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COMES THE TEMPEST (2)
경고등이 울리며 램프도어가 열리고, 바람이 밀어닥쳤다. 이반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찾는 사람이 예상대로 장례식장에 나타났다고 하니 만나러 가봐야겠군요.”
그러고는 빙긋 웃었다.
“수고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뭐야, 이 쓸데없는 매너는.
요원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
“쏴!”
이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아래 있을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절로 중얼거리게 되었다.
“이건 나한테도 좀 높은데.”
이반은 고개를 한 번 옆으로 꺾었다가 원위치 했다.
“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반은 다리에 반동을 주어 그대로 뛰어내렸다.
구름이 용솟음치듯이 단숨에 그를 훑고 머리 위로 멀어졌다.
지상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 *
“총리님!”
시몬은 외쳤다. 큰소리가 나자 경호원들 모두 바로 긴장했다. 동시에 총리를 보호하려는 몸짓을 취했다.
생각해 보면, 스테판이 마드찰란을 두고 갈 리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스테판이 무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쾅.
총리의 경호원들 중 한 사람이 폭발했다.
사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각자 사방으로 뛰고, 달려오고, 소리치고, 서로를 불렀다.
“총리님!”
연기가 가시자, 사람들이 엎치고 덮쳐 만들어낸 둥그런 반원형이 나타났다. 폭발을 맞은 방향으로 옷과 살갗이 탄 경호원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그 아래로 마드찰란이 고개를 들었다. 놀랐는지 낯빛이 창백했지만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반면 경호원들은 부상이 심각해 보였지만 모두 루아스여서 죽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괜찮으십…….”
“경호원들 모두 물러서!”
경호원들은 흠칫 서로를 보았다.
그랬다. 폭발한 경호원은 총리를 똑바로 보면서 터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누가 더 폭발할지 알 수 없었다. 경호원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현장에 섬뜩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치 러시안 룰렛이 돌아가는 테이블처럼.
“총리님! 총리님 괜찮으십니까?”
그 사이로 시몬이 달려 들어갔다.
“잠깐, 물러서!”
경호원들이 그녀를 잡아 세우자, 시몬은 당장 이를 드러내고 울부짖었다.
“내겐 폭탄 따위 없어! 보면 몰라!”
이바노프 혈통이 발하는 사자후에 경호원들은 흠칫 몸이 굳었다.
“그리고 너희들 따위보다 내가 배는 강해! 쓸모없는 것들!”
시몬은 그들을 밀치고 마드찰란에게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총리님.”
마드찰란은 그녀를 보았다.
“드무스티에.”
시몬은 휙 교회 입구를 돌아보았다. 스테판은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몬은 꾹 눈에 힘을 주었다.
“저 녀석을 잡아.”
경찰들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공기가 우짖었다. 시몬은 흠칫 위를 보았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물체는 광장에 내리꽂혔다.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연기와 함께 천지가 뒤흔들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외치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안 그래도 아수라장이던 현장은 9.11 테러가 일어난 현장을 방불케 했다.
부옇게 일어난 연기가 실제로 파스스 소리를 내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연기와 잔해가 너무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웅.
그때 머리 위로 무언가를 쫓는지 저공비행하는 전투기가 지나가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거인이 숨을 분 듯이 연기가 훅 밀려났다.
그리고 연기를 떨쳐 내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기다란 연기의 망토를 벗어내듯이.
시몬은 눈을 부릅떴다.
‘이바노프!’
이반은 그라운드제로처럼 움푹 패여 원형으로 퍼져나간 가운데 자리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다리를 내려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더럽게 아프군.”
다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강하하는 건 렉스가 한 수 위 같았는데, 착지할 때 무슨 노하우 같은 게 있는지 나중에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반은 고개를 들었다. 이 난리에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스테판이 자못 오만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세계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들은 정신없이 그들을 찍기 시작했다.
“스테판.”
스테판은 살짝 턱만 까딱여 인사했다.
“이바노프 씨.”
“네가 스테판이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이런 거겠지.”
“이바노프 씨는 절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너무 탓하진 마세요.”
이반은 필립이 죽고 아일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꽃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ISLE과 접촉하기 시작했지만, 연구팀의 가족까지 만난 적은 없었다.
MCTC로 들어간 렉스는 최대한 ISLE에 관여하는 일을 삼갔기 때문에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스테판, 즉, 리웨이 파웰은 그들이 왔을 때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둘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 이반이 빤히 쳐다볼 때 긴장하긴 했지만.
스테판은 피식 웃었다.
“뭐, 그 유명한 이바노프 씨도 모르는 게 있구나 싶어 조금 고소하긴 했죠.”
하지만 그만큼 그는 모든 걸 바꿨다. 걷는 법, 말투, 악센트, 심지어 식성까지도.
아주 가끔 놀랐을 때 반사적으로 모국어 욕이 튀어나올 때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때 시몬은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어서 이 틈을 타서…….
“움직이지 마세요.”
바로 스테판이 말했다.
“한 걸음이라도 딛는 순간 제 몸속에 있는 게 터질 테니까. 아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조심하세요.”
시몬은 눈을 부릅떴다.
‘저 미치광이가 그걸 제 몸에 넣다니!’
“우리에게 자연은 더 이상 공포와 경외를 주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극복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이죠.”
“네 몸도 말이지?”
