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I PRAY
‘원래는 상당히 다혈질인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군.’
나이가 들면서 차분해져서 그렇지, 옛날엔 한 번 화가 나면 온 궁정 사람들이 다 뜯어말려도 화를 가라앉히기 힘들 정도였다고 들었다.
자신이 젊어서 요절할 거라는 걸 직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쳐 쓸 에너지를 전부 쓰는 느낌이었다고.
“뭐 해? 가자고.”
이반은 이미 차 앞에 내려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알게 모르게 성질이 급한 편이었지.’
사실 장례식장에 혼자 뛰어든 것도 보면, 옛날에도 병사들 사이에 섞여서 가장 먼저 적군의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는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 화살에 맞고 적군에 포위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고.
자신도 나중에 역사책에서 읽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안 와?”
“갑니다.”
렉스는 대답하고 낮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 뒤로 수평을 이룬 두 저울이 달린 천칭을 형상화한 것 같은 현대적인 건물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 * *
이반은 눈을 떴다. 가슴이 서늘한 느낌 때문이었다.
품속에서 잠든 연하가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매끄러운 시트 위에 그녀가 누웠던 흔적만이 크레이터처럼 남아 있었다.
돌아보자, 어두운 창 너머 바다는 고요했다.
이반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된 집이라 연하가 어디 있는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품이 큰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뒷모습이 테라스에 서 있었다.
연하는 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깼어요?”
“왜 나와 있어?”
이반은 테라스로 나가며 물었다. 밤의 바닷바람은 사늘했다.
“잠깐 규하 좀 확인하고 왔어요.”
연하는 애써 웃는 얼굴이었다.
규하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연구원까지 상주시켜 놓고 원인을 알아내려 하고 있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채로 계속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일단은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체 반응은 문제가 없으니까.”
연구원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이반은 그날 처음으로 연하가 남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연구원으로서도 최선을 다한 결과였기 때문에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여러모로 속상했는지 연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도 연하는 거의 우는 법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도 규하가 과호흡을 일으켰을 때가 유일했다.
쌍둥이가 관련됐을 때만 우는 그녀를 안고 달래주며 그는 연민과 질투를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반. 감염은 선택의 문제라고 했죠.”
연하는 바다를 보면서 말했다.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테라스 아래쪽 바위에 파도가 와 부딪혔다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솟구치듯 올라온 바닷바람이 푸르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모두 우연의 산물인지, 무의식중에나마 제가 선택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연하는 그를 보았다. 밤의 바다와 경계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전 지금 여기 서 있고, 그러니까 바라게 됐어요. 새로운 세상을.”
연하는 달을 보았다.
“위로 갈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이 모두에게 닿도록.”
“주저하지 마.”
이반은 바로 말했다. 근래 그녀가 어떤 생각을 깊이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때때로 생각에 잠기는 옆모습을 보면서 이야기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어쨌든 시간은 충분하잖아.”
연하는 한 걸음 이반에게 다가섰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 연하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그에게 휘감겼다. 마치 바람이 그녀를 그에게 밀어주는 것 같았다.
이반은 연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래쪽을 보았다.
“그래도 아이는 낳아주는 거지?”
품이 큰 티셔츠 아래로 배는 이미 꽤 볼록했다.
“당연하죠. 이 아이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거니까요.”
이반은 온기가 도는 눈으로 연하를 보았다. 볼을 쓸고, 뒷목을 감싸 입 맞추었다. 그녀는 따듯한 바닷바람처럼 불어오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연하는 이반의 손목을 쥐고 낮은 소리를 냈다.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규하도 있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한동안 그와 사랑을 나누지 못한…….
“들어가서 하세요.”
연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컵을 들고 있는 렉스가 막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슬그머니 이반을 보니, 그는 ‘저 녀석을.’라는 말이 쓰여 있는 눈으로 그쪽을 보고 있었다.
이반은 연하를 보고 쓰게 웃었다.
“누군가와 같이 지내려고 지은 집이 아니라서 프라이버시가 전혀 지켜지질 않네.”
연하도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규하를 떼어놓을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렉스까지 같이 지내게 됐는데, 집이 거의 통유리인 데다가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구조가 여러 사람이 사는 데 맞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이사 가야겠어. 다 같이 살려면.”
“괜찮아요?”
이반은 테라스 난간에 양팔을 걸쳐 손을 맞잡고 그녀를 보았다.
“네가 강 선생하고 떨어져 살 거란 생각은 애초에 안 했어.”
“규하도 이바노프니까요.”
“그러게. 이렇게 쓰는 사람이 많아질 줄 알았으면 좀 공들여 지을 걸 그랬나. 우리 때는 성이란 게 없었어서.”
이반은 정말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연하는 조금 의외였다.
“성이 없었어요?”
“응. 아무개, 누구의 아들 정도였지.”
