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92화 (92/104)

92화. 살생부

“인종적으로 비주류 출신에 돈도 뒷배도 없는 젊은 의원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 것 같아?”

타우가는 잠깐 화면을 보았다. 화면에는 로스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었다. 저 화면을 보면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타우가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기적이야.”

이반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막 우리의 존재가 공개됐을 때 ‘흡혈귀와의 공존’ 같은 건 내로라하는 기성 의원들도 정치적인 역풍 때문에 감히 언급 못하던 주제였지. 그런 걸 혼자만 열심히 외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이마가 개발된다던가 하는 그런 기적.”

타우가는 가만히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경청하는 것이었다.

양자인데도 이렇게 렉스를 닮은 클리엔테스일 수가 없었다. 클리엔테스라는 것 자체가 양자이긴 하지만.

“현대의 대중은 별로 피를 좋아하지 않아.”

이반은 계속 말했다.

“전쟁이 더는 귀족 사이의 국지적인 땅따먹기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피해를 입는 건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마가 개발되자 평화를 외치는 그 젊은 의원이 속한 소수당에 표가 쏠리기 시작하는 거야. 젊은 의원은 갖은 선거를 휩쓸고, 그러다 결국 총리에 당선돼.”

이반은 타우가를 돌아보았다.

“기적이 일어난 거지.”

“마드찰란 총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이라크와 유대계 독일인 혼혈이라는 비주류 혈통에, 독일 소수정당인 좌파당의 의원이었다가 돌풍을 일으키며 총리가 된 정치인은 한 명뿐이었다.

프리드리히 마드찰란 현 독일 총리.

그는 전시에 가까운 상황에서 당선된 후 지도력을 입증한 이래 15년째 장기 집권 중이었다.

“그나마도 거기까지였다면 흔한 정치 신데렐라 스토리 중 하나였겠지.”

이반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

“그런데 마드찰란은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었기 때문에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될 가능성이 막혀있던 모국 독일을 비상의장국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지. 그때는 오히려 그가 가진 비주류 혈통이 더할 나위 없는 이점으로 작용했던 거야.”

아무리 전시라도 선뜻 다른 강대국에 파워를 실어주기 꺼려하는 상임이사국들에게 어딘가 무해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이 전후 처리를 잘해왔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그 모든 일이 가능했던 시발점은 하이마의 개발이었지. 하이마가 개발될 거라는 걸 총리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는 신만이 알겠지만.”

타우가도 다시 화면을 보았다. 성명서 발표를 끝낸 시몬이 단상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총리가 모종의 커넥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해도…… 하이마가 개발된다고 인류가 뱀파이어를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을 텐데요.”

이반은 팔짱을 풀고 옷걸이에 걸쳐진 검은 트렌치코트를 꺼내 들었다.

“인생에 어느 정도 도박은 필요한 법이니까. 특히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커다란 도약을 준비하는 경우엔 더욱.”

이반은 코트를 돌려 입었다.

“오히려 그게 유일한 타개책일 수도 있지.”

테이블에 놓인 휴대용 휴지 팩을 안주머니에 넣고 돌아보았다.

“타우가.”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이바노프 씨 말씀은 늘 잘 듣고 있습니다.”

이반은 ‘흠’ 소리를 내었다.

“렉스 녀석 클리엔테스들은 하나 같이 잘 들였단 말이지. 사람 고르는 재주가 있어.”

타우가는 목례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알아?”

이해하지 못한 타우가는 살짝 고개를 젖혔다.

* * *

연하는 믿을 수 없어하는 얼굴로 오로스코를 보았다.

“설마 시몬 뒤에 있는 조력자는…….”

“소장님께서 생각보다 조력자가 높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 생각보다 더 높이 있는 것 같군요.”

연하는 탄식했고, 오로스코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감사가 시작되고, 추 씨에 대한 체포영장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저희라고 그쪽에 커넥션이 없는 게 아닌데, 뭔가 수상하다 싶으니 늦었더군요.”

“하지만 시몬이 죽인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었잖아요. 총리가 왜 자기들 편을…….”

“인간이라고 다 같은 편은 아니니까요.”

연하는 입을 다물었다. 오로스코가 덧붙였다.

“오히려 기회를 틈 타 없애 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겠죠. 거기에 로스도, 스테판도 이해관계가 맞았고요.”

연하는 생각에 빠졌다.

시몬은 인간 권력자들이 한 명이라도 없을수록 자기가 올라갈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없애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스테판은 자기 가족을 죽인 세력에게 복수했고. 하지만 대공은…….

“대공은 아니기 때문에 잘라냈군요.”

연하는 결론을 내렸다. 오로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지만, 대공은 처음부터 장기짝이었을 겁니다. 대공은 제어가 되지 않으니까요. 여태까진 그 녀석이 날뛰는 게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 되니까 날뛰도록 내버려 둔 거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테러리스트가 있는 편이 MCTC 같은 뱀파이어 군부대를 유지시킬 명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기회비용이 더 커졌기 때문에 대공을 무대에서 퇴장시킨 것이다.

연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인간 쪽 전력이 약해지게 만든 총리의 의도가.”

* * *

호텔 창문 너머 합동 장례식이 열릴 교회가 내다보였다.

