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90화 (90/104)

90화. 반격

렉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당장 규하의 목을 물어 피를 빨았다. 그리고 몇 번 마시기 무섭게 고개를 들고는 날카로운 이로 제 손목을 거의 씹어 먹듯이 뜯어냈다.

바로 규하의 입안으로 피를 흘려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계속 그녀의 얼굴에, 목에, 몸에 피를 짜내 부었다. 단숨에 피로 흠뻑 젖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피의 비를 맞으며 규하는 파르르 눈을 떨었다.

“버텨.”

볼을 쓰다듬는 렉스의 손이 떨려왔다. 그럴 힘만 있었다면 안쓰러워 붙잡아주고 싶을 정도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돌아와.”

붉은 눈이 일렁였다. 빙글빙글…… 붉은 옷을 입은 무희가 그 눈 속에서 춤추는 것처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연하가 숨을 삼키고 말했다.

“누가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해준다 해도 따라가면 안 돼.”

억지로 참고 있지만 목소리가 잔뜩 젖어 있었다.

연하는 드러나게 떨리는 얼굴로 웃었다.

“거짓말일 테니까.”

규하는 웃는 것 같았다. 온통 피범벅이라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걱정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인 줄 아느냐고─

규하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쿵 하고 철문이 내려닫히듯이.

연하는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렉스는 남은 한 팔로 그녀를 안았다. 연하는 그에게 안겨 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모두 울었다.

* * *

거울에 여자가 비쳤다. 한 갈래로 머리를 올려 묵었고, 몸매를 드러내는 투피스 정장을 입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당당했다.

“드무스티에 씨.”

거울에 그녀가 돌아보는 모습이 비쳤다.

뒤에는 고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버킹엄 궁전의 응접실 같은 공간이었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남자는 문이 열려 있는 쪽으로 손짓했다. 시몬은 그를 따라 고동색 원목 느낌이 나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침착하고 우아했다.

시몬은 정중하게 목례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창가에 서 있는 남자가 돌아보았다.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눈에 띄었다.

“딱 적당한 때에 돌아왔어.”

* * *

대공은 하늘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망할……. 역시 안 되네.”

한 팔과 두 다리가 날아갔고, 배에는 검이 똑바로 꽂혀 있었다. 너무 아파서 어디서부터 아프다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적당히 좀 하지.”

사실 플러스 천 년이라는 어드밴티지가 없었다면 이 정도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었을 때부터 그는 전사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이반은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이바노프 씨.”

그때 한 예거가 다가와 무어라 말했다. 이반의 미간이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소식을 들었군.’

대공은 웃었다.

“너희들만 인간을 써먹을 줄 아는 건 아니거든.”

물은 바늘구멍만 있어도 스며들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 발의 총알은 강연하라면 몰라도 약하디 약한 인간의 가슴은 뚫을 수 있었다.

‘이 경우엔, 목인가.’

사실 정말 진심으로 도망가려 했다면 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이바노프를 이곳에 잡아놓기 위해서였다.

그가 저쪽 현장에 있었다면 너무 쉽게 끝나 버렸을 테니까.

“그래서, 어때? 결과는? 누가 죽고, 누가 살았지? 그건 나도 좀 궁금…….”

그런데 갑자기 이반이 휙 하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증원이 온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네? 무슨…….”

옆에 있는 예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다가 무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 귀를 짚으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깐 듣더니 이반을 보았다.

“후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반은 돌아보았다.

“이바노프 씨를 체포하기 위해 오는 것 같습니다. ISLE에 대한 대규모 감사가 시작됐습니다. 이 시간부로 직위가 해제되고 대기발령 상태로 전환되셨습니다.”

이반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그 이상 반응은 없었다.

“본사에도 병력이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대공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힘을 주자 아픈지 ‘아야야’ 소리를 냈다.

“시몬 녀석, 제법 하잖아. 한 번에 털어버리려고 여태 벼르고 있던 거였어.”

이반이 보자, 대공은 씩 웃었다.

“나까지 같이 털어버리려고 하는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정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니까.”

“이바노프 씨.”

예거가 초조한 듯 불렀다. 이반은 돌아섰다.

“타우가에게 피하라고 전해.”

“어이, 난 이대로 두고 가는 거야?”

대공이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까지 그를 잡아놓고 데려갈 수 없는 이유를 알면서 조롱하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내내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 * *

셀레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상기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그였다.

“어서 병원으로 이송하세요. 수습팀을 부르고…….”

“추 씨.”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데, 한 비서가 핸드폰을 건넸다.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로스코 비서실장님입니다.”

셀레나는 핸드폰을 건네받았지만 막 가연을 실어가는 응급차를 보느라 시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막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려는 찰나,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터가 두 개 달린 치누크 CH-51 헬기, ISLE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헬기가 폭풍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추 씨!”

이미 열려 있는 문에 오로스코 비서가 매달려 있었다. 뒤에서 헬기 승무원이 몸을 잡아주고 있었다.

목소리는 핸드폰에서 터져 나온 건지, 그가 외친 육성인지 알 수 없었다.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대규모 감사가 시작됐습니다! 추 씨에 대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됐고요!”

오로스코는 다급해서인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정장 상의와 넥타이,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흩날렸다.

“이바노프 씨는 예거들을 데리고 현장에서 바로 몸을 피하신 것 같습니다!”

