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사랑스러운 짐승들
규하는 다시 눈을 떴다.
그사이에 의식이 더 맑아져서 햇빛으로 가득 찬 꿈의 공간 같던 방이 현실 세계의 것으로 보였다. 예술에 조예가 있는 현대 건축가가 디자인한 것 같은 모던한 방이었다.
창밖에는 무성한 나무밖에 보이지 않아서,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규하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뭔가 낯선 느낌이었지만 오랫동안 걷지 않은 약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밖으로 나섰다. 역시 모던한 긴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 끝에 정면으로 전면창이 활짝 열려 있고, 나무가 무성하다 못해 울창한 모습이 보였다.
“밥부터 먹어요.”
연하의 목소리…….
“응. 이것만 보고.”
이반이 대답했다.
“어서요.”
‘어쩐 일로 국장한테 엄한 소리를 다 내네.’
규하는 생각하며 걸어갔다.
“참, 에밀리, 규하 방에 주전자를 놓고 왔는데…….”
식탁 앞에 서 있는, 아까 방에서 본 여자가 돌아보았다.
여자는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 여자가 연하라는 데 규하는 놀랐다.
남산만 한 배도 그렇고, 저렇게 여성스러운 모습은 진짜 열아홉 살 이후로 처음이었다. 늘 후드에 추리닝바지만 입고 다니더니…….
탁자에 앉아 있는 남자도 그녀를 보았다. 그 남자가 이반이라는데 규하는 또 놀랐다.
“웬 금발…….”
“규하야!”
연하는 울먹이며 달려왔다. 규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12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처럼.
연하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화약과 철이었던 것 같은 예전 냄새가 아니라.
“나 자세가 너무 웃기지 않아?”
커다란 배 때문에 엉덩이만 쑥 빠져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연하는 규하를 놓아주었다.
“너 정말, 일어나자마자.”
“그럼 이거 진짜야? 배가 왜 이렇게 커?”
“일주일 뒤가 예정일이야.”
규하는 깜짝 놀랐다.
“벌써 그렇게……?”
연하는 조금 심각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감염은 이겼는데 이상하게 눈을 뜨지 않았어. 렉스 씨가 정말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
마지막으로 본 일렁이는 붉은 눈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렉스는?”
“일. 어쨌든 네가 깨어나기 전까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SN의 잔당을 잡아들이는 데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어. 이제 거의 슈니터(수확자)#라고 불리는 것 같아.”
‘뭔가 쓸데없이 지나친 열정을 불태우고 있구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연하가 한 말이 인식되었다.
“잠깐, 뭐라고? 감염을 이겼다고?”
“응. 느껴지지 않아?”
규하는 제 두 손을 보았다.
그녀가…… 뱀파이어라고?
“잘 모르겠어.”
“차차 느껴질 겁니다.”
옆에 다가온 이반이 말했다.
“어쨌든 렉스가 수혈을 계속했기 때문에 특별히 일어나자마자 허기를 느끼진 못할 겁니다.”
“렉스가 계속 수혈을 해줬다고요?”
“응. 아무래도 파트로네스한테 수혈을 받는 게 가장 좋으니까, 주기적으로 해줬어. 거의 간 투석하는 환자처럼 말이야.”
연하가 덧붙였다.
렉스가 그녀의 파트로네스…….
그냥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국장의 머리가.
규하는 이반을 위아래로 훑었다.
”웬 금발이에요? 갑자기 사춘기가 다시 왔어요?”
“원래 금발입니다.”
그런데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봤을 텐데요.”
“아.”
그러고 보니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 염색머리가 타버려서 그랬는지 그는 내내 짧은 금발이었다.
‘그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누가 어떤 개성적인 스타일을 하고 있었더라도 몰라봤겠지만.’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까 문 앞을 지나간 발걸음이었다.
“어, 깨어나셨군요.”
돌아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사십대쯤 돼보였고, 예상대로 몸집이 작았다.
연하가 말했다.
“인사해. 요즘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에밀리야.”
“처음 뵙겠습니다. 에밀리라고 해요.”
에밀리라고 하기엔 너무 동양인이었지만, 뭐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루아스…… 맞죠?”
규하는 에밀리의 가정부 같은 차림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에밀리는 가볍게 웃었다.
“군인 같은 건 적성에 맞질 않아서요.”
하긴, 생각해보면 모든 뱀파이어가 군인 체질일 리는 없었다.
“어, 그럼 나도……?”
군인으로 전향해야 하는 건가 싶어 놀라는데, 연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루아스도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전까지는…….”
“ISLE에 위장 취업이라도 시켜 드리죠.”
이반이 말했다.
“그건 직권남용 아니에요?”
규하는 찡그리고 웃다가 갑자기 흠칫했다. ISLE이라고 하는 순간 깨달았다.
“가연이는?”
“괜찮아. 무사해. 이미 퇴원해서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반이 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하가 워낙 깔끔하게 꺼내서 말이죠.”
연하는 쑥스러워했다. 규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런 걸로 자랑스러워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주기적으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와 심리상담도 받고 있어. 다행히 밝은 아이라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몇 번 네 병문안도 다녀갔고.”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하고, 정리된 것 같았다.
그때 헬기 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복도 너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복도 반대편에도 공간이 있었는데, 벽이 전면창이어서 건너 풍경이 보였다.
집 크기와 구조가 어떻게 되는 건지, 지형을 따라 건물이 내려갔다 솟았다하면서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꼭 산중에 지은 천문대 같은 느낌이었다.
