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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87화 (87/104)

87화. 꽃의 짐승

스테판 블란두스.

그는 블란두스 일가가 흡혈귀 그룹의 테러로 사망한 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였다.

하지만 그는 경찰 조사에서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리 물어도 그 대답뿐이었다. 전문의는 ‘강한 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해리성 장애’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ISLE에서 파견된 후견인 대리인과 ISLE 법무팀 소속 고문 변호사가 스테판을 데려가려 했지만, 그는 뱀파이어인 둘에게 극도로 히스테리를 나타냈다.

너무 난동을 부려서, 그 앞에서는 뱀파이어의 비읍 자도 꺼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스테판은 보호시설로 보내졌고, ISLE에서는 인간으로만 구성된 팀을 보내 꾸준히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스테판은 완고했다.

“꺼져! 더러운 흡혈귀들!”

TV 패널에 뱀파이어라는 글자만 나와도 패널을 깨부수어 버릴 만큼, 청년은 분노와 증오로 무장하고 있었다.

ISLE은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데려와 봤자 상태만 더 악화시키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일단은 그를 보호시설에 맡겨두고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스테판은 보호시설을 탈출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ISLE은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스테판은 마치 연기가 되어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부랑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슈퍼마켓 CCTV에 찍힌 것이었다.

그녀도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시몬은 그때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 스위트룸 앞에 나타난 여자를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누구라고?”

“스테판 블란두스입니다. 아실 텐데요?”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알아. 하지만 내가 아는 스테판 블란두스는 남자인데.”

이런 얼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테판 블란두스는 동서양 혼혈이 아니었다. 블란두스 부부는 둘 다 백인이었으니까.

스테판은 안쪽을 가리켰다.

“좀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혼자였고, 어쨌든 여전히 인간이긴 한 것 같았다.

“들어와.”

그녀는 옆으로 비켜섰다. 스테판은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팀은 꽃에 대해서만 연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스테판은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말했다.

“어떤 유전자가 뱀파이어를 영원히 살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연구하셨죠. 거의 초기 단계였고, 목적 자체는 시한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거였지만요.”

“그래서?”

시몬은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스테판의 이야기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셨습니까?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아니. 내가 묻는 건 왜 나한테 이런 정보를 들고 왔느냐, 그거야. ISLE에 가지 않고.”

솔직히 스테판이 가져온 건 매우 솔깃한 이야기였다. 너무 솔깃해서 다소 수상하다 싶어도 덥석 물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일단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ISLE은 물러터진 흡혈귀들의 집합소니까요.”

스테판은 태연히 말했다.

“피 대신 마실 수 있는 꽃? 인간과의 공존? 도대체 흡혈귀라는 괴물들이 할 말은 아니죠.”

그는 흡혈귀 앞에서 이야기하면서도 단어 선택에 거침이 없었다. 독기가 바짝 오른 느낌이었다.

“아마 날 앉혀놓고 차 한 잔 끓여 와서 어머니를 생각해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나 하겠죠.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복수입니다. 아주 피비린내 나는 복수.”

스테판은 빙긋이 웃었다.

“다 죽여 버릴 거니까요.”

스테판은 바로 다음 순간에 웃음을 거두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히려 기괴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때 시몬은 스테판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껍질을 뚫고 태어난 괴물적인 본성.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본래 모습임을 알았을 때 밀려오는 해방감─

단지 차이는 그녀는 정말 자신을 제한하던 인간의 껍질을 벗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따라와.”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헬기를 타고 대공이 머물고 있는, 지금까지도 부족 군벌끼리의 전쟁이 극심해서 연방정부군도 섣불리 들어갈 수 없는 정글 속 저택으로 데려갔다.

이 지방을 꽉 잡고 있는 것은 형제단원인 군벌이었다.

대공은 그녀가 데려온 스테판을 보자 물었다.

“뭐야? 그 인간은.”

별로 관심은 없지만 한 번 물어봐 준다는 투로.

“스테판 블란두스입니다.”

