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COMES THE TEMPEST (1)
“이바노프 씨.”
이반은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분노나 노기, 심지어 경멸도.
저 눈을 볼 때마다 시몬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는데도.
예전처럼 그냥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반은 말했다.
“로스. 네가 내게 해야 할 건 사과였어. 단 한 마디라도.”
시몬은 꾹 주먹을 쥐었다.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그러겠지, 너라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투였다. 시몬은 더 오기가 들었다.
“만약 사과를 했다면요? 그럼 절 받아주셨을 건가요?”
“아니.”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잘랐다. 시몬은 거봐란 듯이 말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덧붙였다.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줬을 거야.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쨌든 너도 이바노프였으니까.”
이반은 돌아섰다.
“한때나마.”
시몬은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아니, 흔들리지 마.’
이제 와서 흔들릴 줄 알고.
시몬은 숨을 길게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총리님.”
마드찰란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가 보는 거울에 목례하는 그녀가 비쳤다.
“푸거-들뢰크는 모임에 초대하지 않았더군.”
“ISLE 측에서 접촉한 형제들은 배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ISLE이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라질 경우 바로 낌새를 눈치챌 위험이 있었습니다.”
마드찰란은 넥타이를 다 매고 돌아보았다.
“젊은 녀석이 오래된 가문을 물려받은 자존심이 세서 다루기가 까다로워.”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는 아닙니다. 잘 이야기해 보시면 힘이 돼줄 겁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니까요.”
정 수가 없을 때는 처리하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를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드찰란은 놀란 얼굴이었다.
“시몬. 이번 일은 사고였어. 탐욕이 빚은 아주 불행한 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거해 버리는 학살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실언을 했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정당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자신이 그렇게 믿도록 세뇌시킬 생각은 더욱이.
하지만 마드찰란에게는 선한 의도가 있었고, 스스로도 그렇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독일 국민들 역시 마드찰란의 그런 점을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을 것이다.
약자를 대변하며, 평화를 외치고,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는.
그렇기에 15년째 그를 지지하고 있을 터.
‘선한 목적이 있다면 정당하지 않은 수단이 정당해지는 걸까.’
그녀는 궁금했다.
하지만 100% 감염이 성공하는 뱀파이어 바이러스는 인간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드찰란이 모든 일을 돕는 대가로 그녀에게 요구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결국 형제단은 그에게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철학은 철학자들이 할 일이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시몬은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위를 향해 갈 뿐이었다. 위로, 더 위로. 아무도 그녀를 괄시할 수 없는 곳까지.
마드찰란은 창 너머를 보았다.
“그럼 가볼까. 우리 형제님들 가시는 길을 끝까지 잘 배웅해 줘야지.”
* * *
“감염이 끝난 것 같군요. 목의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침대 옆에 서 있는 연하는 규하를 보았다. 안색은 한결 편안해 보였지만, 규하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왜 깨어나지 않을까요?”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지만 저희도 성공한 감염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없습니다. 실패한 감염이라면 수두룩하게 보았지만요.”
“하지만 저도 이렇진 않았잖아요?”
“상사님은 나흘간 감염을 겪은 경우였죠. 그에 비하면 오히려 희망적이다 싶습니다만…….”
결국은 그도 알 수 없다는 말이기에 말끝을 흐렸다.
침대 반대편에 앉아 있는 렉스는 규하의 손을 잡았다. 규하의 손에는 그녀가 총에 맞는 순간까지 쥐고 있던 예거 연대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삐잉. 삐잉. 삐잉.
갑자기 경고가 울렸다. 다들 흠칫 돌아보았다.
“소장님! 상사님!”
동시에 문이 열리고 오로스코가 뛰어 들어왔다.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지 입가에 스파게티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다급히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포위된 것 같습니다, 저희.”
아무도 진심으로 놀라진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전가옥이 들키는 건 시간 문제였다.
연하는 쓰게 웃었다.
“실장님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다 챙기고 이제 겨우 식사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오로스코는 난감한 듯 웃었다.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먹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섭습니다만. 어떡할까요?”
연하는 렉스를 보았다. 명색이 클리엔테스 서열로도, 계급으로도 그가 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렉스는 오히려 그녀에게 물었다.
“어떡하고 싶습니까?”
연하는 규하를 돌아보았다. 왜인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신 같다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신. 그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논리를 따르지 않는 신. 그 알레고리…….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연하는 버릇처럼 허리춤에 넣어둔 글록을 꺼내 탄창을 확인했다.
“싸워야죠.”
거대한 인과관계의 폭풍 속에서 일개 개인인 그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총을 쏘는 것만은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준비하겠습니다.”
오로스코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렉스는 한쪽에 놓인 검을 들었다.
“소장님.”
연하는 미간을 좁히고 불렀다.
아무리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게 만들어준다 해도 하이마 오메가는 기적의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속은 그대로 만신창이인 상태일 것이다.
“걱정 마세요. 이래봬도 괜히 천 년을 살아남은 건 아닙니다.”
렉스는 방탄조끼를 들어 연하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탄조끼를 보았다.
“모든 대원은 방탄복을 입지 않고 작전에 들어가면 징계……였죠?”
“잘 기억하는군요.”
“국장님 직속 명령이니까요.”
