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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104화 (104/104)

104화. 외전 “REUNION” (3)

“오랜만이야.”

연하는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주저하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어…… 루아스는 처음이지?”

다들 눈을 부릅떴다.

누구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정적이 흐르는데, 규하가 연하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으이구, 이 맹꽁이야. 인사를 해도 그게 뭐냐.”

* * *

“진짜 세상사 요지경이다. 연하 네가 뱀, 아니, 루아스라니.”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 안 그래도 요즘 기가 좀 허하다 싶었는데 드디어 헛것이 보이는구나 싶고.”

“그래서 기억은 언제 되찾은 거야?”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기 힘들어 연하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는 규하가 손을 내밀고 말했다.

“워, 다들 진정해. 번호표 뽑아줘야겠어?”

몇몇은 다가오는 일을 주저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다.

형제단 사건 이후 오히려 루아스가 더 공론화됐기 때문에 다들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기한 건 고등학생 때 연하와 친했던 아이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아닌 아이들은 여전히 거리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연하는 이렇게 다들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꿈같았다.

“강연하.”

연하는 고개를 돌렸다.

어딘지 어색해하는 얼굴로 다가온 남자는 성엽이었다. 미소가 눈부신 김성엽.

어른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훈훈한 미남이었고, 미소가 상큼한 느낌도 그대로였다.

다만 이젠 표백한 칼라가 눈부신 교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성엽은 연하를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주저하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진짜 기분이 이상하다. 널 보니까 나도 열아홉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연하는 조금 웃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규하는 ‘그런 인간 레몬은 똥도 안 쌀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너도 아직 그대로인걸.”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성엽은 기가 찬 듯이 말하다가 물었다.

“그럼 너도 서른세 살이라고 봐도 되는 거야?”

“봐도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서른세 살인걸.”

성엽은 머쓱하게 웃었다.

“뱀파이어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혹시 뭔가 다르게 새는 방법이 있나 하고…….”

“그냥 똑같아.”

“그럼 아직 미성년자거나 그런 건 아니지?”

성엽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지.”

이미 애까지 있다고 하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규하나 연하나 결혼 여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어디서 만났는지, 남편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아주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연하는 이반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구나.”

성엽은 그제야 레몬 향을 뿜으며 웃었다.

“혹시 그때 기억나? 우리 수학여행 갔을 때…….”

넘어진 그녀에게 그가 연고와 반창고를 사다줬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리 없어, 연하는 웃었다.

* * *

이반은 기다리는 동안 글을 작업하고 있던 패드 옆에 놓인 유리잔을 쳐다보았다. 물이 반쯤 남은 투명한 유리잔은 조명을 비춰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거기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전개는 생각 못했는데.”

그때 뒤로 기척이 다가왔다.

“외로워보이시는군요.”

정복을 입고 있는 렉스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일찍 왔군.”

“일찍 끝났습니다.”

“일찍 끝낸 건 아니고?”

렉스는 연하가 앉아 있었던 빈자리를 보았다.

“강 소위도 참석한 겁니까?”

“그렇게 됐어.”

렉스는 맞은편에 앉으면서 무심히 말했다.

“하긴, 인간 친구들은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두는 게 좋죠.”

그는 뱀파이어가 되자마자 만날 친구들이 아예 남아 있지 않던 케이스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마음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렉스는 아래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더니 말했다.

“강 소위도 첫사랑은 있었군요.”

이반은 미간을 약간 좁히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렉스는 오히려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았다.

“풋사랑이었을 텐데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넌 괜찮을 것처럼 말하는군.”

“그렇진 않겠지만, 규하가 소중히 여기는 추억은 하나라도 많을수록 다행이니까요.”

이반은 창밖을 보았다.

“나도 내가 이렇게 속이 좁을 줄은 몰랐어.”

렉스는 아내를 향한 제 마음의 강도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뒤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쪽은 거의 병 수준이랄까…….

‘이천년 만에 첫사랑을 하는 사람이니 이해해 줘야겠지.’

렉스는 무심히 생각했다.

혼인한 적이 있다고 사랑한 적이 있다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첫사랑이나마 해본 연하가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

화장실을 다녀온 성엽은 다시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연하는 그가 화장실 가기 전에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새 규하가 와서 같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위층에 뭔가 군대 관련 행사가 있나 봐. 군인들이 돌아다니네.”

성엽은 아까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군인?”

힘은 살아온 세월에 비례하기 때문에 규하는 아직 청력반경이 넓지 않아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입 모양으로 ‘렉스’라고 말했다.

렉스가 와 있다고 생각하자 규하는 당장에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렉스가 공처가 티를 못내 안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규하 쪽도 만만치 않았다. 규하는 거의 ‘렉스 빠’ 수준이었으니까.

“김성엽 너 이 자식 이쪽 자리에서 아예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구먼?”

그때 지민이 성엽을 뒤에서 툭 치며 나타났다.

