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유일했던 사이
아버지와 세이지는 한동안 아침마다 찾아왔다.
사이나가 깨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가 자신의 하루를 시작했다.
걱정이 많았다. 잠이 든 사이나가 혹시 또 깨어나지 않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유리를 찾으며 야밤에 미친 사람처럼 온 저택을 헤맸으니 더 그럴 터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이나는 멍한 정신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분명 시간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 같은데, 문제는 유리가 없었다.
꿈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유리가 없으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벗어나 과거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행복해야 정상인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공허한데, 대체 전엔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안 보고 살 수 있었을까.
이전 삶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유리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 너무 미안해졌다.
* *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가씨!”
유모 마르다의 목소리.
그녀도 사이나가 과거 정말 그리워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마르다는 결혼 후에 그녀를 따라오고 싶어 했으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은 재물은 주는 족족 받아 챙기면서도 친정에서 사람을 데려가는 것은 굉장히 싫어했다.
굳이 데려가려면 할 수는 있었겠지만, 사이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 집안에서 괴로운 것은 혼자면 족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헤어져 죽을 때까지 보지 못했던 유모가 다시 사이나의 매일을 챙겨주는 일상을 겪고 있자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일어나셨지요?”
요즘 사이나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 때문인지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녀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던 유모가 오늘은 왜인지, 한 무더기의 하녀와 함께 사이나의 방에 들이닥쳤다.
“친구분이 놀러 오셨어요. 차라도 한잔하시면 어때요?”
“……친구?”
사이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발데즈 영애님이요. 아가씨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대요.”
“…베쓰 말이야?”
“네.”
사이나는 순간 굉장히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엘리자베스 발데즈.’
익숙하면서도 서먹한 이름이다.
지난 생에서 사이나의 유일한 친구였으니 익숙하면서도, 그녀의 정신은 열아홉보다는 스물아홉에 더 가깝기에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사이는 사이나가 결혼하면서 멀어졌고, 엘리자베스가 결혼하면서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 상태의 사이나는 오랜 시간 동안 거지 같은 결혼 생활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의 여정을 지나며 감성이 상당히 메마른 상태였다.
유리 건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니, 가족도 아닌 누군가를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안 보면 안 되나?’
하지만 사이나가 망연해 있는 틈을 타고 마르다는 하녀들을 시켜 그녀를 일사불란하게 준비시켰다.
재빨리 머리를 빗어 정돈하더니 옆머리를 곱게 땋아 뒤에서 반 묶음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머지는 길게 내렸다.
‘휴…. 여기까지 왔는데 하긴, 그건 좀 그렇지.’
드보프 가문은 황도 기반의 귀족이지만 타운 하우스보다는 대부분 영지 내(內) 본저에서 생활했다.
드보프 영지 자체가 황도와 가깝기 때문이다. 황도를 빠져나오면 바로 드보프 영지를 만날 수 있을 만큼 붙어 있었다.
이는 드보프 가문이 명문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황도 바로 옆에 엄청난 크기의 영지를 소유한 가문이다 보니, 오가는 여행자만 해도 굉장히 많았고, 상단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영지 전체가 발달된 상태였다.
하지만 황도와 맞붙어 있다고 해서 준비도 없이 오갈 정도로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영지 자체가 넓다 보니 드보프 본가 저택이 자리한 중앙령을 부르는 이름인 ‘델본’까지 오려면 황도 ‘페이즐’에서 마차로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말을 타고 최고 속도로 달리면 한 시간가량의 거리이기는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말을 타고 왔을 리는 없으니….
그 여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전에 베쓰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언제더라…….’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사이, 하녀가 드레스 룸에서 몇 개의 드레스를 꺼내왔다.
마르다는 그중 발랄한 연두색의 드레스를 골랐다.
“아가씨, 연두색 좋아하시잖아요. 기분이 좀 나아지실 거예요.”
“…뭐? 내가?”
그랬었나. 예전의 그녀는 연두색을 좋아했었던가.
생소하다 못해 놀랍다.
조금 더 크고 나서 사이나는 자신이 그런 발랄한 색상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흑발에 진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서 전체적인 외양의 명도가 낮았다. 그래서인지 아예 원색이거나 채도가 낮은 드레스가 더 잘 받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지금은 굳이, 갈아입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위해 옷을 차려입는다는 것 자체에도 현실감을 못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이 가볍게 화장까지 해주었다. 볼과 입술을 발그레하게 하는 간단한 터치 정도였지만 어딘가 우울해 보이던 기색을 사라지게 하는 훌륭한 효과가 있었다.
