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에필로그 (2)
“좋은 날이네요, 정말.”
셀레나는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예전에 떠날 때만 해도 다시 이곳이 이렇게 시끌벅적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죠.”
“오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죠.”
“누가 아니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셀레나와 규하는 꽤 죽이 잘 맞았다.
“셀레나.”
그때 저쪽에서 렉스가 이리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가봐요.”
셀레나는 렉스가 섞여있는 남자 무리 쪽으로 갔고, 규하는 신부대기실로 갔다.
문이 열리자, 원래는 평범한 방이지만 신부대기실로 꾸민 곳에 연하가 부케를 들고 서 있었다.
창을 넘어 들어온 하얀 햇빛이 레이스가 기하학적으로 섬세한 웨딩드레스 사이로 반짝거렸다. 거의 왕관 같은 티아라를 쓰고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연하는 순간적으로 중세의 왕비를 연상케 했다.
“왔어?”
연하가 눈을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규하는 갑자기 고개를 조금 내저었다.
“갑자기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
“뭐가?”
연하는 화장을 해서 반짝이는 얼굴로 물었다.
“너랑 내가 같이 있고, 네가 결혼을 한다는 게.”
연하는 싱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기용 펜스 안에 펜스를 붙잡고 서 있는 히샤를 안아 올렸다.
히샤는 아기용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히샤 침 묻겠다. 이리 줘.”
규하는 히샤를 안아들었다.
“히샤 좀 부탁해. 밖에 이반 있으니까.”
“그래. 히샤, 이모랑 가자.”
히샤는 동의하는 것처럼 귀엽게 웃었다.
“어휴, 이렇게 귀여워서 어느 여자가 널 데려갈지 걱정이다.”
규하는 히샤를 꼭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간지러운지 히샤는 까르르 웃었다.
밖으로 나오자, 신랑을 포함한 남자들은 한쪽 테이블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베스트맨인 렉스도, 타우가도, 얼마 전 소개받은 렉스의 다른 클리엔테스들도, 그림이 조금 묘하긴 하지만 셀레나도 함께.
결혼식 덕분에 간만에 다 모였다는 그들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셀레나가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반은 전통적인 연미복보다는 연한 푸른색 정장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야외에서 하는 결혼식이다 보니 검은 연미복은 답답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반이 샴페인을 놓고 일어나 천막을 나갔다.
그 모습을 봤지만, 규하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히샤가 누군가 먹던 잔에 꽂힌 빨대를 제 입에 집어넣으려고 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샤, 안 돼. 지지.”
뺏으려하는 걸 아는 것처럼 히샤는 빨대를 세게 흔들면서 옹알이했다.
“아부, 아, 아우, 우우, 부, 부아.”
소리도 다양하게 옹알옹알 잘도 떠들어댔다.
“우리 도련님 말도 잘 하시네.”
손님들이 웃으며 말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히샤가 빨대를 흔들다가 멈칫했다.
“부아.”
히샤는 빨대를 던져 버리고 어딘가로 팔을 휘적거렸다. 돌아보자, 남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왜 그래?”
히샤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규하는 시야 어디에도 이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샤는 부모 중 한쪽만 시야에 있어도 이런 착한 아기가 또 없었지만, 둘 다 보이지 않으면 그야말로 지옥에서 온 아기에 다름없었다. 규하는 다급해졌다.
참고로, 발단부터 이야기하느라 좀 돌아오긴 했지만 이게 이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 이유였다.
이때 히샤가 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규하는 보채는 히샤를 안고 일어나 렉스에게 다가갔다.
“이반 어디 갔어?”
렉스를 포함해 남자들이 돌아보았다.
“집 안으로 가던데. 왜? 히샤 때문에?”
“응.”
“도련님, 저한테 오실래요?”
셀레나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히샤는 칭얼거리면서 손길을 거부했다.
평소에는 강도가 가자고 해도 갈 것처럼 누구에게나 잘 안겨 있지만, 지금은 메리포핀스도 이 불덩어리를 달랠 순 없을 것이다.
“안 돼. 이미 불났어.”
규하는 히샤를 안고 얼른 대기실로 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연하야.”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아무 의심 없이 여는데, 안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열지 마!”
연하의 목소리였다.
“뭐…….”
놀라서 말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반, 잠깐…….”
규하는 바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제 엄마 목소리를 들은 히샤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응, 착하지, 착하지. 울지 마.”
규하는 히샤를 흔들며 얼렀다. 물론 히샤는 더 크게 울었다.
“이반.”
연하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은 없었다. 히샤가 워낙 울어서 규하는 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아이만 어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어떻게 좀 해봐!”
“잠깐…… 잠깐만…….”
연하도 다급해진 것 같았다.
마침내 안에서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문이 열리고 이반이 나왔다.
차림이 엉망이었다. 기껏 차려입은 정장이 다 풀어헤쳐져 날가슴이 보였고, 바지도 잠그다 말았다.
평소였다면 예의상 고개라도 돌려줬겠지만 히샤가 하도 울어서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런 걸 본다고 새삼 부끄러워할 짬도 아니고.
“히샤.”
이반은 아들의 작은 몸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붉힌 채 우는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히샤는 문밖에서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서러웠는지 제 아버지에게 안겨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반은 안으로 들어갔다. 규하는 흘긋 안을 보았다.
연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겨우 드레스를 추스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뒤로 잠그는 드레스를 잠가줄 사람이 없어서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그만뒀기 때문인지 아직 온몸이 진한 핑크빛이었다.
연하가 히샤를 받아들자, 히샤는 설움을 토하듯이 더 크게 울었다.
“미안해. 울지 마.”