연하는 흠칫했다. 그녀가 당장 물어보려는데, 셀레나가 먼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대공은 어떻게 됐습니까?”

“붙잡았답니다! 로스는 달아났고요!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셀레나는 바로 연하를 돌아보았다.

“가세요.”

“하지만…….”

셀레나는 말씨름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막았다.

“두 분은 절대 저쪽 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바노프 씨가 움직이실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저도 지금 잡혀가면 두 분을 돌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셀레나가 손짓하자, 의료팀은 바로 규하를 들것에 싣고 렉스를 부축해서 헬기에 올랐다.

급박하고 혼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료팀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고,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연하는 그 모습을 보았다가 셀레나를 보았다.

“그럼 셀레나 씨도 같이 가요.”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장님과 상사님은 아무리 죄목을 가져다 붙여봐야 명령불복종 정도입니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소장님은 최대한 ISLE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놓지 않았으니까요.”

그와 렉스 사이에 스캔들이 터지긴 했었지만 그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였다. 어떤 확실한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는, 단순한 추측성 기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시간부로 저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피의자 신분입니다. 제가 같이 달아나면 오히려 병력을 보낼 빌미를 주는 게 돼버립니다.”

반박할 수 없어진 연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장인 렉스의 권한이 정지됐을 정도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몸까지 이런 상태여서야.

“가세요, 어서. 두 분이 안전해야 저희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거 잊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죠?”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출발하세요.”

연하를 포함해 일행 모두 헬기에 올랐다. 먼저 헬기에 올라 앉아 있는 렉스가 셀레나를 불렀다.

“셀레나.”

셀레나를 신뢰해서인지 그는 평소처럼 침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걱정과 우려가 뒤섞인 눈빛은 어쩔 수 없었다.

“무사해야 합니다.”

셀레나는 웃었다.

“제가 언제 우리 파트로네스님을 실망시켜 드린 적이 있던가요?”

철컹.

문이 닫히자마자 헬기는 지체하지 않고 떠올랐다.

연하는 창 너머로 아래를 보았다.

하나의 도시 같은 거대한 ISLE이 금세 작아졌다. 그리고 정문에 국가정보기관과 특수진압경찰 차량들이 달려와 셀레나 일행을 포위하는 모습이 보였다.

셀레나 일행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연하는 꾹 이를 물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이런 무력감은 12년 전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결국 강한 육체 능력으로는 눈앞에 있는 벽을 때려 부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렉스가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의사에게 말했다.

“하이마 오메가가 있습니까?”

“소장님, 그건……”

연하가 말하려 했지만, 렉스는 의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의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있긴 합니다만 안정성 문제가…….”

“상관없습니다.”

의사는 연하를 한 번 보았다. 그녀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하이마 오메가 케이스를 서랍에서 찾아와 ‘Xenoatix’ 이름이 쓰인 밀봉을 뜯었다. 그리고 주사기를 꺼내 렉스의 팔에 놓아주었다.

상황이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하는 말릴 수 없었다. 렉스도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걸 제가 쓰게 될 줄은 몰랐군요.”

주사기 속 액체가 팔 안쪽으로 스며들어 가는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갑자기 렉스가 나직이 말했다.

“Omne ens est bonum, quatenus est ens…….”

연하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라틴어인가요?”

“아우구스티누스 교부께선 ‘존재하는 한 모든 사물은 선하다.’고 하셨죠.”

렉스는 연하를 보았다. 부상 때문에 신열을 띤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과연 그렇습니까?”

* * *

옅은 비상등만 켜 있는 어둠에 불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부호의 별장 같은 커다란 방에 시끄러운 기척들이 밀어닥쳤다.

“여기! 이쪽으로!”

의료팀이 규하가 누워 있는 이동식 침대를 끌고 들어오고, 이어서 휠체어에 앉은 렉스를 데리고 들어왔다.

“조심해!”

“거기 드레인!”

의료팀은 두 팀으로 분산되어서 각자 규하와 렉스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규하 팀은 휴대용 대신 안전가옥에 준비된 장비들을 연결하고, 렉스 팀은 그를 침대로 올려 응급 처치했던 상처들을 다시 치료했다.

방은 순식간에 응급실을 방불케 하는 의료 현장으로 바뀌었다.

연하는 방해되지 않도록 모든 의료팀이 들어가고 나서야 들어왔다. 그리고 이 안전가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느라 바쁜 오로스코를 붙잡고 물었다.

“이반과 연결이 가능한가요?”

오로스코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어디로 피신하셨는지 파악이 되지 않고, 자칫 위치를 파악당할 수 있습니다. 연결은 정말 비상시에만 가능합니다.”

“이곳으로는 오시지 않을 겁니다.”

연하는 움찔 돌아보았다.

“소장님.”

렉스가 산소마스크를 씌우려는 의료 대원의 손을 밀어내며 일어나 앉았다.

“시선을 분산시켜야 할 테니까요.”

“그럼 이반이 미끼가 된다는 의미잖아요.”

“어쨌든 저쪽은 저보다 이바노프 씨를 잡고 싶을 테니까요. 제 힘의 기반은 중앙사단입니다. 상부에서 명령만 내리면 쉽게 묶어둘 수 있죠.”

그나마도 예거들 대부분을 이반이 데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저를 붙잡는 데는 그리 다급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몬이 어떻게 MCTC에 명령을…….”

연하는 멈칫했다.

“있군요. 조력자가. 더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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