“요즘 계절과 잘 어울리네요. 화사한 색으로 드레스를 더 맞추면 어떠세요, 아가씨? 기분 전환도 하실 겸.”
사이나의 기분을 북돋기 위해서인지 마르다는 그녀의 매무새를 정돈시켜 주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사이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분명 자신의 모습인데, 삶에 찌든 기색이 사라지고 매우 어려진 외양은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분과 달달한 것 드시면서 수다 좀 떨고 오세요.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셨잖아요.”
“…….”
“알았죠, 아가씨?”
“응.”
“요즘 사교계는 어떤지 밀린 소식도 좀 챙겨 들으시구요. 네?”
“알았어.”
사이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 * *
사이나는 응접실에 들어서기 직전, 꺄르르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웃음소리에 그녀는 문가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이 움직였다.
엘리자베스 발데즈.
라임 블론드의 고수머리가 어깨 한쪽으로 풍성하게 늘어뜨려져 있고, 올리브 그린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처럼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부드럽고 청량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델본까지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쌓였을 일말의 피로감도 엿볼 수 없었다.
“어머, 사야?”
사이나가 들어가는 방향과 마주 보는 면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해왔다.
“아, 사야가 왔구나.”
등을 보이는 방향에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몸을 틀며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오라버니?”
세이지였다.
“너 기다리는 동안, 세이지 오빠가 내 말 상대를 해주셨어.”
‘…오빠?’ 둘이 ‘오빠’라는 호칭을 쓸 정도로 친했었나?
“사야가 왔으니, 나는 이제 가 보겠다.”
“어머, 좀 더 있다 가셔도 괜찮은데요. 물론, 세이지 오빠 시간이 괜찮으시면요.”
“제안은 고맙지만 나도 할 일이 있어서. 우리 사야 잘 부탁한다.”
“네, 걱정 마세요.”
세이지가 사이나를 지나치며 그녀의 정수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좋은 시간 보내렴.”
그는 사이나를 향해 한껏 웃어주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사이나는 나가는 세이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야를 물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참 동안 세이지를 응시하다가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이리 와 앉아.”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사이나를 향해 손짓했다.
갑자기 주인과 손님이 바뀐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사이나는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겨 자리했다.
“네가 갑자기 그리되고 나서 엄청 걱정했어. 이제 괜찮은 거야?”
“아, 응. 뭐, 거의 나았어.”
“자주 오고 싶었지만, 드보프가에서 손님을 안 받더라고. 이제야 올 수 있었지 뭐니.”
“그랬어? 와줘서 고마워.”
처진 눈매와 촉촉한 목소리는 정말 사이나를 많이 걱정한 것 같았다. 그 진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진솔한 표정이었다.
“근데 너… 나 말고 더 친한 친구 생겼어?”
“응? 무슨 소리야?”
“유리라는 사람 말이야.”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사이나는 놀라서 날카롭게 물었다. 격렬한 사이나의 반응에 엘리자베스는 내심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군데, 반응이 이리 격해?”
“율이 누구냐고? 누군지 몰라서 묻는 거야?”
“아, 응. 난, 모르지……. 아까 세이지 오빠가…….”
“하.”
그래서 세이지가 엘리자베스를 앞서 만나러 내려왔던 건가. 떠보려고? 어쩐 일로 단둘이 만나고 있나 했더니 말이다.
뾰족하게 치솟아버린 신경을 억지로 내리누르느라 사이나는 미간을 슬슬 문질렀다.
자신 외에 유리를 기억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난 줄 알고 순간 심장이 덜컥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뭐야, 중요한 사람이야? 애인?”
“그런 거 아니야.”
“……서운하네. 전엔 우린, 서로 다 털어놓고는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정말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통이 난 듯하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표정이 귀엽기는 했으나, 유리에 관련한 사항은 주절주절 떠들 만한 게 아니었다.
“오빠가 뭘 착각한 게 있어서 그래. 정말 별일 아냐.”
별일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극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지만,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려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내가 실은 쌍둥이 오빠가 있었는데 시간을 돌아왔더니 사라졌더라. 그 사람의 이름이 ‘율’이다. 이런 설명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잠시 둘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았으나, 엘리자베스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띄워 올리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아까 널 엄청 걱정하시더라. 오빠가 다정해서 참 부럽지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