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100화 (100/104)

100화. 에필로그 (1)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이 얼굴을 감쌌다. 곡선을 그리는 입술을 지나, 단단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느낌이 마음에 드는지 아기는 함박 웃었다.

아기를 담은 붉은 눈이 온화했다.

“히샤.”

녹을 것 같은 목소리가 과연 이렇다 해야 할지, 아이는 자신을 향한 애정을 아는 것 같았다. 그를 보는 작은 붉은 눈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반은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아이의 머리에 키스했다.

“아주 녹네, 녹아.”

규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규하는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여름 원피스 차림이었고, 뒤로는 한가로운 여름 휴양지의 레스토랑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이 쟁반에 시원한 화이트 와인, 잘 여문 올리브, 색감이 화려한 음식들을 손님들에게 서비스했고, 손님들은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펜스 너머 푸른 바다에는 물비늘이 반짝였다.

여름의 냄새는 진하고 평화로웠다.

“애만 보고 있을 셈이에요?”

“이천 년 만에 가진 첫 아이니까 이해해 줘야지.”

규하 옆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렉스가 책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반은 제 무릎 위에서 떨어질 것처럼 몸을 휘젓는 히샤를 다시 안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나 은근히 돌려 까지 않았어?”

“기분 탓입니다.”

렉스는 아직도 종종 그가 자신을 기절하게 한 장난을 설계했다는 사실에 감정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동정으로 죽은 것보다야.”

책에서 시선을 든 렉스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불가피했던 부분을 공격하다니 정정당당하지 못하시군요.”

“원래 허를 찌르는 게 전략이라고 부르는 거거든.”

규하는 고개를 내젓고 이반 품에 있는 히샤를 보았다.

“이바노프 가엔 제대로 된 남자가 없구나, 히샤. 너라도 제대로 된 남자가 되렴.”

“무슨 소리야? 히샤는 안 클 거야.”

이반 옆에 앉은 연하가 두 남자를 웃는 얼굴로 보다가 거의 정색하고 말했다. 규하는 헛웃음을 토했다.

“병이 깊은 사람이 여기 하나 더 있네. 안 크긴? 조금만 지나도 걸걸한 목소리로 엄마, 나 여자친구가 생겼어요, 이럴걸.”

규하는 걸걸한 목소리까지 흉내 냈다.

“말도 안 돼.”

연하는 정말 끔찍한 걸 본 사람 같은 얼굴이 되더니, 히샤를 꼭 안고는 말했다.

“언제나 이렇게 귀엽고 작을 거라고.”

히샤는 제 엄마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방긋 웃었다.

생김새는 이반을 빼다 박았지만 웃는 얼굴은 꼭 연하 같았다.

이반은 아내를 닮은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젖살이 통통한 볼에 뽀뽀했다. 아이에게서는 시큼한 젖 냄새가 났다.

“아부.”

히샤는 옹알이하며 그를 흉내 내듯 뽀뽀 비슷한 것을 했다. 이반은 짙은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좋을까.”

규하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히샤는 옹알이하면서 테이블 쪽으로 두 팔을 휘저었다.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아 테이블에 올려주자, 밀림을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테이블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행히 히샤는 평범한 아이처럼 태어났다.

기본적으로 인간이었을 때 임신 메커니즘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 열 달을 꽉 채우고 세상을 향해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젖을 먹는 것도 같았고.

다만…….

히샤는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들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백발, 타고난 붉은 눈.

마주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비노 아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누런빛이 없는 백발과 진한 핏빛 눈동자, 하얀 피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요즘 세상에 알비노라고 거부감을 가지거나 차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오히려 오가며 만나는 호텔이나 레스토랑 손님들은 히샤를 귀여워했지만- 조금 예민한 사람들은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치 ‘메멘토 모리’# 경구가 쓰인 계시의 준마를 타고 다니는 죽음의 사자를 마주친 것 같은 섬뜩함을.

규하는 히샤를 보다가 말했다.

“하긴, 히샤는 이런 아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한 편이지.”

그러더니 연하와 이반을 번갈아 보았다.

“부모님이 보이지 않으면 보채는 건 여느 아기보다 더 심하지만.”

연하는 할 말은 잃은 얼굴이었다.

“그건…… 다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평생 할 거거든.”

* * *

그러니까 이 일의 발단부터 이야기하자면, 어느 날 식사를 끝내고 모여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규하는 갑자기 생각나 말을 꺼냈다.

“결혼식 안 해?”

연하와 이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반의 무릎 위에는 그들 사랑의 결실인 히샤가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올리고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다.

반은 장교가 되기로 결정한 연하가 진급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았기 때문이고, 반은…….

“글쎄……. 굳이? 이반과 내가 부부라는 걸 누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이잖아? 여자라면 당연히 일생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거 아냐? 비혼주의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니, 비혼주의자도 비혼 선언식 같은 걸 하는 판국에.”

“남들 한다고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얘가 군인으로 살더니 어디서 이런 실용주의자 물이 들어와서.’

결국 규하는 이반을 보았다. 그는 어깨를 조금 으쓱일 뿐이었다.

“그건 무슨 반응이에요?”

“연하 말에 동의하는 반응입니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는 꽤나 실용적인 사람으로, 인생의 상당 부분을 실용성에 근거해서 판단했다.

원래 남자들이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특히 미신과 허례허식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그 단호한 태도를 보면 오히려 자신이 너무 속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난 이런 사실혼 관계는 용납할 수 없어.”

“그러는 넌?”

연하가 물었다.

조금 우습지만, 정작 규하 본인도 결혼식 같은 덴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연하는 제대로 하길 바랐다. 딸을 시집보내듯이.

