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95화 (95/104)

95화. COMES THE TEMPEST (3)

“가야 해요, 당장!”

연하가 정말 뛰쳐나가려는 태세기에 오로스코가 몸을 던져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진정……!”

오로스코는 거의 연하에게 끌려가면서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갈 수도 없지만 만약 간다 하더라도 시간 내에 닿으실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에 가신 걸 겁니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면!”

연하는 홱 돌아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애써 참고 있던 불안이 터진 것 같았다.

“분명 무슨 수가 있으실 겁니다.”

“무슨 수가 있어요? 크루즈에서도 거의 죽을 뻔했다고요!”

“그건…….”

사실 은둔 생활을 할 정도였던 이반이 이만큼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그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MCTC에서의 권한은 정지됐고, ISLE은 감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연하를 포함한 그들은 인질로 붙잡히기 일보직전이었다.

무슨 수가 있어서라기보다, 이반도 도박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차마 연하에겐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도박을 한 거라고요, 저건.”

그런데 연하는 심각하게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 * *

셀레나는 다리와 팔짱을 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검사 시보가 팔짱 낀 팔위로 도드라진 육감적인 가슴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형물 덩어리를 저렇게 열심히 쳐다보다니 갈 때 빼주고 갈까 싶어졌다.

정말 빼주면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로망 때문에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역시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는 부분이라고 할까.’

셀레나는 뒤에 붙어 있는 시계를 힐끔 한 번 보았다.

“장례식이 시작됐나요?”

묻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연방 검사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런 것 같군요.”

어쨌든 피의자 입장이긴 하지만 다국적 대기업 계열사를 이끄는 수장을 일개 범죄자처럼 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 정보를 얻긴 힘들 것 같았다.

‘일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걱정되는군.’

하지만 그에겐 그의 싸움이 있었다. 감염과 싸우고 있는 규하에게도, 안전가옥에서 버티고 있는 연하와 렉스에게도, 스테판을 찾아 데려오기로 한 이반에게도 각자 싸움이 있듯이.

셀레나는 꼬고 있는 다리를 풀었다.

이번에 검사 시보는 그가 샤론 스톤이라도 되는 듯이 다리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저 검사 시보는 한번쯤 울어야 정신을 차리지 싶었다. 워낙 잘 빠진 다리라는 건 인정하지만.

아무튼 그건 나중에 처리할 일이고.

“검사님.”

부르자, 연방 검사는 그를 보았다. 셀레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우리도 시작해 볼까요?”

연방 검사는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누가 검사 자리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 * *

비서는 흘긋 백미러를 보았다.

백미러에 비친 하인리히는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장례식에 가는 길은 아니지만 검은 양복을 입었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정말 셀레나 추와 이야기한 대로 증언하실 생각이십니까?”

운전기사 대신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비서가 물었다. 하인리히는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기분이 너무 불쾌해서 말이야.”

감사가 시작될 거라는 걸 셀레나 추가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ISLE의 발을 묶어놨다고 시몬 쪽에서 안심하고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를 셀레나 추는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지금 하인리히가 가는 곳은 셀레나 추가 구금되어 있는 곳이었다. 형제단에 관련된 모든 것을 증언하기 위해.

“이건…… ISLE에만 좋은 일이 아닐까요.”

비서는 중얼거렸다. 하인리히는 백미러를 보았다.

“그렇겠지, 지금은.”

철저히 농락당한 피해자 역할은 하겠지만, 어쨌든 가담한 전적이 있으니 완전히 깨끗한 상태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하인리히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자기가 호랑이라도 된 것처럼 제멋대로 짖어대는 여우는 정말 못 봐주겠거든.”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차량 AI가 말했다.

“연결해.”

[……금 당장 TV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말했는지 ‘지’ 자가 잘린 채 말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해서.

비서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뭐야?”

[난리도 아닙니다. 이바노프 국장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폭탄테러범은 블란두스 박사의 아들 스테판이고요. 성전환수술을 했답니다.]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 주인어른께서 듣고 계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 너무 정신없이 일어나서.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스테판 블란두스가 마드찰란 총리를 암살하려는 것 같고, 이바노프 국장은 그걸 막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백미러 너머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 * *

“스테판.”

이반이 불렀다. 스테판은 그를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바노프가 이렇게 시선을 끄는 걸 감수하고 뛰어들 줄은 몰랐다.

사실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하필 그가 막으러 와서 난감한 차였다. 여러모로 해를 입히기 꺼림칙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무 무기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물론 무기가 없다고 싸우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차할 때 쓸 무기조차 가져오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든 자신을 설득해 볼 셈이리라.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모든 데 환멸을 느껴 떠났던 것 아니었습니까?”

스테판은 물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지만 가면서 절을 불태우진 않잖아.”

“저는 절의 대들보를 갉아먹고 있는 벌레를 없애려는 겁니다.”

스테판은 보여주고 있었다. 복수를 원하는 개인의 의지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스테판.”

그때 마드찰란이 끼어들었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스테판이라고 했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어째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과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스테판은 더없이 싸늘하게 잘랐다. 그리고 이반을 돌아보았다. 그와만 이야기하겠다는 듯.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가 좀 바빠서요.”

그때 이반은 어떤 소리를 들었다.

이바노프 국장님. 들리십니까?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그의 청력이 뛰어나다는 걸 이용해서 현장에 출동한 협상 전문가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역시 그 소리를 들은 시몬은 움찔하려는 얼굴을 애써 멈추었다.

하지만 스테판은 비웃는 얼굴이었다. 들리진 않아도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블란두스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거야.”

스테판은 어깨를 으쓱였다.