대공은 그 이름 자체를 모르는 얼굴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시몬은 덧붙였다.

“쿨리시다이닌을 발견한 박사의 아들입니다.”

“아, 그 스웨덴 여자 말이군. 그런데 아들?”

대공은 스테판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려고 뛰어들었나?”

대공은 여전히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인종에 성별까지 바꿔 나타난 녀석을 보고는 그도 어떤 ‘인간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폰을 아무리 쳐봐야 킹은 잡을 수 없죠.”

스테판은 말했다.

“상대 킹을 붙잡는 가장 쉬운 방법은, 킹을 둘러싸고 있는 상대 폰들을 이용하는 거죠.”

“체스에 그런 룰은 없을 텐데.”

대공은 그때까지도 무심히 말했다. 스테판은 그 무엇도 올려다보지 않는 오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현실에 룰이란 게 존재하나요?”

대공은 한참 가만히 있었다. 시몬은 건방진 인간 녀석의 목이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대공은 씩 웃었다.

“이건 쓸모가 있겠어.”

* * *

“솔직히 말하면 네가 배신할 줄 알았어.”

대공이 앞을 보며 말하자,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스테판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전 누군가를 배신한 기억은 없는데요.”

“실제로 너희 가족을 죽인 건 SN이니까. 말은 번드르르하게 해도 감정에 휘둘릴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성전환수술까지 감행한 각오를 무시한 건 아니지만, 인간은 인간이니까.

4년간 함께 지내면서 정을 붙인 강연하와 함께 ISLE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휴지 없인 볼 수 없는 거대한 휴먼드라마라도 하나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자신보다 좀 더 제정신이 아닌 녀석일 줄이야.

스테판은 태연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효율적이지 않은 일이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방향도 목적도 없는 증오를 흩뿌리고 다녀봤자, 진짜 배후가 살아 있는 한 당신들 같은 도구는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라는 거였지.”

대공은 기가 찼다.

“요즘엔 흡혈귀를 무서워하는 인간이 없단 말이야.”

스테판은 훗 웃었다.

“흡혈귀도 자연의 일부니까요. 우리에게 자연은 더 이상 공포와 경외를 주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극복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이죠.”

“네 몸도 말이지?”

스테판은 싱긋 웃었다. 경직된 얼굴로 짓는 미소가 괴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의 몸으로 갖는 관계도 제법 할 만하거든요.”

대공은 가차 없이 소름끼친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와, 씨발. 무서워.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어머니 말씀이 삼천 년 만에 와닿네.”

대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옛날이 그리울 수가 없어. 옛날엔 한 번 소리치기만 해도 울고불고 도망갔는데 말이야.”

대공은 앞을 보았다. 패널에 시몬이 경호원으로 가장한 SN 대원들과 연구원들을 데리고 어떤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 * *

“뒷일은 우리에게 맡길 셈이었군, 스테판.”

이반은 심각한 눈으로 말했다.

“저희가 제노아틱스와 SN을 그대로 둘 리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셀레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이런 방식이 그 인간들이 한 짓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스테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아마, 함께 갈 셈이었다.

모두가 올려다보는 성벽 위에서 적군의 머리를 잘라 보이고, 스스로도 뛰어내림으로써 만천하에 공표할 셈인 것이다.

악한 수단의 말로를.

“이 새끼가 진짜…….”

셀레나는 꾹 주먹을 쥐었다.

중2 천재병도 적당히 하란 말이야.

“사실 마음 같아선 다 죽어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지만…….”

셀레나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들의 자식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 거겠죠.”

“꽃 같은 보드라운 걸 먹고 사시는 분이 그런 험악한 생각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오로스코는 조금 차갑게 말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저희가 당신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결코 공포를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끝까지 공존의 약속을 놓지 않겠다는 당신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셀레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 강한 눈이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협약을 맺었습니다.”

