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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3화 (3/233)

3화. 그리고 되돌려지지 못한

이후 알게 된 것들은 이러했다.

사이나는 작년 가을에 창문을 열고 잠들었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다.

‘그런 일이 있긴 했지.’

기억난다.

전생에도 열여덟, 그 즈음에 꽤 심하게 앓았던 터라 살이 많이 내려서 데뷔 때 입을 드레스 가봉을 새로 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후의 전개가 조금 이상했다. 감기 걸린 것까지는 동일한데, 열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디 남작이 진찰하기로는 수면에 들었을 때의 신체 반응과 같은데 왜 깨어나지 않는지 모르겠어서 별짓을 다 해보았다고 했다. 소용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날이 한 달이 넘어가자, 드보프 백작과 고디 남작은 각자 아는 선에서 온갖 전문가들을 다 불러들여 사이나를 진찰하게 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녀의 몸이 잠든 그 상태 그대로 변화가 없었다는 점. 머리카락도 손발톱도 전혀 자라지 않았단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빼놓은 것처럼.

보통 이렇게 오랫동안 누웠다가 깨어난 경우, 근육과 관절이 굳고 뼈가 약해져 오랫동안 보양과 운동을 해야만 다시 전처럼 움직일 수 있단다.

그런데 사이나는 깨어나자마자 정상인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고디 남작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속이 편한 음식부터 드시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뻑뻑한 육류나 딱딱한 음식들은 사흘 정도 상태를 보고 올리라 전하지요.”

“그러는 게 좋겠소. 남작.”

죽기 전 사이나는 무얼 먹어도 잘 넘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쇠약한데 음식까지 넘기지 못하니 급격하게 더 약해졌다.

입맛이라는 것을 느껴본 지가 오래다. 그런데 지금은 소 한 마리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세이지와 백작은 다시 한번 사이나를 안아주며, 하녀에게 그녀의 식사를 지시했다.

“방금 깨어났는데 식당까지 내려와 무리할 것 없다. 방으로 올리라 하마. 먹고 푹 쉬도록 해라.”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다정하기 그지없는 가족의 태도가 낯설면서도 가슴이 벅찼다. 사이나는 울컥거리는 목울대를 삼키며 대답했다.

“…아버지? 너 왜….”

“네?”

“음, 아니다. 쉬어라.”

백작과 세이지가 사이나의 방을 나가는 동안, 고디 남작이 왕진 가방에 자신을 물품을 챙기며 인사했다.

“저도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며칠간은 가까이 머무를 생각이니, 혹시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절대 개의치 마시고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네.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이후 사이나는 따뜻한 물을 가득 넣은 욕조에서 목욕을 했다.

이렇게 하녀들의 섬세한 수발을 받으며 목욕을 한 것은 매우 오래전의 일이다. 기억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 부드러운 빵과 진하게 국물을 낸 스튜, 고디 남작이 추가로 따로 올린 보양용 약탕을 먹었다.

“아, 내려가서 유리 좀 불러줄래?”

사이나는 식사를 마친 그릇들을 트롤리에 실어 나가는 하녀에게 말했다.

사실, 정신이 든 이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유리요? 본저 하녀 중에 그런 이름은 없는데, 시종인가요?”

“…뭐?”

그런데 하녀의 대답이 좀 이상했다.

“유리 몰라? 내 오빠 말이야.”

“……소백작님이요? 하지만 소백작님 성함은…….”

하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알겠다고 하며 나갔다.

사이나는 사이나대로 황당했다. 저 하녀는 드보프가에서 꽤 오래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소주인의 이름도 모른단 말인가.

사이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는 여겼으나 더 깊이 생각은 하지 못했다.

회귀를 한 충격과 가족과의 재회에 심력 소모가 컸던 것인지, 아니면 약탕 때문인지,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금세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 * *

달이 중천에 걸린 새벽.

사이나는 불현듯 눈을 떴다.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든지라 일찍이 깨어난 듯했다.

‘아….’

여긴…. 그래. 시간을 돌아왔어.

기억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잠들기 전 마지막 장면을 불러왔다.

‘…유리는.’

유리를 못 봤네. 이미 다녀간 걸까?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사이나를 찾아왔어야 정상인데…….

다시 잠에 들기에는 정신이 지나치게 명료하기도 하고, 이참에 사이나는 자신이 먼저 걸음을 해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선 사이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푹신한 카펫 위를 골라 밟으며 문가로 다가갔다.

끼익.

적요한 밤중이라 그런지 문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사이나는 문을 조심히 닫고 복도로 발을 디뎠다. 방 바깥에 펼쳐진 복도는 어두웠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거더라….’

그의 방은 아래층.

유리는 세이지 오라버니와 같은 층을 썼다. 사이나는 주변을 살피며 몰래 계단을 내려갔다. 괜히 여럿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유리. 유리가 보고 싶었다.

타닥타닥.

작은 발소리가 곧 익숙한 문 앞에 다다랐다. 벌컥! 약간은 심통이 섞인 거센 몸짓으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유리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라고.

“……?”

음?

