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103화 (103/104)

103화. 외전 “REUNION” (2)

“다녀와.”

이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연하는 웃으며 말했다.

규하는 핑크색 원피스 정장을 입고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차림인 반면, 연하는 청바지에 체크무늬 정장 재킷을 입은, 단정하면서도 다소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이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던 연하는 패션센스가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역시 보고 배운 게 있는 덕분일 것이다.

규하는 그녀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냥 돌아섰다.

“다녀올게.”

규하가 레스토랑을 나서고, 연하는 이반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요.”

“내가 안 했어도 렉스 녀석이 했을 거야.”

중앙사단으로 돌아간 렉스는 군사위원회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공처가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녀석이니까.”

안 그래도 렉스는 정말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제 두 여자-규하와 하현-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 기세였다.

연하는 창 너머를 보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밤의 서울이 타오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필 동창회가 비번인 날이어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었다.

이반은 산책 겸.

행사장 위층에 있는 이 레스토랑까지 통째로 빌려서 돈이 좀 들어간 산책이긴 했지만, 아무튼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시간이 자유로워져서 이렇게 같이 다닐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오히려 시간은 매일 출근해야 하는 그녀가 부족한 편이었다.

그때 동창회가 열리는 1층 행사장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올라왔다.

반갑다, 얼마만이냐, 잘 사냐…….

오가는 안부 인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누구의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다들 행복한 것 같아 연하는 조금 웃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이반이 말해, 연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이나 칼라가 들어간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렸고, 그대로 붉은 눈을 드러낸 상태였다.

VIP 입구를 이용해 레스토랑으로 바로 들어왔기 때문에 굳이 컬러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반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스승님께 배웠다고 했죠?”

“그랬지.”

안 그래도 이반이 쓰는 글은 그 스승님에 대한 글인 것 같았다. 이 기회에 스승님의 작품을 집대성해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꽤 유명한 철학자였다는 것 같은데, 역시 정확히 누구인지 말해주진 않았다.

원래 아일 섬의 아카이브에는 그 스승님의 모든 글이 보관되어있었는데 안나 로스가 일으킨 방화로 대개 소실되어서 안타까워하는 걸 들은 적은 있었다.

“이 몸이 되고 나서 스승님을 뵈러간 적 있어.”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그랬어요?”

연하는 조금 의외여서 되물었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난 내가 뭐가 됐는지 알아낼 수 없었고, 오랫동안 혼자였거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간절했던 것 같아.”

그때 그는 마음이 깊이 병들어 있었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승을 찾아가는 일도 뒤늦게야 결심할 수 있었다.

스승에게까지 정체 모를 괴물 취급을 당하게 되면 그의 의지조차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군대를 이끌고,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는 일은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세상 무엇도 그와 같지 않다는 뼈에 사무치는 이질감, 괴물적인 본성에 대한 괴로움, 오만하여 네메시스 여신의 분노를 사 이런 몸이 되었다는 죄책감이 마구 뒤섞인 감정은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스승에게 찾아가자고 결심할 정도로, 그때 그는 간절했다.

어쨌든 당대 최고의 현자 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스승이라면 그에게 길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스승님은 어떤 외딴 섬에 살고 계셨지. 내가 죽고 그분을 시기하던 세력에게 쫓겨난 후 그분도 아주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병으로 죽어가고 계셨어.”

연하는 미간에 심각한 빛이 고였다.

그런 얼굴을 하고 싶게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도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현실을 직시할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늦었던 거지. 그런데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날 보셨어.”

침대에 누운 스승은 아주 약하고 낮은 숨을 겨우 내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미 저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스승이 그를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일단 그는 지나치게 키가 커졌다.

고대인들은 생각보다 평균 신장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때처럼 거의 거인 취급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대인 기준으로도 큰 편에 속하는 키였다.

그래서 도저히 인간일 때와 같은 사람으로 보기 힘들었다.

어느 날 눈도 저주받은 것처럼 붉어졌고, 감정이 모두 탈색되어 표정을 잃은 얼굴은 밀랍으로 빚은 듯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스승은 백내장 환자처럼 흐려진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

지금 생각하면 스승이 정말 그를 알아봐서, 아니면 먼저 간 제자가 하데스의 세계에서 자신을 데리러왔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죽음의 문턱에서 제자가 생각나서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에게 정말로 간절한 대답이었다.

이런 생물이 되었어도 그가 아직 그라는 인정.

그는 숨을 거둔 스승의 손을 붙잡고, 그날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인간이었을 때 그는 제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고 때로는 미성숙한 아이처럼 감정을 밖으로 마음껏 뿜어냈다. 그래서 웃는 데도 우는 데도 딱히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스승이 가는 길을 제대로 배웅하지 못한 후회가 섞여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아이처럼 울었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너도 알고 있을 테니 에두르지 않고 말하지만.”

이반은 똑바로 연하를 보았다.