연하는 정말 미안해하며 아이를 꼭 안았다. 한참을 어르고서야 히샤는 겨우 울음을 멈추었다.
이반은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내 아들이 이렇게 미워지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어.”
* * *
“하여간 그새를 못 참고…….”
연하는 그때 생각이 났는지 볼이 붉었다. 이반은 딴청을 피웠고.
하여간 생각보다 의뭉스러운 사람이었다.
“뭐가요?”
셀레나가 옆에 와 물었다.
모두 돌아보았다. 역시 이런 날씨에도 화장과 옷차림 모두 완벽해서 촬영을 나온 모델 같았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기를 안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아, 하현이 추파춥스 첫 경험.”
규하는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히샤와 쌍둥이 같은 아이는 작은 손에 제 주먹만한 추파춥스를 쥐고 있었다.
셀레나는 곤란한 듯이 웃었다.
“미안해요. 아가씨가 너무 사달라고 졸라서 안 사줄 수가 없었어요.”
“괜찮아. 얼마나 졸랐을지 안 봐도 뻔해.”
“아바.”
셀레나가 옆에 앉자, 하현이 제법 명확한 발음으로 말하면서 렉스에게 팔을 저었다.
히샤가 태어나고 생겨서 한 살 차이지만 히샤는 말이 느린 반면 하현은 놀라울 정도로 말이 빨랐다.
“역시 내 아가리의 후계자답다.”
규하가 그렇게 농담 삼아 한마디 했다가 연하에게 팔을 맞았다.
“입 좀 조심해.”
참고로 결혼식에서 히샤가 울고불고 할 당시에 하현은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하현은 히샤보다 더 고집쟁이여서 한 번 울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렉스는 지금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면 늘 그렇게 웃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한테 올 거야?”
렉스는 하현을 받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하현은 거기에 딱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탕을 먹는 데 정신이 없었다.
“맛있어?”
규하가 물끄러미 보다가 묻자 하현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엄마도 좀 줄래?”
하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엄마도 좀 줘.”
하현은 맛있는 걸 계속 먹어야 하는지 엄마에게 주는 착한 딸이 돼야 하는지 가치관의 혼란까지 느끼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해결방안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불쑥 셀레나에게 추파춥스를 내밀었다. 셀레나는 조금 놀라는 얼굴이었다.
“저요?”
하현은 먹으라는 듯이 짧은 팔을 쭉 폈다. 셀레나는 어쩔 수 없이 추파춥스를 물었다.
그러자 하현은 일을 처리했다는 것처럼 바로 주의를 돌려서 히샤처럼 테이블 위에 흥미를 보였다.
규하는 기가 막혀 말했다.
“누가 엄마야?”
“제가 아닌 건 분명하죠.”
셀레나는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는 추파춥스를 먹었다. 애정 콘테스트에서 승리한 자가 지을 만한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연하는 그 모습을 웃는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 이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반, 원래 이쪽에서 태어났다고 했죠? 어느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이반은 테이블 위에서 거의 자신에게 쏟아져오는 히샤를 받아 안으며 대답했다.
“펠라.”#
“그럼 그리스 사람이네요?”
“따지자면 그렇지.”
연하는 히샤의 코끝을 살짝 쓰다듬고 말했다.
“우리 히샤가 반은 그리스 사람이었네.”
히샤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웃었다. 부모는 그런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히샤는 바다 쪽으로 몸을 휘적거렸다.
“왜? 바다 볼래?”
이반은 히샤를 안고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 이반, 조심해요. 히샤 토할 수도…….”
연하가 가제손수건을 들고 급히 따라갔다.
규하는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를 슥 돌아보았다.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거 맞지? 이반이 인간일 때 누구였는지.”
셀레나는 추파춥스를 빼내 들고 말했다.
“확실히요.”
규하는 기가 막혔다.
안 그래도 이반이 금발을 한 모습이 왜 이렇게 낯익나 했다. 처음에는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에 봤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다. 책에서 본 적 있었다.
정확하게는, 책에 나온 고대벽화에서.
사실 떠올렸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실물과 벽화는 닮지 않았다. 그 모자이크 세공사, 초상화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느낌이랄지, 언뜻 옆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이 섬광처럼 왔다갔다.
규하와 렉스, 셀레나는 저 멀리 세 사람을 보았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기.
가족.
렉스는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 사람으로서의 시간은 인간으로서 죽었을 때 끝난 거니까. 그 이후 이야기는 모두 전설일 뿐이지.”
사실 인간이었을 때 어떤 인물이었는지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라서,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보물이라도 묻어놨다면 모를까.’
이반도 갑자기 요절해서, 아니, 요절한 걸로 됐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럴 시간은 없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반도 딱히 숨길 생각이라기보다, 연하가 알아서 눈치채기 전에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연하가 그를 그냥 ‘이반’이라는 아무개 남자로 여겨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지금은 이반이라는 아무개 남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그리고 연하도 정말 눈치가 바가지인 게, 본명까지 말해줬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때 누가 부른 것 같아 렉스는 돌아보았다. 그가 쳐다본다고 알았는지 연하는 이반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 그쪽 말고요.”
규하는 남은 모히또를 마시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그럼 그 전설은 사실인 셈이네.”
“무슨 전설?”
렉스가 물었다.
규하는 저 멀리 가족을 보았다.
남자가 바다 너머를 가리키자, 손짓을 따라간 아기의 붉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오래 전 제 아버지가 모험을 떠난 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종사들과 함께 불로불사의 과일이 열리는 동방의 지상낙원을 여행했다는 전설 말이야.”
[꽃의 짐승, 完]
#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