멀리 헬기장에 막 헬기가 내려서고 있었다.
“소장님 돌아오셨나 봐요.”
에밀리가 말하고, 연하는 분연히 걸음을 돌렸다.
“어서 알려…….”
“잠깐만.”
이반은 연하의 어깨를 잡았다. 연하는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왜요?”
“좋은 생각이 있어.”
* * *
렉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반과 연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반이 연하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돌아보았다.
“오늘도 열심히 수확하고 왔어?”
“예.”
렉스는 바로 규하를 보러 가기 위해 마음이 급해 대충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항상 반갑게 인사해 주는 연하가 정면을 본 채 꼼짝하지 않았다. 곱게 빗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연하가 입은 모습을 본 꽃무늬 원피스가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주무십니까?”
이반은 다정한 눈으로 연하를 보았다.
“아니.”
렉스는 더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그때 연하가 돌아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넘어가고, 볼이 보이고, 입술, 코, 눈……. 턱을 살짝 들고 눈매를 휘며, 꼭 연하처럼 웃었다.
“왔어요?”
렉스는 그녀를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 소금기둥이 된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규하는 눈을 굴려 이반을 보았다. 이반도 그녀를 보았다. 그도 저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런 장난이 통할 리가 없잖아요. 팔 치워요.”
이반이 팔을 치우자, 규하는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팔을 두를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닭살 돋아 죽는 줄 알았네.”
딱히 좋아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그가 팔을 둘렀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역시 태생이 그의 처제인 모양이었다.
숨어 있던 연하가 복도에서 나왔다.
“어때, 잠깐이라도 속았어? 역시 금방 알았지?”
규하는 렉스에게 다가갔다.
“렉스, 나…….”
어쩐지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수줍어져 규하는 그녀답지 않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우물쭈물했다.
“렉스?”
그런데 렉스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건 무슨 반응…….”
다가온 연하가 렉스를 유심히 보더니 깜짝 놀라 말했다.
“기절했는데, 선 채로?”
* * *
렉스는 눈을 떴다. 규하가 누웠던 침대에 그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규하가 걸터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규하는 옷을 갈아입었는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루아스도 기절할 수 있구나.”
렉스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혈압이 순간 심하게 내려갔는지 아직도 살짝 어지러웠다. 이마를 짚고 숨을 내쉬었다. 군복의 목 부근 단추는 누가 풀어두었는지 풀려 있었다.
“괜찮아?”
규하가 물어, 렉스는 그대로 시선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근데 어느 포인트에서 기절한 거야? 연하가 자랐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나랑 똑같아진 연하가 국장하고 사는 걸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내가 깨어난 걸 깨달아서, 그것도 아니면…….”
몇 개월 간 잠든 모습만 본 규하가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기쁨과 경이가 지나치면 거의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걸, 그도 처음 알았다.
“언제 일어났어?”
규하는 기가 막혔다.
“야, 너 말이 짧…….”
“싫어?”
이마를 짚은 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왠지 말문을 막았다.
그새 어디서 뭘 먹고 왔는지 이 쓸데없는 남성미는 뭐란 말인가?
규하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보았다.
“건방져졌어.”
“너보다 내가 천 살은 많은데.”
그건 그렇지만…….
오히려 연하남이 ‘너라고 부를게.’라고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건방지고, 같잖고,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짜릿하고…….
인간이 이렇게 복잡하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계속 밀리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 규하는 심기일전했다.
“루아스가 된 후로는 치트키를 쓴 거나 마찬가지니까 인간일 때 나이로 해야…….”
갑자기 렉스가 얼굴을 붙잡아 키스했다. 명치를 훅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입술이 여러 번 부딪쳤다.
렉스는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사랑해.”
하필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하면 반말에 대해 그녀가 다른 말을 할 수 없도록 계획적이라고밖에…….
규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얼굴로 렉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귀엽다는 듯이.
그 역시 세월을 허투루 산 것은 아닌가 보다. 역시 이쪽도 천년 묵은 능구렁이인 것이다.
렉스가 다가왔다. 규하는 그를 안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런 능구렁이라도─
‘사랑스러우니까.’
저 멀리 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연하는 옆에 서 있는 이반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가?”
이반은 연하를 내려다보았다.
“규하가 루아스가 됐잖아요. 루아스가 되면 니스타르의 자격을 잃는다던가 그런 걸까요?”
“그건 아닐 거야.”
“그럼 규하가 영원히 사는 한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 거네요?”
“그렇겠지.”
연하는 조금 웃었다.
“그야말로 말뚝 박았네요.”
이반은 피식 웃으며 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말이 어딘가에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안전했지만, 안전장치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흐샤야르샤에서 연락이 왔다.
“이미 떠나신 분에게 이례적이지만, 형제단 객원 자리를 내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니스타르 강규하를 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그가 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 선생은 이제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반은 연하의 어깨를 안고 말했다.
“가자. 어쨌든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연하는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마 그때가 렉스에게도 그가 천년 만에 가장 쓸모 있는 순간이었으리라.
두 사람이 사라지는 뒤로, 창가에 날씬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앞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피고, 화분에 핀 꽃이 바람에 살랑이자 호기심을 느끼는지 코끝을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금세 호기심을 잃은 듯 이빨을 드러내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리고 화분 옆에 다리와 꼬리를 모으고 앉아 밖을 보았다.
우아한 짐승과 꽃이 햇빛 속에서 희미한 은빛 윤곽으로 빛났다.
# 풀 베는 사람, 수확자, 독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