“곧 네 인간 친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연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도영이나 팀원들, 심지어 예전에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나서 친해진 청사 앞 카페 여직원까지, 그들이 하나도 살아 있지 않다니, 그냥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반만 아니라 규하까지 곁에 남았는데 인간 친구들에 대해서까지 뭔가 바라는 건 너무 욕심 같아서…….

이반은 연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나두는 편이 좋다고, 내 생각은 그래.”

그때였다.

“강연하.”

레스토랑 입구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

“강규하!”

“규하야!”

동창들은 거의 버선발로 뛰어나와 규하를 반겼다.

“너 살아 있긴 했구나.”

“진짜 죽은 줄 알았다. 어떻게 한 번을 동창회에 안 나와?”

규하는 웃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다들 잘 지냈어?”

“그래, 계집애야.”

동창들은 그녀가 루아스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눈치였다.

워낙 티가 나지 않기도 하지만 아예 그럴 거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보려고 하는 대로 보이는 법이니까.

혹시 눈치챌까 걱정했지만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너 키가 좀 컸나?”

이렇게 묻는 동창도 있었지만 딱히 의심해서라기보다 순수한 의문인 것 같았다.

“그래, 뒤늦게 성장판이 열일하더라. 아무튼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자, 금빛이 번쩍거리는 공간 가운데 뷔페가 준비돼있었다. 얼핏 봐도 음식 가짓수가 상당했고, 프로페셔널 해 보이는 요리사들이 직접 음식을 손님들에게 챙겨주고 있었다.

동창들은 이게 웬 호사냐 싶으면서도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얼떨떨한 얼굴들이었다.

“기부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진짜 대박 아니냐?”

남자 동창 지민이 말했다.

“실컷 먹어.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락앤락에다 담아가고 싶다.”

그리고 지민은 제 배가 락앤락 통이라도 된 것 같은 기세로 접시에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규하는 피식 웃고 음식을 담아 테이블로 갔다.

이미 자리에 있는 동창들이 그녀를 반겼다.

또 한참 이런저런 말로 회포를 풀며 즐겁게 식사하는데, 한 동창이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규하 넌 수영 그만두고 뭐 하고 살아?”

“고등학교 선생이야. 지금은 휴직 중이지만.”

그녀는 아직 휴직 상태였다. 하현이 어려서 엄마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직 루아스로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거 하나는 확실하지만.

“뭐? 네가?”

둘러앉은 동창들은 대놓고 놀라는 눈치였다.

“강규하가 선생이라고? 야, 네 학생들은 무슨 죄…….”

고등학생 때 티격태격하면서 지냈던 지민이 세월이 무색하게 짓궂게 말했다.

“까분다. 한동안 너무 덜 맞고 지냈지?”

“하여간 깡패 강규하, 여전해.”

그때 한 동창이 긴가민가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하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나?”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기억나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갑자기 테이블 위에 턱 하니 올려놓아진 듯이.

“연하도 있었더라면…….”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마치 동창회가 아니라 추모식인 것처럼.

‘하여간 이래서 동창회에 오지 않았던 건데.’

규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꼭 연하가 죽어 없어진 사람처럼-물론 그때는 그게 사실이었지만- 연하를 추모하는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녀에게 연하는 살아 있는 사람 같았으니까.

규하는 침울해져 있는 동창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나 잠깐만.”

규하는 벌떡 일어나 행사장을 나갔다. 동창들은 처음 이야기를 꺼낸 친구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하여간 넌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누가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동창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규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을 지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이반과 연하는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특히 연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강연하.”

부르자, 연하는 왜인지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규하야.”

규하는 테이블로 다가가자마자 내던지듯이 말했다.

“기억을 잃었었다고 해.”

“뭐?”

“사고로 루아스가 됐는데, 기억이 안 나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얼마 전에 기억을 되찾았다고.”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아침 막장 드라마 같긴 하지만, 그렇다는데 어쩔 거야?”

“하지만…….”

그러면서 규하가 팔목을 잡고 끌어서 연하는 얼결에 일어났다. 연하는 주저하며 이반을 돌아보았다. 허락을 구한다기보다 이게 정말 괜찮을지 묻듯이.

이반은 연하에게 웃어주었다. 괜찮다는 듯이.

“다녀와.”

규하가 끌어서, 연하는 홀린 듯이 끌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간만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행사장으로 들어가자 동창들이 웅성이며 다가왔다.

“규하야, 괜찮아?”

“근데 뒤에는 누구…….”

규하는 한 걸음 비켜섰다.

“연하……!?”

“어, 어떻게…….”

누군가가 놀라 외치고, 누군가가 목이 졸린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정적이 감돌았다.

“누가 내 뺨 좀 쳐 줘봐. 나 연하 귀신이 보여.”

겨우 한 동창이 연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다음엔 나도 쳐 줘. 나도 보이거든.”

“너도 보여?”

규하가 말했다.

“귀신 아냐. 연하 맞아.”

그럼에도 동창들은 섣불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살아 있었……?”

그때 한 동창이 무슨 생각이 난 듯이 설마하며 연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혹시 연하 너…….”

다른 동창들은 너무 놀라서 연하가 어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연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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