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91화 (91/104)

91화. 음유시인의 세상

“있군요. 조력자가. 더 위에.”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노아틱스와 SN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

렉스는 말을 멈추고 힘들어했다. 연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다시 침대에 눕게 도와주었다.

“일단 쉬세요.”

“죄송합니다. 하필 이런 때 이런 몸이어서…….”

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반을 지켜주셨잖아요. 이반이 그랬어요. 폭발을 소장님이 먼저 막지 않았더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고.”

“마지막엔 이바노프 씨가 절 끌어당겨 대신 맞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분명히 먼저 뛰어든 건 그였기 때문에 온몸이 터져나가는 거대한 폭발 에너지를 정면으로 맞았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은 불길의 폭풍 속에서, 어깨를 휘어잡는 손이 있었다.

손은 그를 끌어당겨 감싸 마지막 충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천 년 전 불길 속에서 그를 끌어냈듯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 사이가 좋아요.”

연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려는 듯 말했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바노프 씨에겐. 그날 불길 속에서 절 다시 꺼내주셔서.”

입가에 쓴웃음이 올라왔다.

“천 년 동안 말하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렉스는 규하를 돌아보았다. 목에 난 상처를 봉합하는 의사들 사이로 규하는 마치 잠든 것 같았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자칫 쇼크사할 수 있는 엄청난 고통과 싸우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연하가 꾹 그의 손을 잡아, 렉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돌아올 거예요. 감염은 간절한 사람들이 이기는 거니까요.”

“그 말은……. 이바노프 씨가 말씀해 주셨군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뭐가 뭔지 몰라 그저 허우적대기만 했던 저도 감염을 이겼잖아요. 규하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감염을 이기지 못할 리 없어요.”

그도 손 안에 있는 연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요. 돌아올 겁니다.”

이 세계는 믿음이란 게 배신당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또,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얼른 쉬고 회복해 주세요. 규하가 일어났을 때 멀쩡한 모습으로 반겨주셔야죠.”

렉스는 물끄러미 연하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땐 강 상사가 이렇게 믿음직하게 느껴질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이죠.”

연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래봬도 짬이 있는걸요.”

렉스는 피식 웃었다. 둘 다 이런 때에도 웃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규하가 깨어 있었어도 말했을 것이다. 인상 구기고 있다고 뭐가 해결되느냐고.

“쉬세요.”

연하는 그가 쉴 수 있도록 일어났다. 그리고 규하에게로 다가갔다. 볼이라도 한 번 쓰다듬고 싶었지만, 감염에 어떤 영향이라도 줄까 봐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크루즈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이반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기도란 것을 해보았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도라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하는 기도하듯 손을 꾹 맞잡고 애타게 중얼거렸다.

“버텨줘, 제발…….”

* * *

연하는 규하 옆에 홀로 앉아 있었다.

사방은 모든 난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거대한 반원형 벽 패널에서는 느긋한 자연 풍경이 지나가고 있어 방은 꼭 평범한 병실 같았다.

연하는 벽시계를 보았다. 이곳에 도착한 지 20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규하에게서도, 이반에게서도 소식이 없는 채로.

렉스는 깼다가 규하를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어쨌든 휴식을 취해야 회복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계속 잠을 청하게 했다.

연하는 모아 쥔 손 위에 입술을 대었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가장 초조한 건 그녀였다.

‘괜찮겠지, 이반.’

수송기에 오르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작전만 끝나면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또 그 모습이 마지막이라면…….’

연하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이반도 규하도 돌아오지 않는 세상이라면, 그녀는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 이유가 없었다.

꼭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것처럼 모든 인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부모님, 함께 TV를 보며 웃는 소리, 돌이켜 보면 첫사랑이었던 것 같은 고등학교 반 친구, 첫사랑의 눈부신 미소, 푸른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어린 규하, 수학여행에 가서 먹었던 솜사탕…….

그리고 열아홉 그날.

색이 반전된 사진처럼 다른 색감으로 이어지는, 손안에 들어오는 권총의 차가운 감촉, 주변 사람들의 의구심 깊은 눈동자, 어두운 정글을 울리는 음산한 새의 울음소리, 상처 입은 입안에 가득한 자신의 피 맛, 통증, 경멸과 공포가 뒤범벅된 시선…….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규하였다.

규하가 솜사탕의 맛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대로 살아가길 바라서.

연하는 꾹 눈을 감았다.

‘이반, 난 혼자 살아나갈 자신이 없어요. 이런 세상.’

왜 그녀에게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아니, 누구보다도 더 원망했다. 그녀를 경멸하거나 무서워하는 눈들을 보면 외치고 싶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몸이 된 게 아니야.

이제 피를 마시지도 않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난폭한 생각들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상황만 더 악화시키리라고, 변할 게 없다고 알았기 때문에 아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벽 패널이 밝아졌다.

연하는 조금 놀라 돌아보았다. 바람에 풀밭이 흩어지는 풍경이었다.

* * *

“아주 많은 걸 봤어.”

어느 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가 이반이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고향의 풀밭 위로 노을이 내리던 순간 하나가 잊히지 않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든 게 잦아드는 순간 사방에 물씬 내려앉은 공기, 풀 냄새…….”

