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지막 기회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걸 거야.”
다정한 세이지라…….
큰 오라버니가 다정한 성격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오히려 무섭고 딱딱했었는데…….
지금의 세이지는 사이나가 느끼기에도 퍽이나 다정했다.
유리가 없는 세계라 성격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연령을 기반으로 한 나이 차로 치면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더 이상 ‘큰’ 오라버니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전에 비해 세이지가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에야말로 데뷔를 치러야 할 텐데 네가 적응을 잘할까 걱정이 된다고, 나한테 부탁하시더라고.”
데뷔?
‘꼭 해야 하나?’
저번에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
“나야 뭐, 잘 모르겠어.”
이전에 자신은 열여덟에 데뷔했다. 지금은 그 시기가 한참 지나가 버렸고 말이다.
지금 나이에야 데뷔가 아주 큰일처럼 느껴지지만, 살다 보니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든 안 하든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모르겠으면 어떻게 해? 돌아오는 건국제가 마지막 기회인 건 알지?!”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코앞이라서…….”
“아니지. 내가 도울게! 드레스만 해결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다시 준비하면 돼! 할 수 있어!”
다급하게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약간 묘했다. 웃고 있는데 초조함이 느껴진달까? 초조함? 대체 왜?
“…난 괜찮아. 넌 이미 데뷔했을 텐데 굳이 도와줄 필요 없어. 작년에야 같이 참석하기로 했으니까 도움을 받은 거지만.”
둘이 같이하기로 했었는데, 사이나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홀로 먼저 데뷔했을 것이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엘리자베스와 상관도 없는 데뷔탕트 볼. 그렇게까지 도움을 받기는 좀 그랬다. 사이나는 당연하게도 괜찮다며 사양했다.
근데 그때,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매우 딱딱해졌다.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엘리자베스의 굳은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어느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데뷔 아직 안 했어.”
뭐? 아직 데뷔를 안 했다고?
“어, 왜…?”
“데뷔탕트 볼 직전에 제일 친한 친구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좀 그렇잖아.”
데뷔탕트 볼은 귀족 영애가 사교계에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리는 목적으로 치러지는 무도회를 말한다.
그리고 제국에서 귀족 영애들이 데뷔를 치르는 나이는 16세에서 19세 사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데뷔할 나이를 고르기는 하지만 보통은 16~17세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사교계는 인맥 형성이 가장 큰 목적이었고, 그 목적이라면 최대한 빨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유리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이나는 사교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열여덟에 데뷔하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엘리자베스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다~아 준비할 테니까, 사이나 너는 그저 참석만 해, 참석만! 알았지?’
사이나는 전생에 고대 문명 <아를-프로메사>와 고대 언어인 아를어 외에는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드레스나 보석, 혹은 유행 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도와준다고 할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엘리자베스의 가이드에 따라 드레스 디자인을 골랐고 장신구도 마찬가지였다. 티 파티도 그저 엘리자베스를 따라 다녔고, 소개시켜 주는 인맥과 별생각 없이 인사하고 적당히 어울렸었다.
“…너 되게 기대했었지 않니? 준비도 엄청 했었고.”
그런데 사이나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엄청나게 꼼꼼하게 계획을 짰었다. 드레스 장식 하나, 작은 머리꽂이 하나를 고르는 것도 매우 심혈을 기울일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여놓고, 데뷔를 안 했다고…?
“네가 깨어날 거라고 믿고 있었어. 깨어나면 같이하면 되니까. 우린, 친구잖아.”
“…….”
“그리고 이것 봐. 결국 깨어났잖아.”
방긋 웃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주는 인상은… 뭐랄까. 묘했다.
오가는 대화로만 보면 분명 감동을 받아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인 것 같은데, 왜일까. 사이나의 심장은 미동도 없었다.
“…….”
유리 때문에 망연해진 탓인가.
사이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유리가 함께였다. 둘은 함께 자랐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으며, 서로가 있기에 완전하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사실 사이나는 다른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으나, 유일한 예외가 엘리자베스였다.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사이나는 약간 괴짜로 통했다. 그런 그녀에게 엘리자베스는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 살갑게 대해주었고, 상냥한 말투로 사이나가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는 했다.
유리와 통한다고는 해도 성별이 다르다 보니 같이 가지 못하는 곳이 있었고, 생활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는 부분이 약간은 있었는데, 그런 부분에서 엘리자베스가 사이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사이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사야?”
