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쿠니스
소식을 들었을 때, 셀레나는 검찰청 로비에 서 있었다. 구금 제한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막 풀려난 참이었다.
셀레나는 꾹 눈을 감았다.
스테판.
“대공 그 미치광이가 강제로 폭발하게 만들어놓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소식을 전해온 비서도 침통한 듯 중얼거렸다. 셀레나는 눈을 떴다.
“그래도 이바노프 씨는 스테판을 구하고 싶으셨던 걸 거예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연하가 가연을 구했듯이.
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푸거-들뢰크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군요.”
비서는 아쉽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 희로애락의 결정체가 스러져 간 일보다 목적이 실패한 데 아쉬워하는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번 일로 푸거-들뢰크를 무너뜨리기만 해도 적잖은 소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하늘이 돌보는 것처럼 빠져나갔군요.”
마치 진짜 면죄부를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주식도 형제단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모두 매각했더군요. 피해는커녕 오히려 차익을 어마어마하게 거뒀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로 말이죠.”
셀레나는 정문 밖을 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쓰러져 사방에 붉은 빛깔이 낭자했다. 마치 도시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뒤로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도시는 밤의 세례를 받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때가 오겠죠, 언젠가. 제 아무리 강력한 면죄부라도 효력이 다하는 날은 올 테니까.”
검은 하이힐이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는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헬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연하가 뛰어 내려왔다. 뒤에서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이반!”
햇빛이 쏟아지는 활주로 끝에는 이반이 서 있었다.
여전히 TV에 나왔던 그대로 트렌치코트 차림이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흩날렸다.
연하는 달리기 시작했다.
“조심…….”
연하는 이반에게 온 힘을 다해 안겼고, 그 역시 강한 두 팔로 힘껏 그녀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연하야.”
귓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온기, 향기……. 연하는 꾹 눈을 감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났어요, 다시.”
이반은 그녀를 조금 떼어 마주 보았다. 그의 뒤로 햇빛이 내리쬈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날 거야.”
눈에 글썽한 눈물을 손으로 훑어주는데, 연하는 갑자기 어딘가에 생각이 닿은 듯 표정이 바뀌었다.
“아뇨. 다시 못 만날 뻔했어요. 대체 왜 그랬어요? 혼자…… 그것도 그렇게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이반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이제 잔소리를 다 하네.”
“총리도 혼자 만나러 갔다면서요? 옛날에도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고 다녔던 거죠? 이반은 혼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다시 이러면 정말 혼낼 거예요.”
“좋은데. 혼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가 너무 선선히 웃어 연하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혼낼 거예요.”
“응.”
기껏 엄하게 말했지만, 웃는 모양새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구하고 싶었어, 스테판.”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마리에테가 죽었을 때, 그게 인간사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인간은 늘 그렇게 죽고 죽이며 살아왔으니까. 또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라고…….”
그 모든 흥망성쇠가 각자 노력하고 싸운 결과라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뺨에 온기가 느껴졌다.
연하가 오히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도 이반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싸운 결과라는 걸, 난 의심하지 않아요.”
이반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잡았다. 붉은 눈동자에 빛이 넘실거렸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이반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안았다.
“그렇게 믿어요.”
‘리웨이, 난 널 위해 울지 않을 거야.’
연하는 햇빛이 잦아드는 활주로 저편을 보며 생각했다.
도와달라고 말하지도 않은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네가 내게 해야 할 말은 하나였어.’
도와줘.
연하는 자신을 감싸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울지 않을 거라 했지만, 꾹 내리 감은 눈꺼풀 사이로 물기가 비쳤다.
* * *
푸른 법복을 입은 재판관들은 말없이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중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재판하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장은 전통적인 재판장보다 모던한 공간이었다.
방음벽 같은 흰 벽에, 삼면에 길게 늘어선 책상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언뜻 보면 시청각자료실 느낌이 나기도 했다.
반대편 벽 가운데 난 유리창 너머에는 대공이 앉아 있었다.
그는 국제형사재판소 교도소 전용의 미색 죄수복을 입고, 팔은 앉아 있는 탁자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비인간 테러단체 ‘SN’을 운영했던 그에게 기소된 죄는 제노사이드, 전쟁범죄, 인도에 반하는 죄, 침략 범죄, 국제형사재판소가 관할하는 4대 범죄 전부였다.
운 좋게 개중 한두 개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 해도, 형량은 아주 길 것으로 보였다. 인간이라면 몇 번씩 되살아나야 겨우 형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웅성웅성.
재판이 끝나고 재판관들이 퇴정하자, 사람들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창 안쪽에서는 사방에 서 있던, 무장한 군인들이 대공에게 다가갔다.
한 군인이 대공이 앉아 있는 전동휠체어 같은 의자를 돌려 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창 너머로 비쳤다.
군인들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통하는 곳으로 나섰다.
햇빛이 내리쫴, 대공은 시린 눈을 찡그렸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한창이었다. 공기에서는 서늘한 냄새가 났고, 가을의 햇살은 따가웠다.
햇빛이 잦아들자 눈앞에,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듯 삭막한 풍경이 나타났다.
사방으로 건물이 둘러진, 가운데 관제탑 같은 탑이 서 있는 네모난 콘크리트 정원에 검은 호송차량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은 전동휠체어를 그쪽으로 밀고 갔다.
그때였다.
“잠깐.”
대공이 움찔하며 얼핏 옆쪽을 보았다. 군인은 전동휠체어를 멈추었다.
대공은 뒤를 돌아보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반 이바노프.”
길 위에 서 있는 건 코트 아래 정장을 입은 이반이었다. 정복을 입은 렉스는 늘 그렇듯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대공은 군인을 보고 말했다. 의외로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였다.