사이나는 다시 복도로 나가 방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방.

‘맞는데?’

원래 복도 안쪽 방이 더 넓은데도 유리는 이 방을 고집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이 방에서 보는 창밖 풍경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사이나는 알았다.

테라스 바깥에 큰 나무가 바로 붙어있어 몰래 방에서 빠져나가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사이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 바깥 나무를 살폈다. 달이 비추는 밤빛 아래 커다란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가 없었다.

“왜, 빈 방이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던 어느 시절에 유리가 방을 바꿨던가? 아니면 외출 중?

외출 중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이상하다. 이 방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장소가 가지는 특유의 냉랭함이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사이나는 테라스를 열고 나갔다.

나무가 연결되는 쪽 벽에 둘 사이의 암호를 적어두는 영역이 있었다. 정밀한 암호는 아니고 장난에 가까운 간략한 것들이었지만, 둘은 그런 것을 좋아했다.

밤에 나무를 타고 몰래 외출을 하는 날이면 유리는 사이나가 알아볼 수 있도록 간단하게 목적지나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을 암호로 표시해 두고는 했다.

야밤에 사이나가 몰래 찾아드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없어.”

암호의 흔적이 없다.

아니, 몇 개의 암호의 흔적이 있기는 했으나, 유리가 적은 부분만 없었다.

지운 거라면 다 같이 없던지, 아니면 다 같이 있던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벽에 적힌 삐뚤빼뚤한 도형은 온전하지 못한 형태를 이룬 채, 반쪽만 남아 있었다.

‘…뭐지?’

사이나는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기묘한 위화감.

사이나는 다다닥 방을 나섰다.

살금살금 걷던, 아까의 조심성은 이미 사라졌다.

그녀는 복도로 나가 유리의 옆방 문을 벌컥 열었다.

…없다.

그다음 문도 열었다. 그다음 문도.

쾅! 쾅! 문이 열었다 닫히는 소리에 가장 안쪽에 있던 방에서 세이지가 나왔다.

그는 한밤중 복도를 울리는 굉음에 놀라 나왔다가, 미친 듯이 문을 여닫고 있는 사이나를 보고 더 깜짝 놀랐다.

“…사야?”

사이나는 홀린 듯이 문을 계속 여닫고 있었다. 표정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심상치 않은 사이나의 표정에 세이지가 불안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사야, 이 밤에… 대체 뭘 하는 거냐?”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이나는 이 층에 있는 모든 방을 확인해야겠다는 기세로 계속해서 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어디…, 어디 간 거야?”

사이나가 중얼거렸다. 말투에 조급한 울먹거림이 묻어났다.

세이지는 결국 또 다른 문을 여는 사이나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제야 그를 인지한 것인지 그녀가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오라버니?”

“그래. 사야. 대체 무슨 일이지?”

사이나가 다급하게 그를 붙들며 물었다.

“율, 유리 어디 갔어?”

“……율?”

“유리 방이 왜 비었어?”

세이지는 잠시 멍해졌다.

“율이 누군데…?”

“……이건 꿈인가? 실은 꿈속이었던 걸까?”

“사야. 이건 꿈이 아니고, 넌 지금 야밤에 난동을 부리고 있어.”

사이나는 혼란한 표정으로 세이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세이지마저 혼란해지는 기분이었다.

“율… 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니, 얘야?”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드디어 깨어난 여동생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이지는 세심하게 시선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꿈이 어쩌고 하는 게 혹시 긴 혼수상태에서 비롯된 일종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우선 율이 누군지나 알아보자는 생각에 세이지는 상냥함을 가장하여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듣고 사이나는 세이지를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보았다.

“율이 누구냐니, 대체 왜 그래?”

“…….”

“-아하! 둘이 짜고서 나 놀리는 거지?”

세이지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

‘율’이라는 놈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짜고서 무얼 한다는 건지…….

“빨리 말해줘! 이 자식 어디로 숨은 거야?”

세이지는 조용히 사이나의 양팔을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사이나.”

“…….”

“대체, 율이라는 자식이 누군데 그래. 말을 해봐.”

지나치게 진지한 세이지의 표정에 사이나는 잠시 한쪽에 미뤄두었던 커다란 불안감이 다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정말… 나 화낼 거야. 오라버니. 그만해…….”

세이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유리 드보프. 오라버니 동생, 율 말이야!”

이제 거의 숫제 우는 목소리로 사이나가 외쳤다. 그러나 세이지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사야. 무슨 꿈을 꾼 거니. 드보프가에 너와 나 외의 형제는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쌍둥이 오빠, 유리 드보프가 있잖아!”

“하아……. 사이나. 대체 왜 그런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넌 쌍둥이가 아니야. 드보프가에 너와 나, 1남 1녀 외에 다른 자식은 없어.”

매달리듯 세이지를 붙잡고 있던 사이나의 팔이 툭, 떨어졌다. 안구가 튀어나올 것처럼 홉뜬 눈은 정말로 놀란 표정이었다.

“…….”

말도 안 된다.

돌아온 세계에는,

그녀의 쌍둥이 오빠 ‘유리 드보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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