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COMES THE TEMPEST (4)
시몬은 이반을 잡으며 앞을 막아섰다. 이반은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반은 시몬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끌어당기며 그녀를 뒤로 내돌리는 동시였다. 무언가 수많은 것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앞을 막아섰다.
쿵, 쿠웅, 쿵.
동시에 저마다 들고 있는 바디벙커를 땅에 처박듯이 내려놓았다.
거의 수십 명에 가까운, 각자 다른 사복 차림을 한 예거들이 순식간에 빡빡한 밀집대형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역부족인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밀어, 앞으로!”
폭풍 속에서 타우가가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니, 타우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생물의 청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소리가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쿠우우우, 우우우우.
괴물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뿐이었다.
사방이 조용해지는 데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에 휘몰아치는 에너지의 흐름이 결국은 잦아들기 시작했고, 천천히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프스스…….
옆에 새까맣게 그슬린 바닥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시몬은 그늘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반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다른 쪽을 보고 있었지만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 간 건 같이 지낸 10년을 포함해도 처음이었다.
앞으로 바디벙커를 들고 있는 예거들의 몸에서 실제로 연기가 올라왔다. 그들은 첩첩이 겹쳐진 모양이 마치 성벽이나 고대 그리스 전사들이 짠 팔랑크스(밀집 장창보병대) 같았다.
“다친 사람 있는지 확인해.”
이반이 일어나 말하자, 사방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사람들, 대형을 풀고 각자 부상 정도를 확인하는 예거들, 바쁘게 카메라에 소식을 쏟아내는 기자들…….
예거들 가운데서 타우가가 다가왔다. 가죽재킷이 반쯤 그을렸고 머리카락과 볼이 탔지만 딱히 부상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어 보였다.
“정말 구관이 명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팔랑크스가 통할 줄이야.”
물론 현대기술과 흡혈귀의 육체 능력이 합쳐지지 않았다면 감히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시몬은 그제야 천천히 일어섰다. 이반은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차라리 경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녀는 떨리는 턱을 억누르기 위해 힘을 주었다.
“당신을 위해 죽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시는군요.”
“죽어서 증명하고자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이반은 돌아섰다. 시몬은 그 등을 보다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마드찰란에게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주고 있었다. 그녀 대신 그를 보호했던 건 예거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총리님, 괜찮으십니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부축하며 물었다. 하지만 마드찰란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총리님, 전…….”
마드찰란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직 카메라가 그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온화한 빛을 잃지 않는 눈동자 너머로 지나가는 건 깊은 경멸이었다.
너도 어쩔 수 없군, 하고 말하듯.
시몬은 숨을 삼켰다.
한 순간 감정에 치우친 선택으로 공들여쌓은 탑을 단번에 날려버리다니.
“국장님.”
저편으로 간 이반에게는 경찰들이 다가왔다. 카메라를 의식한 건지, 아니면 총리를 구한 걸 정상참작 해주는지 총을 겨누진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수갑을 채워야겠습니까? 어차피 소용은 없어 보입니다만.”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모양이었다. 이반은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달아나지 않을 테니.”
시몬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괜찮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스테판을 잃긴 했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자료도 모두 그대로 있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마드찰란도, 대공도, 스테판도, 하인리히도 없지만…….
시몬은 멈칫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속이 메슥거리는…….
뱃속에서 뭔가 폭발한 것처럼 확 치받히는 순간, 참을 새도 없었다.
“쿨럭!”
괴물이 태어나는 것처럼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뿜고 말았다. 퍼져 오르는 핏물을 마드찰란은 그대로 뒤집어썼다.
경찰들을 따라가던 이반이 흠칫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기자들조차 마이크나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몬은 떨면서 제 얼굴을 짚었다가 손을 보았다. 거의 검게 보이는 핏물이 흥건했다.
‘말도 안 돼.’
루아스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 몸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는…….
“쿨럭!”
시몬은 한 번 더 핏물을 토해냈다. 석유처럼 검고 걸쭉했다.
“이바노프 씨! 물러서십시오!”
루아스인 시몬이 감염 증상을 보인다는 데 예거들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반은 움직이지 않았다. 드물게도 놀란 것처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바노프 씨!”
예거들은 처음으로 이반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를 감싸서 물러나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몬은 무릎이 꺾여 꿇어앉았다.
‘아니야. 난 바이러스를 맞은 적이 없…….’
불현듯 깨달았다.
그 여자 CEO. 그녀에게 핏물을 뿜었던.
‘설마 그때……!’
시몬은 온몸을 떨었다. 마드찰란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망연자실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곧 그조차도 흐려져 갔다.
‘안 돼. 난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
스테판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야말로 다음 세상으로 갈 자격이 없어.”
마치 그렇게 말하듯이.
시몬은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저 멀리 예거들 사이에 서 있는 이반을 보았다.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나의 왕.’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가 사랑할 만한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 세계조차 발밑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하지만 그의 품속에서만큼은 사랑스러운 꽃이 될 거라고…….