연하는 방탄조끼를 돌려 입었다.
“가죠.”
* * *
종이 울리고, 사방에 웅장한 진동을 퍼뜨렸다. 해질녘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영혼을 인도하는 소리였다.
경호원들이 둘러싼 채 천천히 달려온 차가 교회 앞에 멈추었다.
경호원이 차 문을 열자, 마드찰란이 내렸다.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의장대가 예의를 표하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참모진들이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시몬 역시 미리 도착해서 교회 계단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 공식석상에서 총리를 에스코트할 위치는 되지 못했지만, 이제 모든 건 시간문제였다.
햇빛은 맑고 공기는 차분했다.
이미 세상이 제 것인 것만 같아 쭉 둘러보는데, 교회 입구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들 중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챙이 넓은 검은 카플린을 쓴 스테판이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누가 봐도 장례식에 참석한 여성 손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몬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여긴 왜…….’
조용해지기 전까지 당분간 숨어 있으라 했고, 떠나는 모습까지 보고 왔다.
그런데 미디어에 얼굴이 노출돼서 좋을 것 없는 녀석이 왜 굳이…….
“넌 눈이 멀었어. 욕망할 줄도 모르다가 욕망하는 법을 배우고 신세계를 본 것처럼. 그래서 남의 욕망이 뭔지는 알 생각조차 하지 않지.”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타인의 욕망……. 그녀가 여태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시몬은 스테판을 보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저 녀석의 욕망은 뭐지?’
녀석은 무시무시한 복수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복수는 완성되었다. 제 가족을 죽인 대상의 배후인 형제단을 몰살함으로써.
더욱이 실제로 그 일을 행한 도구, 즉 SN을 와해하고 리더인 대공을 감옥에 집어넣었으니 더 멋지게 복수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스테판은 쓸모가 있으니까, 시몬은 그를 좋지 않게 대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말을 잘 듣는 한.
그런데 왜지? 떠나지 않은 이유는?
‘배후…….’
시몬은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애초에 형제단이 활동할 수 있도록 터를 만든 사람은…….
시몬은 휙 고개를 돌렸다. 총리는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국가 원수답게 자못 침통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얼굴로.
‘마드찰란!’
* * *
“손을 내밀어주십시오.”
이반은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무장한 군인 둘이 그에게 중세의 철제 수갑처럼 두꺼운 수갑을 채웠다.
모양만 구식이지, 개량형 네오카르빈 소재였다. 그것도 이 정도 두께라면 루아스가 된 코끼리라도 붙잡아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반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수갑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떤 형태로든 수갑이라는 것을 차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밧줄이든, 구식 수갑이든, 케이블타이든.
‘이젠 처음 해보는 일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시죠.”
옆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아마 국가정보원 소속일 것이다.
그런데 꽤나 긴장한 상태라고 알 수 있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
어느 쪽이 수갑을 차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남자는 말을 아꼈다.
군인들이 이반을 둘러싸고 수송기에 올랐다. 그를 현장에 두는 일은 불안했는지 가능한 한 빨리 이송시키려는 것 같았다.
“앉으십시오.”
이반은 얌전히 지정해 준 의자에 앉았다.
램프도어가 닫히며 빛이 사그라졌다. 수송기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고래 뱃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동체 전체로 전달되는 소리 가운데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왜 혼자 오셨습니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지켜보던 남자가 갑자기 물었다. 초조함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당신이어도 전부 상대하실 수는 없을 텐데요. 저희도 옛날과는 달라서 충분히 대응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진정하시죠. 상대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니까요.”
남자는 말을 멈추었다. 자기도 모르게 점차 흥분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예거들은 어디 있죠?”
“있어야 할 곳에 있습니다.”
“있어야 할 곳이 당신 옆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결론 내렸는지 옆에 앉아 있는 군인에게 말했다.
“예거들을 쫓으라고 전하십시오. 야크트훈트 소장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반은 그를 조용한 시선으로 응시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입술을 한 번 훑고 다시 물었다.
“총리님을 암살할 의도로 오신 겁니까?”
“나는 총리를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총리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고요?”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하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내가 올 줄 알았는지 절대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요.”
다 뒤집어엎으면서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겠지만, 괜히 인간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총리 앞에 나타나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그럼 찾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답하는 게 어렵진 않습니다만, 그전에 수갑 좀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반은 조금 웃었다.
“어차피 부술 거니까.”
정적이 감돌고, 갑자기 우지끈 소리가 났다. 이반은 수갑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국장 노릇을 해보니 비품 하나도 돈이더군요.”
남자와 군인들 모두 경악했다. 남자는 숨이 넘어갈 듯 외쳤다.
“바, 발포……!”
아니,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수송기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들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서 다른 쪽 벽에 굴러가 처박히는 일은 없었지만, 이반을 겨눈 총구들은 전부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이런.”
이반도 휘청거리며 벽에 걸쳐진 그물을 잡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국가정보원 요원은 다급하게 앞쪽을 보았다. 수송기가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봐! 어딜……!”
“회항합니다.”
조종사는 이반을 보고 말했다.
“아슬아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낙하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낙하산 타고 느긋하게 내려갈 시간도 없습니다. 열어주십시오.”
경고등이 울리며 램프도어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