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외전 “REUNION” (1)
이반은 규하가 연하에게 쇼핑백을 건네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돌아선 규하는 낮은 계단을 통해 거실로 내려온 그를 발견하고 고갯짓했다.
“왔어요?”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그를 지나쳐 자기 집으로 통하는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다녀왔어요?”
히샤를 안고 있는 연하가 그를 보고 물었다. 히샤는 입안에 침을 가득 머금고 ‘아부’ 옹알이하면서 그에게 오려는 듯이 팔을 휘적거렸다.
“응. 이리 줘.”
이반은 히샤를 받아 안았다.
“이바노프 씨 오셨어요?”
에밀리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다가 묻고는 다시 갈 길을 갔다.
“자료 조사는 어떻게 됐어요?”
연하는 이반에게 물었다.
“대충 끝난 것 같아.”
국장직을 그만둔 이반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은둔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써오던 글이 있다는 것 같았다.
한동안 바빠지면서 손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완성해 보려는 것 같았다.
완성되면 보여주겠다고 해서, 글이 완성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알아봐요?”
“몇몇은.”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형제단 사건은 채 2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사건은 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다른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바쁘고 복잡한 세상이어서 그렇겠지만, 오히려 그들로서는 다행이었다. 한동안 이반은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요즘에도 밖에 나갈 때는 지금처럼 푸른 컬러렌즈에 안경을 끼는 식으로 살짝 변장을 해야 하긴 했다.
“강 선생은 무슨 일이야?”
이반은 침이 흥건한 히샤의 입을 닦아주며 물었다.
“아, 고등학교 동창회를 한 대요.”
연하는 탁자에 놓인 카드를 들어 보여주었다.
<동창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규하도 한 번도 안 갔었는데, 이번에는 가려나 봐요.”
어차피 자신은 갈 수 없었고 갈 생각도 한 적 없었기 때문에 연하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넌?”
“저 뭐요?”
연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안 가려고?”
“가도 되는 거예요?”
연하는 정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이반은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누구한테 허락을 구하는 거야?”
“아니…….”
연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인간으로서는 오랫동안 죽은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되긴 했다.
“이제 죽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특별히 상관없지 않나 싶은데.”
“그것도, 그러네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옵션이어서 연하는 잠깐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이반은 그의 손가락을 깨무는 히샤와 장난치면서 기다렸다.
곧 연하는 말했다.
“그래도 전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규하라면 모를까, 동창들이 열아홉 얼굴 그대로 멈춰 버린 그녀를 보면 루아스라는 사실을 바로 알 것이다.
루아스인 걸 안다고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면 마음이 좀 복잡했다.
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면 상당히 충격을 받을 테니 말이다.
연하가 그렇다고 하니 이반은 특별히 반론하지 않고 규하가 건네주고 간 쇼핑백을 보았다.
“근데 이건 뭐야?”
“교복이요.”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교복?”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거요.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나 봐요. 안 그래도 이사 올 때 발견하고 주려고 했었는데, 바로 하현이 생기고 이래서 잊고 있었대요. 이번에 동창회 카드 받고 생각났대요.”
이반은 쇼핑백 안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교복을 내려다보았다.
“입어봐.”
“네?”
연하는 그가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에이, 이 나이에 무슨 교복이에요.”
이반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농담이지?”
연하는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란 게 있잖아요. 아무리 얼굴은 같아도.”
미끼 역할을 할 때 입었던 건 그냥 일이려니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하고 애까지 낳은 데다…….
“에밀리.”
이반은 다시 지나가는 에밀리에게 히샤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잠깐 히샤 좀 봐줘.”
“네. 도련님, 에밀리한테 오세요.”
연하가 계속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에밀리와 있는 시간이 많은 히샤는 오히려 좋아하며 에밀리에게 안겼다.
꼭 부모 중 한 사람은 시야 안에 있어야 하는 버릇도 많이 고쳐져서, 이제는 둘 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이구, 우리 도련님 무거워라. 얼마 안 있으면 제가 안지도 못하겠어요.”
에밀리는 히샤를 안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반은 쇼핑백을 들어 연하에게 건네주며 빙긋이 웃었다.
“보고 싶어.”
연하는 볼을 긁적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거절하기 힘들었다.
* * *
연하는 드레스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웃으면 안 돼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이반은 돌아보았다.
“웃을 게 있어?”
“그냥 왠지…….”
연하는 무릎까지 오는 짧은 치마가 어색한 것처럼 매만지며 밖으로 나왔다.
교복은 특별히 눈에 띄는 디자인은 아니었다. 베이지 체크무늬 치마에 남색 조끼, 붉은 넥타이, 남색 상의였다.
미끼 역할을 할 때 입었던 교복은 가장을 하는 느낌에 가까워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건 너무 현실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진짜 입고 다녔던 교복이어서 오히려 부끄러웠다.
“이리 와.”
이반은 손짓했다. 연하가 다가오자 그녀를 위아래로 보더니 웃었다.
“예쁘네.”
연하는 못내 쑥스러운 것처럼 볼을 긁적였다.
“이제 됐죠?”
그러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위해 돌아서는 것을, 이반이 손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뭐가 그렇게 급해?”
연하가 무릎 위에 주저앉자 이반은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허리를 안았다.
“잘 어울리는데.”
“규하가 보면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냐고 할 것 같은데요.”
연하는 문이 잘 잠겨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문 쪽을 눈짓했다.
“잘 잠갔어.”
연하는 멋쩍어하는 것처럼 괜히 양발을 달랑거렸다.
