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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6화 (6/233)

6화. 있기는 있네, 막아야 할 놈이

어딘지 모르게 열렬한 구애 같은 엘리자베스의 말들을 듣다가, 사이나는 결국 수긍했다.

그래. 어떻게든 하면 할 수 있는데 불참하는 것보다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해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엘리자베스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싶기도 하고.

그녀의 승낙에 대번에 밝아지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싱그러웠다.

* * *

드보프 저택의 가족 식당.

상석에 백작이, 그 좌우로 세이지와 사이나가 자리했다.

드디어 환자식에서 벗어난 사이나가 가족과 함께 자리한 첫 석찬 자리였다.

예전에도 드보프가는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은 이상 저녁 식사시간만큼은 가족 식당에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 암묵적 약속이었다.

저녁시간마다 유리와 사이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고 세이지 오라버니는 그런 쌍둥이를 조용히 시켰다. 아버지는 뭐 어떻냐는 듯 흐뭇하게 바라보시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따금 그릇이 놓였다가 치워지는 시종들의 움직임 외에 사방이 조용했다. 긴장감이 흐를 정도로 말이다.

이 심각할 정도의 침묵은 분명… 자신의 탓이리라. 사이나는 민망해졌다.

‘이런…….’

그녀가 깨어나고 나서 아버지와 세이지는 그녀가 아기 새라도 된 것처럼 전전긍긍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사사건건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사이나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사이나가 일반 귀족 영애답지 않게 자란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부재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존재가 그리울 때가 있기는 했으나, 그 빈자리를 크게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립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나머지 가족들이 그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알 것 같았다.

‘…힘, 내야지.’

유리의 부재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고 슬픈 일이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우울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다른 가족을 위해서라도 사이나는 힘을 내야 했다.

“아버지.”

“으, 응?”

사이나가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를 부르자 놀란 듯 대답을 더듬으신다. 정말 그녀의 눈치를 보고 계셨나 보다.

새삼 미안한 마음에 사이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려 노력하며 말했다.

“저, 건국제 때 데뷔할게요.”

“뭐?”

의아한 듯 화답한 것은 세이지였다.

“시간이 부족하지 않아?”

“응. 그렇긴 한데, 어차피 올해 안에 데뷔해야 하는 거였으니까…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베쓰가 도와준다고 하기도 하고.”

“발데즈 영애가? 흠, 그럼 우즈와 상단에 미리 말을 해두마.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사도록 해라.”

드보프 백작이 반색을 하며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았다.

딸보고 돈 쓰러 가라며 반색을 할 정도라니,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계셨는지 알만했다.

“드레스는 샤를리즈 부티크냐?”

“네.”

“내, 미리 마담에게도 말을 해두마.”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계속 이것저것을 물었다. 사이나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오가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지가 사이나를 호출했다.

“사야. 이따가 잠깐 내 집무실로 와. 알려줄 것이 있다.”

“음? 알았어.”

이후 식사 시간은 이전 삶에서처럼 발랄하지는 않았으나, 아까보다는 충분히 훈훈했다.

* * *

똑똑.

사이나는 세이지의 집무실 앞에서 멈춰 서서 노크했다.

저녁 식사 후 잠깐 찾아오라는 말에 방문한 참이다.

노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죠. 아가씨.”

사이나는 문을 열어주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보프 백작가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분명…….

“…캐롯 경?”

사이나는 짙은 주홍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캐롯 경’이라고 불렀다가 흠칫하며 입을 막았다.

남자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멍해졌다.

이 기사는 지난 생에서 유리와 유독 친하게 지내던 기사였다. 툭닥툭닥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꼭 친구처럼 굴었었다.

진짜 이름은 아마…….

“…루퍼트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평민 출신이라 성은 없었다.

‘루퍼트. 기사 취임하면 내가 성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때?’

‘됐습니다. 이상한 것일 게 뻔합니다.’

‘아냐, 아냐. 자네랑 딱이라니까?’

‘후……. 뭔데요? 들어나 보죠.’

‘자네의 외양에 딱 맞아.’

‘…이상한 것일 게 뻔하군요.’

‘루퍼트 캐롯. 캐롯 경, 어때?’

‘아, 지금 장난합니까?!’

당근과 닮았다며 낄낄거리던 유리와 거기에 발끈해서 짜증을 내던 루퍼트의 기억이 선명했다.

결국 그의 별명은 ‘캐롯 경’이 되었고, 나중에 제대로 된 성을 받은 이후에도 주변에서는 다 그를 캐롯 경이라고 불렀더랬다.

그런데 이 기억은 유리가 중심이다. 사이나 외에 이 기억은 누구에게 남아 있을까.

있기는 할까?

다시금 울컥해지는 마음에, 사이나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아, 아가씨?”

퍽! 세이지가 루퍼트의 등짝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이 자식이, 별명 좀 지어줬다고 지금 우리 사야에게 날을 세웠냐?!”

“에-?”

“캐롯 경이 어때서! 너랑 딱 어울리는구만!”

“아니라고요! 그런 적 없습니다만?”