이반은 머리 뒤에 손을 깍지 껴 받치고 천장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천장이 아니라 눈앞에 어른거리는 고향 풀밭의 풍경 같았다.

“이반, 시인 같아요.”

연하는 정말 감탄해 말했다. 그녀는 엎드려 누운 채였다.

이반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돌아누웠다.

“이 정도로 시인 같다고 하면 좀 부끄러운데. 그래도 뭐,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그런 것도 괜찮았겠지. 음유시인 같은 거. 어쨌든 방랑벽은 충분했으니까.”

연하는 겹친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이반이 가본 데를 이야기해 줘요.”

“내가 가본 데?”

“저 일하러 갈 때 빼고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다닌 나라만 해도 두 손으로 꼽기 어렵지만, 놀러간 건 아니었으니까.

“아일에 가봤잖아?”

“집에만 있다가 왔잖아요. 섬은 둘러보지도 못했는데요.”

“하긴, 거기서는 다른 걸 하느라 바빴지.”

“다른…… 이반.”

뭐였지 생각하다가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반은 웃으며 베개에 고개를 내렸다. 눈에 온기가 감돌았다. 연하는 그의 볼을 감싸고 쓰다듬었다.

다시 봐도 참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생긴 모양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를 보는 시선, 풍겨오는 향기, 맞닿는 살결, 온기, 그 모든 걸 포함해서 ‘아름답다’는 느낌은 배가 되었다.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나’가 지워지고 오로지 이 사람이 좋다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만 남는 것처럼.

한참 키스하며 서로를 탐하다가, 이반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누워 천장을 보았다. 연하는 그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댔다.

“음, 내가 가본 데라.”

이반은 어떤 것부터 이야기해 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듯.

“카파도키아에 갔을 때 처음엔 엄청 놀랐어. 황량한 땅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게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지.”

* * *

마침 패널은 기암괴석이 늘어선 황토 빛 카파도키아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른 풍경들이 이어졌다. 말을 타고 긴 길을 달려가며 보듯.

아름다운 풍경들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겐 뚜렷한 욕망이 없었다. 규하가 무사하고, 좋은 삶을 사는 것 정도.

눈앞에 있는 것에 골몰해 뭔가 더 큰 것을 바랄 여유가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든가, 어떤 불합리한 점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든가.

하지만 바라게 되었다.

‘이반…….’

연하는 패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배에 손을 얹었다.

‘나는 만들고 싶어요, 이 아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인간, 뱀파이어, 그 어떤 존재여도 크게 상관없는 세상……. 당신과 평범한 부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상사님.”

그때, 자동문이 열리고 오로스코가 들어왔다.

뭔가 더 묻기 미안할 정도로 그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넥타이를 풀어낸 와이셔츠와 주름이 예술적으로 잡힌 잿빛 정장바지는 삼 일쯤 야근하고 난 샐러리맨처럼 후줄근한 느낌이었다.

셀레나가 없는 이곳 일은 모두 그가 진두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하는 그가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온 소식이 있나요?”

오로스코는 고개를 저었다.

“이바노프 씨에게선 없습니다. 하지만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뉴스를 틀어줘.”

AI에게 말하자, 패널에 뜬 화면이 뉴스로 바뀌었다. 여성 앵커가 이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국은 ISLE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화면에 셀레나가 경찰에 둘러싸여 차에 오르는 모습이 떴다.

[최고경영자 셀레나 추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긴급 체포…….]

“채널을 5번으로 돌려줘.”

오로스코가 말하자 다른 채널로 돌아갔다.

[커다란 비극입니다.]

연하는 움찔 미간을 좁혔다.

단상에 서 있는 사람은 시몬이었다.

조의를 표하는 검은 정장을 입었으나, 윤기를 발하는 높은 하이힐과 몸매를 드러내는 투피스 정장은 오히려 도발적인 느낌이었다.

[많은 분들이 비명에 간 것에 저희 제노아틱스는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당사는 사태 해결을 위해 어떤 도움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벌써 정치적인 행보를 시작했더군요.”

오로스코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안나 로스가 하려는 건…….”

연하는 패널에서 오로스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치판으로 나가려는 것 같군요. 뱀파이어가 원래 인간이었다는 명제가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와닿을 수가 있나요?”

* * *

이반은 니트를 끌어내렸다. 근육으로 된 갑옷을 입은 것 같은 몸이 검은 니트 아래로 사라졌다. 소파에는 그가 막 벗은 제복이 늘어져 있었다.

막 나오는 화면에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한참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반은 돌아보았다.

“타우가.”

타우가도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입은 사복차림이었다.

타우가도 규하를 만나기 전 렉스처럼 워커홀릭이어서 그가 제복을 벗는 모습을 보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타우가 팀은 따로 렉스를 구출하러 갔었기 때문에 오히려 달아나기가 수월했다.

“연하네는?”

“무사히 안가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로스코 비서실장님이 모시고 간 것 같더군요.”

“그래? 다행이군.”

오로스코는 ‘유능한 애 옆에 유능한 애’ 같은 느낌이라 그나마 셀레나가 없어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전가옥 자체가 오래 버티기는 힘들 터였다.

이반은 팔짱을 끼고 화면을 보았다.

“타우가.”

“네.”

이반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인종적으로 비주류 출신에 돈도 뒷배도 없는 젊은 의원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 것 같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