그녀 말마따나 결혼하고 애까지 있는 데다 군 생활을 한 기간으로는 어지간한 영관(소령, 중령, 대령)급에게도 밀리지 않지만, 저쪽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수줍어하는 여고생이었다.
“학교생활은 즐거웠어?”
이반이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턱을 괴고 묻자, 연하는 순순히 대답했다.
“즐거웠어요.”
“뭐가 제일 즐거웠어?”
“음…….”
연하는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다요.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는 것도 즐거웠고, 수학여행이나 반 애들이랑 다 같이 규하가 출전한 수영 도대회 응원 간 것도 즐거웠어요.”
연하는 말하면서 버릇처럼 두 다리를 올려 양반다리를 하다가 치마를 입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발을 내렸다. 그런데 영 불편한지 다시 한 다리를 올렸다.
“아.”
그러면서 꿈지럭대는 통에 엉덩이뼈가 눌려서 이반이 작게 소리를 내자, 연하는 얼른 자세를 고치며 돌아보았다.
“아, 미안해요.”
이반은 돌아본 그녀에게 키스했다.
연하는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아들였다.
입술을 떼자, 연하는 짙어진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습은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지만 확실히 눈빛이라든가 동작, 표정이 열아홉 소녀 같지는 않았다. 연하 스스로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나이에’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반은 그대로 물었다.
“대학을 못 가서 아쉽진 않았어?”
이반은 이런 종류의 질문을 자주 했는데, 그녀가 누리지 못한 것들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사실 딱히 미련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연하는 조금 웃었다.
“대신 대학을 갔더라면 못 했을 경험들을 했으니까요.”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말이다.
하지만 이반이 더 신경 쓰기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를 보는 붉은 눈동자가 그윽해 보일 정도로 짙은 빛을 띠었다.
‘역시 신경 쓰는 건가…….’
싶어지는데, 연하는 갑자기 묘한 표정으로 이반을 보았다.
“……이반, 손이 좀 이상한데 들어오고 있지 않아요?”
이반은 웃음기가 짙어지는 눈으로 몸을 기울였다.
“지금 널 건들이면 너무 범죄 같을까?”
“네? 무슨 생각을…… 이반!”
지잉.
갑자기 자동문이 열렸다. 분명히 잠갔다 했는데, 연하는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문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아 의아했다. 그런데 아래쪽에 스스로 기어온 것 같은 히샤가 엎드려 있었다.
“바?”
히샤는 부모가 하는 양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젖혔다.
“도련님, 언제 거기까지 기어 가셨…….”
바로 에밀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막 히샤에게로 몸을 숙이던 그녀는 방 안 풍경을 보고는 불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연하 씨……?”
연하는 이반을 원망하듯이 보았다.
“문 잠갔다면서요?”
이반은 빙긋이 웃었다.
“미안.”
이반은 연하의 볼에 뽀뽀하고는 놓아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문으로 가서 히샤를 안아들었다.
“하여간 엄마, 아빠 방해하는 데는 뭐가 있구나, 이 녀석.”
“바아.”
히샤는 또 좋다고 웃을 따름이었지만.
“에밀리, 히샤 밥 먹었어?”
“아뇨, 아직 안 드셨어요.”
이반은 히샤를 안고 부엌 쪽으로 가고, 에밀리는 연하를 돌아보았다.
“연하 씨, 너무 잘 어울리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러더니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한가?”
연하는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규하한텐 말하지 말아주세요. 주책 떤다고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요.”
연하는 돌아서서 교복을 벗기 시작했다. 막 조끼를 벗는데, 문득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확실히 제가 봐도 교복을 입은 모습이 전혀 위화감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제 기분은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아마.”
갑자기 히샤가 다시 기어서 문 앞에 나타났다.
“이 녀석 기어서 마라톤도 뛰겠어. 왜 이렇게 빨라?”
따라온 이반이 방으로 기어들어오는 히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리 와, 히샤.”
히샤는 엄마가 자신을 찾는다고 기뻤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뚱뒤뚱 기어왔다. 연하는 발치까지 온 히샤를 안아들었다.
아이의 통통한 볼에 뽀뽀하자, 우유 냄새가 났다.
“엄마랑 밥 먹을까?”
“마!”
히샤는 팔다리를 저으며 좋아했다. 말이 조금 느려서 걱정이긴 하지만, 이렇게 건강하고 밝은데 어떤가 싶었다.
연하는 방을 나서며 얼핏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 교복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은 상태였다.
‘아, 이제 알 것 같네.’
왜 교복이 그토록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아이를 안은 자신과 교복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샤를 안고 있지 않을 때도 뼛속까지 박힌 ‘자신은 엄마’라는 인식이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연하는 아이를 보고 웃었다.
* * *
“역시 우리 전하, 통이 크시네.”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규하는 정말 감탄한 것 같았다. 그들이 앉은 자리만 제외하고 텅 비어 있는 레스토랑 의자에 자리를 잡은 이반은 웃는 얼굴이었다.
이반이 평범한 레스토랑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동창회 장소를 이 5성급 호텔 행사장으로 업그레이드 해준 것이다.
그들도 모르는 새에 총동창회에 연락해서 익명으로 기부했던 모양이다.
“그 전하라고 부르는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왜요, 틀린 말도…….”
규하는 말하면서 이반을 한 번 보더니 웬일인지 더 토를 달지 않았다.
“알았어요.”
하지만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일반인 코스프레인 거 알죠?”
“다녀와.”
이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연하는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