그와 함께 다음 세상으로…….
‘난……!’
시몬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느낌이었을 뿐, 축 늘어진 그녀는 그대로 눈을 뜬 채였다.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흰자위와 홍채가 한껏 벌어진 붉은 눈동자, 흥건한 핏물은 어느 게 어느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현장인데도,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푸른 PPE(개인보호장비)#를 착용한 CDC(질병통제예방센터)# 대원들이 앞으로 테이프를 둘러치며 지나갔다.
“스테판이 데려갔군요.”
이반 옆에 있는 예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들어 성호를 그었다.
이반은 그를 보았다가 테이프 너머를 보았다. CDC 대원들이 마드찰란을 처치하고 있었다. 그 옆에 죽어 있는 시몬 옆으로는 시신을 담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녀석, 가톨릭이었지.”
이반은 예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예거가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 건네주었다. 이반은 성호를 긋고 십자가를 이마에 대었다.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묵념했다.
그 모습이 우연히 방향을 돌린 카메라에 잡혔다.
흡혈귀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들을 신에게 버림받은 족속쯤으로 생각하던 많은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욱이 흡혈귀가 십자가로 성호를 긋고 묵념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세간에 회자되었다.
* * *
연하는 꼼짝하지 않았다.
뉴스들은 촬영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내보내면서 온갖 추측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반은 당분간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연하는 흠칫 깨어났다.
렉스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은 다른 손에 쥐고 있었다.
“소장님, 왜…….”
연하는 얼떨떨했다. 그는 규하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가장 안쪽 방에 위치해 있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렉스 옆에 아까까지만 해도 못 보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익숙한 무장을 한…….
“소령님.”
귀신이 나타났어도 이만큼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도영은 소총도 여전히 그대로 쥔 채 야간투시경만 위로 올리고 있었다.
주변으로 같은 차림을 한 낯익은 대원들이 서 있었다. 뒤로 엄폐물은 치워져 있었고, 문도 열려 있었다.
그녀가 뉴스를 보는 사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아니면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해야 할지.
“작전이 취소됐어.”
도영은 말하고 대원들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내가 이 사람들 뒤통수를 후려쳐서라도 도망치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말이야.”
대원들은 야유했다.
“소령님, 진심이죠?”
“와, 남자다. 그거 계급장까지 걸어야 할 발언인데.”
“신고해, 신고. 이런 것도 포상금 주나?”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정말 테러리스트가 됐으면 어쩌려고? 사적인 감정으로 임무를 그르칠 작정이야?”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야, 너 진짜…….”
“고마워.”
연하는 도영을 끌어안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연하의 어깨에 올린 제 손을 보았다.
체포하더라도 그들이 데려가야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 뭘 해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누가 선수를 치기 전에 연하의 신병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정말 계급장을 걸지 말지는, 최악의 경우가 닥쳤을 때 생각하려고 했다.
어쨌든 위에서 까라면 까는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머리가 없는 건 아니니까. 어느 편을 택할 건지 결단력 정도는 발휘할 수 있었다.
“떨어지세요.”
렉스가 그들 사이에 칼집째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연하에게서 떨어진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포옹 정도는 상관없잖습니까?”
“답은 드페흐 소령이 알고 있겠죠.”
“국장님 그렇게 쪼잔한 성격입니까?”
“리웨이는…….”
연하가 말하자,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녀석에겐 여러 가지 선택권이 있었어.”
도영은 다소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그걸 선택한 거야, 스스로 옳다고 선택한 걸. 난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전부야. 똑똑한 녀석이라 우리가 연민을 가지지 않을 것도 알았을 테니까.”
가족을 잃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복수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게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녀석은 녀석 나름대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일을 택한 것이다.
연하는 꾹 무언가를 삼키는 것 같았다.
“이반에게 가야 해.”
연하는 렉스를 돌아보았다.
“저, 규하는…….”
“다녀오세요.”
렉스는 조용한 감정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 * *
“차를 돌려.”
하인리히는 나직이 말했다.
“네?”
비서는 백미러를 보며 반문했다.
“증언할 필요가 없어졌잖아.”
“아, 네.”
비서는 바로 차를 돌렸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일단 끌어내릴 생각이었는데……. 그새 시몬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보아하니 마드찰란도 오래 가진 못할 것 같았다. 정치적 문제로든 건강상 문제로든.
하인리히는 창밖을 보았다.
“연옥에 계신 선조들이 가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고 계신 모양이야. 가문에 위기가 올 때마다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나는 걸 보면.”
창밖으로 도시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유난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푸거-들뢰크는 수세기를 살아남았어.”
백미러 너머로 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인리히는 비릿하게 웃었다.
“제왕들의 가문도, 그들을 쥐고 흔든 교황의 가문도, 심지어 주인 본인은 흡혈귀가 되어 아직 살아 있는 가문도 사라졌지만 말이야.”
# Personal Protective Equipment
#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