“아니야, 인마.”

“아니기는. 아예 본드로 엉덩이를 붙여놨네.”

지민은 짓궂게 말하고 연하와 규하를 보았다.

“이제 슬슬 2차 가야지?”

“우리는 여기서 빠져야 할 것 같아.”

규하가 말하자, 지민은 바로 ‘어허’ 소리를 냈다.

“애 있고 가정 있는 애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솔로들끼리 이러면 쓰나. 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경사스러운 날인데…….”

“그 경사스러운 날 내 주사에 한 번 당해볼래? 나 요즘 주사 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규하는 망가지는 것조차 불사했다.

“또 보자.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

그렇게까지 말하니 동창들은 더 잡지 못했다. 둘은 아쉬워하는 동창들과 한참이나 작별인사를 한 뒤에야 행사장을 나섰다.

막 로비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하야.”

* * *

“가자고.”

이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렉스도 따라 일어났다. 입구에서 직원이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어디 가십니까?”

렉스는 의아하게 이반을 보았다.

바로 호텔 밖으로 통하는 전용 통로가 있는데도 이반은 정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고.

“이쪽으로 갈 거야.”

“사람들 눈에 띌 텐데요.”

이반은 대답하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렉스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따라갔다. 그 뒤를, 대기하고 있던 예거들이 따랐다.

* * *

“연하야.”

성엽이 다가왔다. 규하는 연하를 흘긋 보더니 알 만하다는 듯이 찡그린 웃음을 짓고는 먼저 몇 걸음 앞서 갔다.

“왜?”

“전화번호 물어봐도 돼?”

옛날이라면 그가 정말 순수하게 전화번호를 물어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하는 조금 웃었다.

“미안해.”

성엽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잠깐 말문이 막혔다.

“혹시 같이하는 사람이 있는…….”

“너희를 만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영원히…….

연하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만, 갑자기 절대 건널 수 없는 강이 그들 사이에 생겨난 느낌이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그때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이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렉스가 뭘 걱정한 거냐는 듯이 흘긋 시선을 던지자, 이반은 그 말에 동의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볼게.”

“어…… 응. 잘 가.”

연하가 하도 단호해서 성엽은 얼결에 대답했다.

연하는 돌아서서 규하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둘은 정문으로 걸어갔다.

성엽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데.’

성엽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가, 다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규하 옆으로 한 중년 여자가 자기 핸드백을 뒤적거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물건을 찾았는지 손을 빼내는데, 파운데이션 케이스가 걸려서 같이 빠져나오면서 떨어졌다.

여자는 놀라서 낙하하는 파운데이션 케이스를 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거의 무릎까지 떨어진 파운데이션 케이스를 어떤 손이 잡았다.

살짝 무릎을 굽혀 케이스를 캐치해 낸 규하는 몸을 들고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어머, 고마워요.”

여자는 별 생각하지 않고 케이스를 받아 자기 갈 길을 갔다.

규하는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성엽을 보았다. 그리고 묘한 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설마…….’

너무 얼떨떨해서 그대로 서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이목을 끈 이유는, 굉장히 규칙적이고 묵직했기 때문이다.

성엽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개 남색 정복을 입고 있었고, 특히 두 번째로 걸어오는 금발 군인은 가슴에 휘장이 화려했다.

그들 선두에 걸어오는 남자는 코트 안에 차이나 칼라 셔츠를 입은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어쩐지 그가 가장 윗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성엽을 포함해 사람들이 모두 말을 잊고 멈춰 서 있었다. 그건 남자들 대부분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이 이 공간의 시간과 공기를 지배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옆으로 지나가는 것마저 느린 그림처럼 느껴졌다.

선두에 있는 무심한 붉은 눈동자가 성엽을 훑고 스쳐 갔다.

그때 마침 정문 앞에 기다리는 두 여자 앞으로 검은 차 몇 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남자들이 문을 나서자 두 여자가 돌아보았다.

규하는 고등학생 때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번째로 간 금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휘장이 화려한 군복을 입은 금발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은 같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 차에 올랐다.

연하는 선두에 간 남자를 올려다보고, 연한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애정이 가득한 미소를.

뒷모습이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남자도 연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이어서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 차에 올랐다.

차문이 닫히고 차는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그랬구나.’

성엽은 불현듯 깨달았다.

외모가 멈춰 있다고 연하의 삶까지 멈춰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고.

예상치 않게 열아홉 그대로 멈춰 있는 연하를 보고 그 역시 열아홉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세상에는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고 떠들썩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에겐 인생에서 가장 마음이 편할 때였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됐을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최근 운영하는 스타트업이 어려워지면서 여러모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연하를 보고 강한 회귀본능을 느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연하는 어딘가 우유부단해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고, 단순한 호감이나 설렘이 아닌 더 깊고 짙은 감정이 담긴 시선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사무실에 가봐야겠군.’

성엽은 길게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뒤로 차는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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