무전으로 들은, 그가 대공과 했던 말이 기억난 시몬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오로지 복수를 위해 성전환수술까지 한 이 미치광이가 제 몸을 더 이용하지 못할 리 없다고.
이반은 미간에 심각한 빛이 스몄다.
“내가 막을 수 있다는 거 알잖아.”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바노프 씨도 무사할 수 없을 걸요.”
스테판은 이반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사방을 인식하고 있었다.
폭발물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경찰들이 수신호를 보내 바리게이트를 물렸다. EOD 팀은 이미 출동해 있었지만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격수들이 제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느껴져서라기보다, 당연히.
생체반응이 끊어지는 순간 폭탄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당장 저격하지 않을 뿐이리라.
교회 안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뒷문으로 접근한 SWAT팀의 안내에 따라 빠져나갔다. 이쪽도 무고한 사상자를 내고 싶진 않으니 그건 오히려 권장하는 바였다.
“원하는 게 뭐지?”
시몬이 물었다. 스테판은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겠죠.”
“원하는 게 뭐야.”
시몬은 이를 갈았다.
“이건.”
스테판은 대답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하늘에 내거는 계약의 무지개입니다. 더러운 욕망을, 어떤 의도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더러운 수단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스테판은 똑바로 마드찰란을 보았다.
* * *
연하는 뒤집은 대리석 탁자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임산부만 아니었더라도 좀 더 최전선으로 나갔겠지만, 별수가 없었다. 옆에는 상의를 벗은 정장 위에 얇은 경량화 방탄조끼를 입은 오로스코가 권총을 잡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연하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취직하면서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고는 듣지 못했을 텐데 죄송해지네요.”
“루아스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취직할 때부터 각오는 했습니다.”
오로스코는 바깥소리에 주의를 늦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려니 연하는 난데없는 것이 궁금해졌다.
“ISLE에 취직한 이유가 있으세요?”
“둘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오로스코는 질문을 기다렸던 것처럼 대답했다. 아니면 워낙 자주 듣는 질문인 것 같았다.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약 덕분에 지금 열두 살입니다. 장애도 거의 회복됐고요.”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이 가네샤에서 나왔군요.”
“아뇨. 제노아틱스에서 나왔습니다.”
연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오로스코를 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전통적인 대형 제약회사니까요. 그리고 약 자체가 루아스의 유전자 구조를 기반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을 뿐입니다. 같이 사는 세상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고. 적어도 저희 가족에겐 말이죠.”
오로스코는 쓰게 웃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그런 거거든요. 가족 외에 더 큰 걸 생각하긴 좀 벅찹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연하는 제 배를 보았다가 다시 오로스코를 보고 쓰게 웃었다.
“전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인걸요.”
오로스코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상사님은 더 유난한 경우…… 라고 해두죠. 아무튼 그래도 좀 더 온순한 흡혈귀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제 안에 남은 마지막 정의감이었다고 할까요.”
오로스코는 덧붙였다.
“그리고 애초에 저희 증조부님께서 아일 출신이니까요.”
“ISLE이요?”
연하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ISLE이 그렇게 오래됐던가.’
생각하며.
“아뇨. 회사 말고…… 아, 모르시나 보군요. 예전에 이바노프 클랜이 지냈던 섬입니다.”
“아, 섬 말이군요. 들어봤어요.”
이반이 이야기해 준 적 있었다.
“근데 원래 무인도였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바노프 클랜이 그곳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거둬줬죠. 섬에 인구가 많아지면서 정부도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이바노프 씨가 떠나고 클랜이 와해되면서 주민들도 천천히 섬을 비우게 됐지만요.”
연하는 놀랐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로스코는 더 말했다.
“그래도 추 씨는 계속 아일 출신들을 추적해서 도와주셨죠. 이바노프 씨도 종종 찾아와서 같이 지내거나 도와주거나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민의 후손이라면 ISLE에 무조건 취직할 수 있죠.”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과 뱀파이어는 공존해 왔구나.’
연하는 문득 깨달았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인가, 되기로 선택하는 것인가.
이제야 그 대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하는 문을 보았다. 애초에 군사용으로 설계된 집이어서 단단한 차폐가 내려와 있었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탁자, 옷장, 침대까지 엄폐물로 쌓아두었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잡으러 온 부대는 MCTC일 것이다. 독일 총리 정도라면 충분히 MCTC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었고, 뱀파이어를 잡으러 오는 것은 MCTC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마치 집이 거대한 사일런트 하우스 같이 느껴졌다.
문자 그대로 고요했고, 훈련장 사일런트 하우스에서 수없이 같이 훈련한 MCTC 대원들과 싸우게 됐으니까.
드르륵.
갑자기 문자가 오는 소리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오로스코는 핸드폰을 꺼내 무음으로 돌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그런데 문자 내용을 들은 얼굴이 심각해졌다.
“뉴스를 좀 봐야겠군요.”
그는 천장을 보고 말했다.
“음소거로 뉴스를 틀어줘.”
패널에 화면이 떴다. 연하는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고, 기함했다.
“세상에……!”
뉴스에 이반이 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그를 비추는 카메라 앞으로 경찰들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위치를 잡아 총구를 겨누었다.
기자는 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시는군요.”
오로스코는 정말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연하는 다급하게 일어섰다.
“가야 해요,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