“너 인상 쓴 거 다 봤거든!”

“아니! 제가 언제요오-?”

등짝을 내려치려는 세이지와 뽈뽈 피해서 도망치는 루퍼트의 행각이 한참을 이어졌다.

“아파요! 왜 폭력을 쓰십니까!”

“개뿔! 네 등짝을 치는 내 손바닥이 더 아프다! 이 근육 덩어리야!”

사이나는 잠깐 울먹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그 광경을 보다가 약간 웃고 말았다.

“풉-”

커다란 덩치의 남자 둘이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니 왜 이리 웃긴지.

맞다. 루퍼트는 평민 출신 기사임에도 전혀 귀족들에게 기가 죽는 성향이 아니었다.

항상 껄렁대고 장난기가 다분한 그런 성격이었는데, 검술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들었다.

엄밀히 말해 지금은 ‘경’이 아닐 것이다.

이전 삶에도 그는 기사 서임을 미룰 만큼 미뤘다가 받았었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작위를 받으면 직책도 받아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라고.

게다가 세이지를 보는 데에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전생엔 그리 어렵게 느껴졌던 큰 오라버니가 지금은 왜 저렇게 팔불출처럼 보이는 거지?

“아하하.”

한참을 소리 내어 웃고 났더니 세이지와 루퍼트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웃어서 미안해요.”

사람 면전에서 너무 대놓고 웃었다는 자각이 들어 사이나는 사과했다.

“아니다. 웃으니 좋구나, 사야. 네가 웃는 게 얼마 만인지.”

세이지는 덩달아 웃으며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퍽!

그리고 여전히 넋을 빼고 있는 루퍼트의 등짝을 치며 말했다.

“으악! 또 왜 때리십니까?”

“이 자식아! 반하지 마. 죽여 버린다.”

“…….”

어쩐지 광대뼈 부분이 붉어진 루퍼트를 보며 세이지가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 불안한데… 교체할까?”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제 입장은 알거든요?”

“못 믿겠는데?”

또 아옹다옹하는 소리에 사이나는 그들을 보다가 물었다.

“뭘 교체해요?”

“흠, 그게…….”

세이지가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는데 루퍼트가 냉큼 나서더니 크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된 루퍼트입니다.”

아, 호위기사를 붙여주려고 불렀구나.

지난 삶에서는 ‘싫다’고 ‘귀찮다’고 떼를 써서 가볍게 다녔다.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건데…….’

그래. 이제 본격적으로 외출을 하기 시작할 거고, 건국제 기간 동안에는 타운 하우스에서 지내야 할 텐데 잘되었다 싶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알겠어요.”

“으, 응? 알겠어?”

사이나가 흔쾌히 받아들이자 세이지는 되레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아니다. 흠. 갑자기 이놈 말고 다른 놈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진지하게 턱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리는 세이지에게 루퍼트가 또 투덜투덜 거렸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웃으시니까 너무 다른 사람 같아서 그런 거지요! 솔직히 도련님도 저랑 똑같은 표정 지으셨지 않습니까?”

“내, 내가 언제?!”

“다아- 봤거든요, 제가?”

사이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면서 나이에 맞지 않는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흰 피부에 밤바다 같은 검은 머리, 제비꽃을 얼음물 위에 띄워 놓은 것 같은 눈동자.

전체적으로 어두운 계열의 색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소녀 특유의 천진함이 사라지자, 차가움이 더 부각되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굉장히 접근하기 힘든 냉미녀의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그런데 웃으면 그런 느낌이 싹 사라진다.

그 미소는 또래 나이가 가진 사랑스럽고 귀여운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나,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매혹적이면서도 묘하게 청아했다.

일종의 반전미랄까,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모습을 자아냈다.

“근데, 아가씨는 어디 가서 함부로 웃고 다니시면 안 되겠네요.”

“……동의한다.”

“제가 잘 지켜보겠습니다.”

“…제길. 어쩔 수 없군.”

사이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한데, 내용이 조금 이상해져서 물었다.

“밖에 나가서 웃지 말라고요? 왜요?”

세이지와 루퍼트가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 모습이 꼭 미리 맞춘 행동처럼 각이 맞는다.

“아깝습니다.”

“그렇지. 아깝다.”

여전히 의문을 띤 얼굴로 그들을 보자, 세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온갖 똥파리가 다 꼬일 게 분명해.”

“동의합니다. 제가 잘 감시, 아니, 호위하겠습니다.”

점점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감시? 그런 목적으로 호위 붙여주는 거였어, 오라버니?”

“그, 그게 아니라.”

세이지가 또 살벌한 눈빛을 루퍼트에게 보내자 그가 하하 웃으며 냉큼 변명했다.

“아가씨 주변에 별 이상한 놈, 아니 남자들이 집적거릴 수도 있으니 감시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 그거다.”

“……에? 그럴 일이 있겠어요?”

이전 삶을 거쳐 온 결과를 보면 사이나는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밝고, 명랑하고 좀 더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엘리자베스 발데즈.

그래, 그녀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그럼에도…….

‘있기는 있네, 막아야 할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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