‘성이란 것도 생각보다 당연한 개념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떠올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반 원래 이름은 뭐예요? 여태 모르네요.”
“아아…….”
이반은 고개를 기울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연하는 놀란 듯이 그를 보았다.
“어, 그 이름은…….”
“맞아. 하필 그래.”
골난 아이처럼 뚱한 얼굴을 한 그를 보며 연하는 웃었다.
‘그래서 본명을 쓰지 않는 거였구나.’
“좋은 이름이니까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고는 갓 데이트를 시작한 어린 커플처럼 살짝 입 맞추었다.
반면 부엌 문가에 서 있는 렉스는 한숨을 삼켰다.
‘저 두 사람은…….’
그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지나가야 한다는 걸 생각지도 못할 만큼 서로에게 빠져 있었다.
한동안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있어야 했으니 이해는 하지만, 그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는 것만 알아주면 좋을 것 같았다.
달빛이 테라스에 선 연인을 비추었다.
착시겠지만 순간 이반은 고대의 청동제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연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건 다른 땅, 심지어 다른 시간대에 살던 두 남녀가 만난 것 같은 기적.
바다와, 시간과, 빛을 건너.
갑자기 이반이 이쪽을 보았다.
“왜 거기서 남 키스하는 걸 보고 있어?”
렉스는 정신을 차렸다.
“이상한 취미가 생겼군.”
렉스는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손을 내젓고 거실을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규하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방 한쪽에는 그가 쓰는 침대가 있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기계음을 들으며 잠드는 일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렉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규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적이 있다면…….’
그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인간일 때는 여덟 번 일과기도를 할 때만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거의 천년 만에 하는 동작은 처음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언제 처음 기도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신을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말을 하기 전에 기도하는 법부터 배웠을 테지.’
아니, 어쩌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그가 작은 손을 모으도록 도와주는 원장님의 손, 예배당의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비쳐 드는 햇빛, 평화로운 공기. 영혼 깊숙한 곳에 진동처럼 울려오는 종소리…….
사방에 편재한 신의 존재가.
렉스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규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제게 주십시오, 당신의 딸을.”
* * *
규하는 눈을 떴다. 낮은 허밍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강가였다. 저 멀리 보이는 초록빛 둔덕과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이 마치 옛날 윈도우 배경화면 같았다. 그래서 익숙해 보이기는 했지만, 와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여긴 어디지?’
멍하니 서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강 건너에 손짓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오라고?’
마침 강 건너로 통하는 다리가 있어서, 규하는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다리는 끝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정말 상당히 오래 갔는데도.
그래서 다시 보니, 오라는 손짓이 아니라 가라는 손짓이었다.
‘아, 가라는 거구나.’
규하는 다시 다리 위에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어딜?’
그러고 보니 궁금해졌다.
‘왜 멍청이처럼 저 모르는 할아버지가 오라는 대로 가고 있었던 거지? 가랬다고 얌전히 가는 건 또 뭐야.’
규하는 강 건너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거기서 손짓하고 있었다.
‘잠깐. 할아버지가 아닌데?’
규하는 미간을 좁혔다. 강 건너에 서 있는 건 젊은 남자였다. 아니, 젊은 여자…… 어린아이…… 모두였다. 말도 안 되지만, 그 전부라고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규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가장 간절하게 대답을 알고 싶은 질문 하나를 필사적으로 외쳤다.
‘왜 제가 의인이죠? 왜 하필 절 선택한 거예요?’
손짓하는 할아버지, 아니, 존재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대로 모든 것이 멀어져 갔다. 규하는 목청껏 소리쳤다.
‘아, 이 불친절한 사람아. 이유라도 알아야 납득하고 의인인지 뭔지 돼보려고 노력할 거 아니에요!’
존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고, 이제는 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원래 알고 있었던 선천적인 지식 같은 정보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게 가능하나 싶었지만, 그냥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네? 뭐라고요? 선택한 건 당신이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말…….’
막을 새도 없이 모든 게 흐려졌다.
* * *
규하는 눈을 떴다.
‘선택한 건 나였어.’
멍한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간 정신이 돌아와, 낯선 천장을 인식했다.
‘응?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리고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생각나질 않았다.
그때 낮은 허밍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옆을 보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무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뒤돌아선 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등을 덮을 만큼 긴 머리카락에 윤기가 흘렀다. 얼핏 보이는, 솜털이 반짝이는 둥그런 볼이 탐스러웠다.
그리고 배가 컸다. 아주.
‘이것도 꿈이구나.’
규하는 몽롱하게 생각했다.
‘벌써 배가 저렇게 불렀을 리 없으니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열려 있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문을 나섰다.
여자를 부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정말 꿈인가 보네.’
그래서 눈을 감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런데 문 앞으로 또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으로 봐서 몸집이 작은 여자 같았다.
규하는 다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