오로스코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기민한 자들이 그 사회적 협약을 빠져나가기도 하고, 협약의 그늘이 느슨해 때로는 불합리해보일지 몰라도, 협약은 지켜져야 합니다. 아니면 협약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들은 제 이빨로 제 뿌리를 파먹는, 육식성의 파괴적인 동물들.

한 철 왔다 가버리는 한해살이 식물들. 하지만 대를 이어 지치지도 않고 또 피고, 또 피어나는 꽃들.

마치 꽃과 같은 짐승들.

“가죠.”

셀레나는 빛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우리 소장님 기다리다 지쳐서 혼자 탈출하시겠어요.”

수많은 발걸음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여자, 남자, 인간, 뱀파이어…….

햇빛이 저 멀리까지 내뻗어 있는 활주로를 화사한 손길로 훑었다.

사방으로 검은 사람들이 각 수송기에 오르고 있었다.

이반을 기다린 듯 가까이 있는 예거들 중 거의 자주색을 띤 붉은 눈을 가진 아시아인, 개중에서도 몽골인에 가까워 보이는 남자가 규하를 돌아보았다.

수색 작업을 마치고 막 귀환한, 렉스의 두 번째 클리엔테스였다. MCTC 중앙근위사단 제 1예거 연대 휘하 다섯 개 대대 중 첫 번째 대대의 대대장 타우가 중령이었다.

검은 마스크 위로 붉은 눈동자가 진중했다. 렉스처럼.

“꼭 소장님을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규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도 목례하고, 수송기에 오르는 예거들에게 합류했다.

이반은 연하를 돌아보았다. 로터 블레이드가 일으키는 바람이 불었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이, 그는 손을 뻗었다. 연하의 뒷머리를 감싸고, 키스했다. 연하는 눈을 감았다.

계단 앞에 나타난 검은 리무진에서 그가 내린 순간이 불과 몇 개월 전 겨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공기에서 여름의 냄새가 났다.

다음 여름이 오면, 그들은 셋이 될 것이다.

아니, 넷, 다섯…….

수없이 많이.

다음 여름은 아주 아름다울 것이다. 그 여름을 향해, 수송기는 폭풍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 * *

시몬은 빛으로 나아갔다.

주변으로는 서커스를 구경하려고 모인 것처럼 사람들이 각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선 하나 같이 부의 냄새가 흘렀다. 유산에 의한 부, 운에 의한 부, 재능에 의한 부, 적법하지 않은 수단에 의한 부…….

시몬은 서커스를 시작하기 전에 소개하는 단장처럼 목례했다.

“오늘 여러분을 급히 모신 이유는,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희의 숙원사업이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시몬은 옆으로 손짓했다. 문이 열리고, 스테판이 걸어 나왔다.

“저희 수석 연구원인 스테판 블란두스 박사입니다.”

스테판은 가운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를 따라 나온 남자들이 테이블에 서류케이스를 올려놓고, 열었다. 밀봉된 수상한 통이 놓여 있었다.

“모두 아시죠?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해주신 마리에테 블란두스 박사님의 장남, 여러분과 함께 한 걸음 더 진일보할 세상을 위해 힘을 보태준 재원이십니다. 박수를 보내주세요.”

여자의 모습을 한 스테판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지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시몬은 손을 내리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애석한 소식은, 이 정보를 입수한 정부군이 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테판 뒤 화면에 무인정찰기가 촬영하는 것 같은 하늘이 떴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듯이 보이는 항공부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한 대에서 미사일이 날아와 무인정찰기를 덮치고 화면이 꺼졌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역시 그랬군.”

개중 한 남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한 놈이 스파이였어. 어딘가로 급히 연락을 취하더라고. 하늘에서 던져 버렸지. 믿었던 녀석인데.”

그는 몰랐겠지만, 크게 시몬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말에 설득력을 만들어준 셈이니까.

시몬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정부군에 압수되면 언제 다시 이 같은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어떤 법이 적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이미 영원히 사시게 된 분들께 그런 건 사소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기회는 이 순간뿐입니다. 기꺼이 다음 세상으로 가실 분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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