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에피알테스#
“기회는 이 순간뿐입니다. 기꺼이 다음 세상으로 가실 분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었다. 사실 욕망을 내려놓고 이 자리를 걸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보내줄 의향도 있었다.
어디 한 번 나가봐.
그렇게 말하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시몬은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영생의 문 앞에서 돌아설 리 없다는 것을.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양손에 생사의 카드를 쥔 신이 된 기분이었다. 이때 환희만으로도 절정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가져와.”
탕.
한 남자가 마침내 결심한 듯, 혹은 자신의 호기와 결기를 증명하듯, 탁자를 내려쳤다.
시몬은 뒤에서 기다리는 연구원들에게 고갯짓했다. 연구원 둘이 그에게 다가가 옷소매를 걷게 했다.
남자는 얌전히 하란 대로 하면서 시몬을 보았다.
“확실한 거겠지?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된다면……. 알지? 내 경호원들은 모두 뱀파이어들이야.”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루아스를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부자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거의 루아스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부터.
“물론이죠.”
하지만 이 조병창에 SN 대원들이 얼마나 포진해 있는지 모르니까 저런 순진한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줘요.”
몇 테이블 건너 앉아 있는 한 여자도 나섰다. 주저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눈으로 돌아보며.
“뭘 주저하고 있는 거람? 다들 여기 돈 엄청 쓰지 않았어요?”
여자는 시몬을 날카롭게 보았다.
“하지만 일 처리가 미흡한 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꼭 이런 급박한 상황을 연출해야겠어요?”
“깊이 사과드립니다. 다음부터는 더 만족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몬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 순간에는 거의 진심으로.
설마 그녀가 그들을 몰살하는 엄청난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순진한 오만함에 대한 경배에 가까웠다.
호기로운 행동은 전염성이 있기 마련이었다. 두 사람이나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체면, 용기, 혹은 자신만 도태될까 하는 두려움에 모두 가져오라 외쳤다.
정말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몬은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 없는 웃음이라도 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더러운 욕망 덩어리들을 굳이 자신의 형상까지나 따서 만든 그에 대한 비웃음 소리를.
연구원들이 각 사람들 앞에 섰다.
“고통은 잠깐일 겁니다.”
정말로, 잠깐일 것이다.
‘영원한 잠은 달콤할 테니까.’
바이러스, 실제로 독약에 불과한 것은 천천히 주사기에서 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스테판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입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두 죽여.”
시몬은 깊이 웃었다.
연구원들이 물러섰다. 사람들은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저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 의심스러워하는 사람, 흥분한 것 같은 사람, 불안해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감정의 전시장 같은 곳을 쭉 둘러보는데, 한 연구원이 그대로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물러나지 않고.
“거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시몬이 묻자, 다들 그쪽을 돌아보았다. 연구원은 불안한 시선을 뒤로 던졌다. 그 아래로,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총이 보였다.
시몬은 미간이 조금 움직였다.
“비켜.”
테이블 주인이 겨누고 있는 총을 옆으로 흔들었다. 연구원은 얼른 물러났다.
테이블에 앉은 건장한 남자는 말레이시아의 건설회사 사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마피아였지.’
속이고 사기 치는 데 도가 튼 뒤쪽 세계 인간들은 의심이 너무 많아 주무르기 힘들기 때문에 이번 일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어쨌든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포섭할 수 있는 자들이고.
그런데 손을 씻은 옛 마피아가 하나 섞여 들어왔던 모양이다.
남자는 총구를 내리지 않고 일어났다.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구린 냄새가 나는 건 선의로도 넘어가 줄 수 없어서 말이야.”
시몬은 물끄러미 남자를 보았다.
“그런 의심이 당신을 지금 그 자리에 올려놓았겠죠.”
“바로 봤어. 다들 정신이 나갔군. 이딴 수상한 이야기를 믿다니. 안 그래도 인맥에 좀 도움이 될까 해서 참여했는데, 흡혈귀 여자 하나가 하는 말 따위를 믿고…….”
거기까지 말한 남자의 머리가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남자 뒤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루아스가 글라디우스 길이 정도 되는 검을 올려친 자세로 나타나 있었다.
쿵.
피가 솟구치며 남자의 몸이 무너졌다.
주변에 있는 모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이게 무슨……!”
다들 웅성이며 시몬을 보았다. 시몬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드무스티에!”
갑자기 한 여자가 제 목 부근을 짚었다.
“느낌이…… 이상해.”
그녀는 두 번째로 바이러스를 달라고 했던 여자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예쁜 얼굴 하나로 성공한 여배우가 되었다가 여러 뷰티 사업을 성공시킨 여류 CEO였다.
그녀는 영원한 삶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원했으리라.
여자는 날카롭게 시몬을 보았다.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 거야?”
여자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그냥 덥기만 한…….”
여자는 토기가 치미는 듯 입을 막았다. 그리고 겨우 손을 떼고는 다급히 말했다.
“이상해. 그만두겠어. 해독제…… 해독제를 내놔.”
여자는 테이블을 밀어 쓰러뜨리고 시몬에게 다가갔다. 시몬 뒤에 서 있는 루아스들이 바로 앞으로 나와 여자를 막아섰다. 여자는 거의 황당한 것 같았다.
“드무스티에!”
시몬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해독제를 내놓지 못해!”
여자는 루아스들을 제치며 다가오려 했다. 루아스들은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드무스티에!”
여자는 거의 악을 썼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투피스 정장에 보기 싫은 얼룩이 지고 있었다.
쯧쯧……. 하필 하얀 옷을 입고 와서.
한가롭게 생각하는데, 시몬은 갑자기 미간이 움찔했다.
