻐.』

『색을 봐봐. 내 껀 연두색이고 유리 너 껀 칙칙한 초록색에다 얼룩덜룩하잖아.』

『아, 그건- 내 나무가 중간에 끼어서 햇빛을 덜 받아서 그런 거잖아.』

『어쨌든 그렇잖아?』

『아, 진짜! 내 나무 자리 옮겨 달라고 할 거야! 아빠-!』

사이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유리를 이긴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혀를 날름거리며 유리를 놀렸던 기억.

물론 여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이후에 유리는 몰래 후원에 가서 사다리까지 동원해서는 사이나 나무에서 예쁜 잎사귀를 몽땅 뜯어내 버리고는 헤죽거렸다.

아직 성목(成木)은 아니지만 곧은 자태로 자라나던 나무의 잎사귀가 흉측하게 뜯겨 나간 것을 본 사이나가 빼액 소리 지르며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유리 드보프! 죽을래?! 한 번만 더 내 나무 건드렸다가는 너 꺼 나무 파버리라고 할 거야!』

『메에롱!』

유리가 전에 그녀가 했던 것처럼 혀를 낼름 내밀며 도망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사이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유리와의 꿈은 순식간에 사이나를 다시 과거의 기억에 묶어 버렸다.

쌍둥이여서일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툭하면 찾아와 그녀를 흔들어댔다.

“파버린다고 하지 말걸….”

탄생 때부터 함께 했던 반쪽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공허와 슬픔을 가져왔다.

굳이 표현하자면, 영혼의 질량이 반으로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전 삶에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율도 그랬을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사이나는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그랬을 것 같다.

심장 한쪽을 잃어버린 것 같은 깊은 구멍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새 차오른 눈물로 흐려진 눈가를 누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했던 나무.

세이지 것, 유리 것, 자신의 것.

나란히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방금 꿈속에서 본 이미지는 실제의 것처럼 선명했다.

어쩐지 당장 직접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열고 방을 나선 사이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건물을 나섰다.

동쪽 후원 방향으로 빠르게 걷던 그녀의 걸음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느려졌다.

대대로 드보프가의 일원이었던 자들에게 각각 속해있는 나무들의 숲을 뚫고 걸었다.

최대한 천천히 걸었어도 결국 도착했다. 자신의 나무가 금세 눈에 들어왔다.

성목이 되어버린 사이나의 나무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사이나보다 삼십 분 일찍 태어났다던 유리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는커녕, 존재조차 없었다.

세이지의 나무와 사이나의 나무 사이에 어색한 여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율아…….’

진짜처럼 선명한 꿈이라도, 꿈은 꿈일 뿐.

나무 사이의 여백이 새삼 쓰라렸다.

다시금 눈물이 솟아나 흐려진 시야 때문에 사이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확인하고자 굳이 여길 다시 왔을까. 다시 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잔인한 부재뿐인데.

달빛이 밝은 날이었던가.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에 달빛이 반사라도 되는 것인지 눈앞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사이나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하늘을 보았다.

올려다본 달빛은 그저 그랬다. 유난히 밝은 날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구름에 반쯤 걸쳐져 있는 데다가 보름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한숨을 내쉬며 시야를 내린 사이나는 다시금 유리의 나무가 있어야 할 빈자리를 응시했다.

“……?!”

그리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무언가,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달빛 아래에서도 눈에 뜨이는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사이나는 떨리는 눈을 부릅뜨며 다가가 발치에 꿇어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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