“판단은 역사가 할 겁니다. 하지만 별로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죽음으로써 더러운 수단에 대한 벌이 완성되는 거니까요.”

진부한 말이지만 적어도 진흙탕을 청소하는 사람은 진흙탕에 발을 디뎌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좀 더 똑똑했다면 더 좋은 수를 생각해 냈을지도……. 슬프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비켜서세요.”

카메라가 있어 일부러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슬퍼할 거야. 네가 죽어도.”

스테판은 움찔했다.

‘알고─’

다리를 불태웠다고 하지만, 사실 여자의 몸도 환생했다 생각하면 그리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았다.

어쨌든 여성호르몬제라는 고마운 과학 덕분에 머리와 정신도 여성화되었으니까,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나면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래, 분명히 오래 전에 여성화되었을 텐데…….’

연하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건 뇌 구조마저 뒤틀며 들이치는 인공 화학물질도 지우지 못한 자연의 마지막 찌꺼기였을지, 그냥 제게 숨어 있던 양성성향이었을지, 답은 알 수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지만.’

스테판은 쓰게 웃었다.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리를 불태웠거든요.”

“다리를 불태웠다면 배를 타고서라도 돌아와.”

스테판은 물끄러미 이반을 보았다.

“그런 말장난을 하는 분인 줄은 몰랐는데요.”

이반은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돌아와. 정말로 돌아올 수 없어지기 전에.”

그러더니 갑자기 어딘가를 돌아보고 조금 소리 높여 말했다.

“좀 시끄러운데 조용히 해줄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할 수가 없군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반은 좀 낫다는 듯이 다시 스테판을 보았다.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잖아, 인간들은. 처음 흡혈귀가 되었을 때만 해도 이런 세상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흡혈귀는 아무도 없었어. 날 포함해서. 하지만 인간과 흡혈귀가 공존하는 세상이 됐어. 이건 흡혈귀들이 한 일이 아니야.”

흡혈귀들은 수천 년간 군것질거리 정도로 생각한 걸 인간들은 몇 년 만에 대량화해서 세계의 프레임 자체를 바꾸었다.

인류도 그만한 기술력이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흡혈귀는 이만한 기술력을 쌓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면서 왜 매듭을 잘라 버리는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거야? 더는 그런 식으로 일은 해결되지 않아.”

스테판은 실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우습군요.”

“모든 건 변하니까.”

이반은 스테판이 그렇게 말할 걸 알았던 것처럼 말했다.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는 건 없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시몬은 이를 꽉 물었다.

“이바노프 씨를 존경해.”

어느 날 필립은 말했다.

“힘을 가졌지만 함부로 힘을 쓰시지 않잖아. 이바노프 씨도 경험을 통해 배운 거라고 하지만……. 이바노프 씨가 악당이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당이 됐겠지. 이바노프 씨가 은둔하고 사는 건 오히려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몰라.”

필립은 늘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분의 클리엔테스가 될 수 있었던 건 정말 다시없을 행운이겠지.”

그건 뜨겁고, 곧바른 존경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친 듯이 질투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클리엔테스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렉스보다 강하고, 필립보다 믿고 따르며, 훗날에는 강연하보다 그를 사랑하는.

기회만 있었다면…….

그런데 회상 속에서 필립이 그녀를 돌아보고 웃었다.

“안나 널 만난 것 다음으로 말이야.”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도 사고였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 필립을 죽일 의도는 없었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무의식적으로 방해라고 생각했을 순 있으나, 그 선량한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다. 아이도…… 낳아봤자 처치곤란이었겠지만, 분명 필립을 닮아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을 것이다.

그녀가 한때 가졌던 것, 잃은 것…….

“그러니까 돌아와.”

이반은 말했다.

스테판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역시 난 나약하기 짝이 없구나.’

이렇게 저항에 부딪힐 때마다 흔들릴 줄 알았기 때문에 다리를 불태우고, 배를 불태우고, 헤엄쳐 돌아갈 수 있는 팔까지 잘라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공존을 꿈꿔왔어. ‘하나’가 된 세상은 언제나 그가 꿈꾸던 거였으니까.”

어머니의 말씀…….

어쨌든 미련이나 걱정은 없었다. 다음 세상은, 좀 더 괜찮은 곳일 테니까.

스테판은 웃었다.

“다음 세상을 부탁드립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시몬은 당장 몸을 돌렸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마드찰란은 팽창한 두 눈에 공포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시몬은 그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보호했다.

총리를 살려야 했다. 그녀는 아직 방패가 필요했다, 더 위로 가기 위해 풍파를 막아줄 수 있는.

‘난 왕이 될 거니까.’

순간적으로 이반은 스테판과 시몬, 마드찰란을 보았다.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당연히 스테판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죄지은 자가 신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서야 할 곳은 지상의 법정이었다.

“미안하다고 전해주…….”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스테판은 웃는 모양 그대로 폭발했다.

알에서 태어나며 날개를 펼치는 새처럼, 불길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다. 시몬은 숨을 멈추었다. 닥쳐올 고통에 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이반이 나타났다. 시몬은 눈을 크게 떴다.

불길이 휘몰아치며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반은 불길을 똑바로 보며 비키지 않았다.

‘안 돼.’

시몬은 일어났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이었다.

‘필립.’

그녀는 손을 뻗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당신밖에 모르는 가정주부로 살다가 가긴 정말 싫거든. 그냥 그건, 내가 아니야. 어리고 상냥한 당신의 아내는 시대가 강제로 부여한 내 역할일 뿐이었어.’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난 죽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 하지 않는 여자니까.

시몬은 이반을 잡으며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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