“드무……스티에!”
여자가 루아스들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루아스들도 눈에 띠게 당황했다. 다급하게 온 힘을 다해 여자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루아스가 된 삼손 같았다. 순식간에 눈가가 퀭하게 패인 창백한 얼굴로 붉은 눈물을 흘리면서 괴물 같은 힘을 발휘했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여자는 얼굴에 혈관이 단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퍽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동시에 온 구멍에서 핏물을 안개처럼 뿜어냈다.
그대로 뒤집어쓰는 순간 시몬은 눈을 감았다.
쿵 소리가 났다.
다시 눈을 뜨자, 여자는 온몸에서 피를 뿜어낸 것 같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쓰러져 죽어 있었다.
미인이었는데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 여자와 같은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 있는 사람들도 곧 쓰러져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금세 정적이 찾아왔다.
시몬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한 번 닦고 스테판을 돌아보았다.
“스테판.”
스테판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빛 때문인지 좀 창백해 보이긴 하지만 일반 사람이라면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 같은 모습을 목격하고도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가 원한 대로 아주 피비린내 나는 복수였다.
“프로토타입입니다. 보다시피 부작용이 심하죠. 어쨌든 바이러스를 맞고 죽은 걸로 돼야 하니까요.”
“쓸데없이 과한 연출이야.”
스테판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지금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시몬은 밖으로 나섰다.
간이건물의 어스름한 복도를 지나자 밤하늘 아래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어두운 산등성이 아래 간이건물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고, 가운데 헬기장 식별 표시가 그려진 곳에 헬기가 대기 중이었다.
그 앞에 SN 간부 둘과 함께 서 있는 대공이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비명 소리가 크던데.”
“일은 차질 없이 끝났습니다.”
시몬은 그를 지나가며 말했다.
“수고했군.”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치하의 말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듣기 나쁘진 않았다.
“그럼 가죠.”
“그래.”
시몬은 갑자기 돌아섰다.
“저 혼자요.”
바로 그녀 뒤에 있는 대원들이 테러리스트의 무기라는 AK-47 소총을 개량한 MK-47을 겨누었다.
대공은 제 뒤에 있는 SN 간부 둘을 흘긋 보았다. 간부 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서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넘어갔군.”
대공은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간부 둘은 목례하고 말했다. 대공은 다시 시몬을 보았다.
“하긴, 배신자는 너였지. 안나 로스. 예상 못한 건 아냐. 설마 이렇게 진부한 흐름일 줄은 몰랐지.”
대공은 대원들이 겨누고 있는 소총을 눈짓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물론이죠. 당신을 막으려면 특수부대 한 대대쯤은 필요하겠죠.”
시몬은 빙긋이 웃었다.
“그건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고요.”
사방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는 이미 듣고 있었다.
“그럼 여태 감사했습니다.”
시몬은 돌아섰다.
“시몬.”
대공이 불러, 시몬은 흘긋 돌아보았다. 흩날리는 바람 가운데 대공은 묘하게 차분해 보였다.
“넌 눈이 멀었어. 욕망할 줄도 모르다가 욕망하는 법을 배우고 신세계를 본 것처럼. 그래서 남의 욕망이 뭔지는 알 생각조차 하지 않지.”
“의외군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목적을 위해서 세상까지도 갈아 넣으신 분이 아니었던가요? 결국 실패하셨지만.”
대공은 꾹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시몬은 훗 웃고 헬기에 올랐다. 스테판을 포함한 모두가 따랐다.
헬기는 순식간에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대공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달아날 수 있는 황금시간대는 놓쳤고, 이번에는 마르코프도 없었다. 지금쯤 아랫것들은 제 목숨 건지기도 바쁠 것이다.
‘어차피 달아날 생각도 없지만.’
그때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밟고 다가오는 조용한 발걸음.
대공은 돌아보고 입술을 늘어뜨렸다.
“이반 이바노프.”
이반은 어둠을 벗고 나왔다. 그 뒤로 예거들이 어둠에서 하나둘 떠올랐다. 하나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하얀 얼굴을 하고 있어 저승사자의 군대 같았다.
이반은 멈춰 섰다. 그리고 대공 뒤에 웅크린 짐승 같은 간이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 뒤쪽에서 잠입한 팀들이 돌입했는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걸 보니 한발 늦은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대공은 빙글거리며 말했다.
“맞아. 한발 늦었어. 안타깝군. 머리가죽이 벗겨지도록 날아왔을 텐데 말이야.”
한 예거가 아직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지 조용히 성호를 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반은 검을 잡았다.
스르릉.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검이 마치 우짖는 것 같았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아?”
“날 이기면 보내줄 수도 있어.”
절대 그런 일은 없다는 투였다. 대공은 푸, 볼을 부풀렸다가 숨을 뿜어냈다.
“재수 터지네. 형아를 존경하라고. 어디 기원전 4세기 생밖에 안 되는 게?”
“안 그래도, 넌 그 정도 살면 이젠 숨 쉬기도 귀찮을 것 같은데.”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때는 그랬지. 다 그만둘까 했는데, 수천 년간 똑같이 밭 갈고 소 치던 녀석들이 갑자기 재밌는 짓들을 벌이기 시작하더라고. 한동안은 그거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지.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정말 재밌다 못해 충격적이었어.”
그로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그 수많은 과학 발명품들…….
정말 오랜만에 진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났다.
대공은 씩 웃었다.
“그리고 진짜 재미는 이제야 막 시작됐지.”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별로, 네가 이제라도 개과천선하길 바라진 않았어.”
직접 상대해 줄 셈인 것 같았다.
대공은 진하게 웃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겐 너보다 천 년의 시간이 더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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