사이나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던지, 엘리자베스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 니? 혹시… 아직도 안 좋은 거야?”
“아, 그런 건 아닌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 건 알지…? 우리 꼭 데뷔해야 해.”
이제는 약간의 성급함마저 띠는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열아홉인 데다가 1년에 두 번 있는 데뷔탕트 볼 중에서 신년제의 것은 이미 지나버렸으니, 확실히 마지막 기회라는 말은 맞았다.
가난한 지방 귀족가일지라도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린 영애라면 무조건 황도에 와서 데뷔를 해야 한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데뷔가 어려운 집안을 위해 황성에서는 숙식은 물론, 의상 및 장신구의 대여까지 해주고 있어서 그런 쪽으로는 핑계 삼을 수 없었다.
제국의 모든 귀족 영애들에게 공정한 데뷔의 기회를 주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으나, 사실 정말 가난한 귀족가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대여한 의상으로 데뷔탕트 볼을 치르지는 않는다.
특히 데뷔 이후 중앙 사교계에서 활동을 하고 싶은 경우라면 말이다.
“흠…….”
솔직히, 사이나는 심드렁했다.
마음 같아서는 굳이 데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간 삶에서 데뷔탕트 볼 이후부터 삶이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무라고는 해도 벌금을 내면 된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비용보다 비싼 벌금이지만 드보프 가문이 가난한 가문도 아니고, 현재 사이나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충분히 핑계를 댈 수 있는 선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사교계 소식이랑 이번 시즌 유행 등은 꾸준히 수집해 뒀어. 준비는 내가 다 할 테니, 저번에 말한 것처럼 넌 그냥 참석만 하면 돼.”
“음.”
“…물론 치수 잴 때랑 가봉할 때 정도는 같이 동행해줘야 하지만. 정말 할 거 없다니까?”
무슨 말을 해도 큰 반응이 없는 사이나 때문인지, 엘리자베스는 자꾸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건국제까지 얼마 안 남기는 했지만 전에 준비해둔 게 있으니 할 수 있어.”
“…….”
“괜찮지, 응? 참석만 해.”
아, 사실 정말 귀찮은데.
그녀는 대답을 삼키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마담 샤를리즈 부티크는 분명 예약이 엄청날 테지만 작년에 의뢰했던 기록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
“사야, 듣고 있어? 우린 다른 영애들에 비해 몇 년이나 뒤처진 상태야. 더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
사이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언젠지 모르게 품에서 꺼낸 목록지를 살피며 열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순수한 문병은 아니었네.’
문병의 목적으로만 왔다면 굳이 저런 목록을 챙겨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델본까지 와준 엘리자베스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나는 이를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조급했으면 그냥 먼저 데뷔하지 그랬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썼을 거 알잖아.”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사이나는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약간 굳는 듯했으나 금세 배시시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넌 신경 안 쓰겠지만 내가 신경이 쓰였어. 그리고 우리가 친구인 거 뻔히 아는데 나 혼자 데뷔하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거야. 친구는 병으로 누워 있는데 나 혼자 파티를 즐기기도 힘들고.”
“…병 걸린 걸 어떻게 뭐라 하겠어. 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너… 왜 그래? 좀 이상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놀랍게도, 엘리자베스의 말투가 뾰족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
사이나는 데뷔탕트 볼이나 사교계보다, 자신에게 벌어진 이 일의 원인이 뭔지, 왜 아무도 유리를 기억 못 하는지, 혹시 이런 경우가 자신 외에도 있었는지 등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게다가 스스로 자각은 없었으나, 사이나는 사실 오랜 마음고생과 고통스러운 병상 생활로 인해 정신이 지나치게 소모되어 번아웃 증후군을 거치는 중이었다.
나이는 어려졌으나 기억은 그대로이다 보니 소녀답게 명랑한 행동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걱정이 심한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더 이상해졌다는 인식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나마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데뷔고 뭐고 사실 난, 별로 의욕이 없어. 피곤하기만 해서.”
그녀의 대답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사야….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럴 수 있지.”
다시 사르르 웃으며 조곤조곤 말하는 말투가 진한 설득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데뷔하긴 해야 하잖아. 마지막 해니까.”
“…….”
“걱정 마. 준비는 내가 다 한다니까? 넌 몸조리 잘하고 푹 쉬다가 당일에만 잠깐 참석하면 돼.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분명 드보프 백작님께서도 기뻐하실 거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