군인은 전동휠체어를 두 남자 쪽으로 돌렸다.
대공은 두 팔과 허벅지, 허리, 가슴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두 다리가 허벅지까지밖에 없어, 빈 죄수복 바지가 아래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반이 조병창을 벗어나고 팔은 어떻게 붙잡아서 접합했지만 두 다리까지 붙일 시간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나타난 MCTC는 그의 다리를 따로 가져가 버렸다.
갓 떨어진 사지는 저절로 접합할 수 있지만, 떨어진 부위가 썩어버리면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마르코프는 착한 녀석이었어.”
대공은 말했다.
“소 같은 녀석이어서 우직하게 주인 말만 들을 줄 알았지.”
“…….”
“그렇게 생긴 주제에 농부의 아들이었으니까. 남색을 밝히던 변태 같은 귀족 새끼한테 학대당해 죽었는데, 그 새끼를 그냥 깔끔하게 보내줬을 정도라고.”
대공은 마르코프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진지하고 차분해 보일 정도였다.
“아무리 많은 인간을 감염시켜도 단 한 놈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는데, 마르코프는 내게 돌아온 처음이자 마지막 녀석이었지.”
하지만 바로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시몬의 패착은 나 같은 악당은 슬픔도 복수심도 없는 줄 알았다는 거야. 나도 인간이었는데 말이야, 그 지옥 같은 늪을 빠져나오기 전엔.”
대공은 훗 웃었다.
“하지만 뭐, 시몬 녀석보다는 내가 낫겠지. 감옥에서 좀 썩는다고 죽는 몸도 아니고.”
대공은 군인을 보고 말했다.
“갑시다.”
군인은 다시 전동휠체어를 돌렸다. 의자가 반쯤 돌아갔을 때, 이반이 나직이 말했다.
“쿠니스.”
대공은 멈칫했다. 그리고 홱 돌아보았다. 이번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반사적으로 묻긴 했지만, 이바노프가 제 이름을 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깨달았다. 입술이 떨려왔다.
“가말이…… 살아 있는 거지?”
룩카의 청년 쿠니스는 제 쌍둥이 가말을 목 졸라 죽여 시신을 늪에 던졌다. 하지만 가말은 죽지 않았다, 적어도 늪의 X에 감염되기 전에는.
온갖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가말은 반쯤 사고로 녀석을 늪으로 끌어들였고,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늪은 잉태했다.
이 세계의 악몽,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어디…… 어디, 어디 있어?”
쿠니스는 실제로 몸을 떨며 물었다.
[말해줄 리 없잖아.]
이반은 난생처음 듣는 언어로 대답했다. 라틴어도, 고대 그리스어도 아니었다.
“너……!”
쿠니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속구에서는 덜컹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인들은 긴장하며 소총을 겨누었다.
청년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차가웠다.
[넌 바이러스를 이용해 다른 가말을 만들고 싶었겠지. 인간 중에 가말을 닮은 아이를 골라. 이번에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쿠니스, 어떤 건 절대 되돌릴 수 없어.]
쿠니스는 파르르 떨었다.
[놔, 놔줘! 날 놔줘! 놔! 난 가야 해!]
실성한 것처럼 들썩이는 그를 내버려 두고, 이반은 돌아섰다.
[영원히 절망해 봐.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걸 갈망하면서.]
쿠니스는 눈이 팽창했다. 그렁거리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울음이 울렸다.
아아아…… 아아……!
점차 오열이 커져 갔다. 하늘은 뻥 뚫려 있지만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을 울리며 멀리 퍼져 나갔다.
이반은 콘크리트길을 걸어, 나왔던 문으로 걸어갔다.
“국장님.”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거수경례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반은 조금 웃었다.
“이젠 국장이 아닙니다만.”
조사가 끝나고 그는 얼마 전 대기발령 상태가 풀리고 국장직으로 복귀하는 일이 허락됐지만 MCTC에 사의를 표했다.
어차피 연하 곁으로 가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고,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더 일을 하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 국장 정도 되면 매스컴에 얼굴이 많이 노출되지만, 어지간한 연예인보다도 유명해진 지금으로서는 일단 한 걸음 물러나는 게 맞았다.
그가 세상에서 잊히기 전까진 또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 같았다.
군인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했다.
“감사했습니다.”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멀리서 어머니를 찾는 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길게 따라왔다.
거의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뒤따라오던 렉스가 물었다.
[정말 가말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도 역시 난생처음 듣는 언어로 말했다.
[알 리가 없잖아.]
이반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찾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렉스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강 상사도 모르는 눈치더군요.]
[연하가 이것까지 나눠질 필요는 없으니까.]
[강 상사는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요.]
[알아. 그래도 지켜주고 싶은 건 남자의 본능이라고 할까.]
이반은 진지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 소리를 듣는 겁니다.”
렉스가 말하자, 이반은 코웃음을 쳤다.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야.”
렉스는 뒤를 한 번 보았다. 이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알아서는 안 되는 녀석이 알아버렸군요.”
“어린애 같았다는 건 인정해. 좀 화가 나서 말이야.”
녀석이 사탄의 입속에서 영원히 씹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할 벌이라면 이것뿐이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가말이 살아 있다고 알면서도 결코 만나러 갈 수 없다는 현실.
“열차 테러 때 녀석이 강 상사의 뺨을 쳤던 것 때문에 말이죠?”
이반은 험악한 표정이 되었다.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녀석이야.”
어쨌든 이건 고작 연하의 뺨을 때렸기 때문에 한 복수였다─는 의미였다.
‘원래는 상당히 다혈질인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군.’
# 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