조문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거대한 교회 주변으로 거의 벽을 치고 둘러서 있을 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미디어에서 모여든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진을 치고 있어 현장은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드찰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검은 양복을 반쯤 입은 모습이었다. 상의는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들고 있는 잔을 대리석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돌아보자,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신을 찬양하는 첨탑이 내다보이는 창 앞에 선 남자는 마치 도회적이고 근사한 남성의 모습으로 화한 사탄 같았다.

“당신은…….”

마드찰란은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말을 꺼냈다. 제 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혼자.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누구인지는, 당연히 한눈에 알아보았다.

“소리치지 않는군.”

창밖에서 들어오는 역광 때문에 그늘에 잠긴 붉은 눈이 이채를 품었다.

마드찰란은 빙긋이 웃었다.

“당신을 상대로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몰라도 말이죠. 이야기에서처럼 박쥐나 그림자로 변할 수도 없을 텐데. 혼자 오신 것은 뜻밖입니다만…….”

마드찰란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네는.”

이반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다음 세상으로 가고 싶은 건가?”

마드찰란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다릅니다. 다음 세상은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루아스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죠. 루아스들은 ‘뛰어난 소수’니까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은데. SN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

비아냥거림이 아무렇지 않은지 마드찰란은 산뜻하게 웃었다.

“뛰어난 육체 능력을 가졌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고, 영원히 사는 존재를 인간이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루아스들도 이런 세상은 너무 낯설어서 추이를 지켜보느라 지금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추가 기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마드찰란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마실 것도 드리지 않았군요.”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는 벽 아래 테이블로 가서 잔에 술을 따랐다. 태연히 등을 보이고서.

이반이 해칠 마음을 먹고 왔다면 등을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의미가 없다고 아는 것 같았다.

마드찰란은 잔을 들고 다가와 건넸다.

“버본이 아주 좋습니다.”

이반은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좋군.”

더는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미각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마드찰란도 제 몫으로 따라온 걸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황을 읽는 것 하나는 재빠른 자들이 다음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주식을 사고, 사업에 투자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들은 다음 세상으로 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마드찰란의 눈에 심각하고 우울한 빛이 고였다.

“그들은 뿌리 깊은 기득권이죠. 노동자들을 착취해 부를 쌓은 공장주의 후손,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약을 판매해 어마어마한 이윤을 거둔 제약회사의 후계자, 섹스스캔들을 일으킨 국회의원, 공금을 착복한 장관…….”

뿐만 아니라 마약 카르텔을 운영하는 마피아, 무기상, 민간인들이 어떻게 되건 신경 쓰지 않고 부족끼리 싸움에 골몰한 군벌,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면죄부 따위를 판 금융가의 자손까지…….

“그들이 루아스가 되어 영원히 다스리는 세상이라니,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반은 잠깐 그를 보았다.

“형제단은 살생부였군. 처음부터.”

함정을 쳐 놓고 사냥감들이 알아서 걸어 들어오길 기다린 것이다. ‘영원한 삶’처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미끼를 걸어놓고.

“자네가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입니까?”

마드찰란은 기다린 것처럼 말했다.

“인간은 선하고 흡혈귀는 악합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그 문제에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선과 악은 학습화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누구에게나 진실은 아닐 테니까요.”

“교묘하군. 그러니 자신의 정의로 타인을 판단하지 말라는 건가?”

“한 가지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고. 도저히 그런 세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니스타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뭔가를 의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니스타르의 존재가 대중에 비밀인 이유는 이런 자의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의 의도나 선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많으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국가의 지도자라는 자가 니스타르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을 내놓고 싶은 유혹에 빠지다니…….

“다만.”

마드찰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로서도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가 모토 아니었습니까?”

흐샤야르샤는 인간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는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로서, 니스타르의 숫자가 적정 수준을 유지하도록 지킬 따름이었다.

니스타르에 대해 어떤 해석도, 믿음도 가지지 않고.

니스타르를 지키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인류에게 유대인들 사이에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를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MCTC였다.

“무엇보다 당신은 모든 걸 버리고 떠나셨다고 생각했는데요.”

마드찰란은 말했다. 이반은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슬슬 평범한 샐러리맨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어서, 특별히 자네들 노는 판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도…… 말이죠.”

마드찰란은 중얼거렸다.

갑자기 벽 패널에 화면이 떴다. 이반의 눈 밑이 조금 움직였다.

멀리서 비춘, 낯익은 안전가옥이었다. 풀로 시야가 가려져 있는 곳에서 병력이 접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해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때 이쪽에서도 문이 열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이반을 포위했다.

이반은 남자들 가운데서 마드찰란을 돌아보았다.

“저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충실한 종이며, 협력자죠.”

마드찰란은 손을 가볍게 맞잡고 말했다.

“인간의 일은 인간들끼리 끝내겠습니다. 그동안만, 얌전히 있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반 이바노프는 오래 전 흐샤야르샤를 떠났다. 흐샤야르샤는 자기 집처럼 멋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가 형제단을 떠날 때도 유대인들은 그 점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따라서 이제 이반 이바노프는 일개 뱀파이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도, 흐샤야르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가시죠.”

남자들이 이반을 밖으로 안내했다. 이반은 저항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시몬이 멈칫했다.

그를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이반은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시몬은 석상처럼 굳어 서 있었다.

그가 옆으로 지나가는 순간, 시몬은 참지 못하고 돌아보았다.

“이바노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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