“할 거야.”

그래서 규하는 뻗대듯이 말하고 말았다.

“해?”

옆에 앉아 있는 렉스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물었고, 규하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하는 거지?”

그럼에도 연하와 이반은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연하가 이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데 어쩌겠는가.

규하는 이반을 노려보았다.

“국장 당신은 해봤다 이거야?”

이반은 멈칫했다.

여담이지만, 이반은 국장직을 그만뒀지만 규하는 계속 그를 직함으로 불렀다. 아직 다른 호칭이나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지 않은 탓이었다.

“규하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오히려 연하가 말하는데, 이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그가 팔로 안고 있는 히샤가 ‘아우’ 옹알이했다.

“하자.”

아무래도 제대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네?”

연하는 어리둥절해했다.

“하는 거야. 한 보름쯤 축제를 여는 건 어때?”

“네에?”

연하는 얼굴을 활짝 열고 놀랐다. 오히려 규하가 손을 내밀고 말했다.

“어이, 거기, 전하. 잠깐. 일반인들은 결혼식을 보름씩 하지 않는다고요.”

아무튼 그 후로 이반이 더 열성적이 돼서, 연하가 곤란해할 정도였다.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데도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 * *

“음, 이거?”

연하는 각기 다른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마네킹들을 보며 하나를 가리켰다.

“좀 더 신중하게 봐.”

뒤에 있는 벨벳 카우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이반이 말했다.

“신중하게 보고 있어요.”

“그냥 이 시간이 끝났으면 해서 아무거나 고른 거잖아.”

“으…… 그, 그럼 이거?”

연하는 끝에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건 들러리들 드레스야.”

연하는 갑자기 돌아서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모았다.

“이반.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골라줘요.”

사실 심미안적인 부분에서 연하는 이반을 따라갈 수 없었다. 역시 출신(?)은 속일 수 없는지 이반은 꽤 취향이 고급스러웠고 물건을 보는 안목도 남달랐다.

어쩐지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옷을 잘 입는다 싶었다.

“웨딩드레스는 신부가 골라야지. 신부의 권리인데.”

“내 권리가 이반의 권리예요. 다 줄게요. 얼마든지 누려요.”

그러면서 연하는 정말 뭔가를 갖다 바치는 것처럼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반은 그 손을 잡아서 연하를 끌어올려 제 옆에 앉혔다.

“예쁜 옷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더니?”

“그건 그렇지만…….”

연하는 조금 울상을 지었다.

“추리닝 말고는 제 손으로 사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단 말이에요.”

하긴, 임신했을 때 입었던 그 여성스러운 임부복도 모두 셀레나가 사다준 것이었다.

“다 해 버릇하는 거지.”

이반은 연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네킹 앞으로 데려가 돌려세우고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잘 봐. 결혼식 날 네가 어떤 걸 입고 내 아내가 되고 싶은지 상상해 봐.”

연하는 드레스들을 진지하게 보는 것 같더니 가운데 마네킹이 입은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

“이거요.”

연하는 주인이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기대에 차 이반을 돌아보았다. 이반은 빙긋이 웃었다.

“여긴 없구나.”

그때 절망하는 연하의 표정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풋.”

지켜보고 있던 규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사태를 만든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음에도.

“너, 웃지 마. 전부 네 탓이잖아. 두고 봐.”

연하는 제법 엄하게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규하는 자신이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은지 정도는 확실히 알았다.

그렇게 그들은 연하가 마침내 ‘이거예요.’ 하고 확신하는 웨딩드레스를 찾아 머나먼 여정에 올랐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예전에 이바노프 클랜이 모여 산 적이 있다는 섬에서 가졌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그리고 섬 한쪽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그곳은 한때 꽤 번성하는 마을이 있었던 자리라고 했다.

“모두가 떠나고 난 이곳으로 돌아왔었어.”

섬을 구경시켜 줄 때 이반은 마을의 흔적이라고는 폐허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땅을 보며 말했다.

“유령처럼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지.”

대공이 그를 자극하려는 것처럼 MOAB을 던졌을 때는 차라리 잘됐다고 하고 떠났지만, 결국 필립이 잠든 땅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반은 이제 특별히 쓸쓸해 보이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았지만, 연하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반은 말없이 웃고는 연하와 함께 돌아섰다.

반면 섬 반대편에는 바닷가에 거대한 온실 같은 집 하나만 서 있었다.

규하는 처음에는 집이 비효율적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 했지만, 바다에서 목욕하는 것 같은 욕조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아무튼 날이 좋은 날 집 마당에 하얀 천막을 세우고, 꽃으로 장식하고, 음식을 차리고, 음악을 틀었다.

“음악 좋네요.”

셀레나가 말했다.

그는 오늘도 완벽한 화장에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 세팅했고, 긴 팔에 슬릿이 들어간 하얀 정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안 그래도 큰 키에 하이힐을 신어 오늘도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뺨치는 ‘아름다운 거인’ 느낌을 뿜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ISLE의 CEO가 원래 남자라는 건 그쪽 업계에선 이미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셀레나도 특별히 숨기려고 하진 않았고 그런 건 금세 소문이 나기 마련이니까.

그냥, 뱀파이어도 함께 사는데 여장남자 정도는 뭐 그러려니 하는 세상이……

……역시 되진 않았지만 셀레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ISLE이랑 계약 안 할 거야? 그럼 말고.

이런 태도였다.

“그렇죠? 음악 리스트 밤새 짰어요.”

규하는 대답했다.

“강 선생님 정말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 같네요.”

“누가 아니래요.”

셀레나는 식이 시작되기 전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손님들을 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좋은 날이네요, 정말.”

#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라틴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