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86화 (86/104)

86화. 동전과 물

“그럼 들어가십시오, 의원님.”

입구에 일렬로 서 있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한 몸처럼 깊이 허리를 숙였다. 중년 사내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운전기사가 문을 연 차에 올라탔다.

차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자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내 참 아니꼬워서. 개새끼 같으니. 에라, 벼락이나 맞아라.”

한 남자가 침을 뱉고는 건물로 들어갔다.

한편 차에 타고 있는 중년 사내는 푹신한 좌석에 몸을 묻고 눈을 감고 있다가 밖을 보았다.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이쪽 방향이 아니잖아.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고 입을 열었다.

* * *

거울을 보며 투피스 정장에 어울리는 진주 목걸이를 찼다. 멀리 방으로 식사를 가져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차 한 잔 가져다줘.”

한참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 하고 있는…….”

드레스룸을 나간 여자는 멈칫했다. 가정부가 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도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그녀가 제 뺨을 때렸던들 이만큼 황당하진 않았으리라.

“정신 나갔어? 지금 뭐 하는 거야?”

가정부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 * *

하인리히는 꺼진 화면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식사가 도착했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이어서 현대적인 제복을 입은 선남선녀들이 카트에 코스 요리를 가지고 들어와, 그가 앉은 두꺼운 목제 테이블에 세팅했다.

“집사람은?”

“식사 생각이 없으시다고…….”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아내가 식사를 하러 올까 봐 걱정이었으니.

세팅이 끝나고 막 포크를 집으려는데, 요리사가 테이블에 앉았다.

감히 누구도 하지 않는 행동이라, 하인리히는 그를 의문이 담긴 눈으로 보았다.

집사가 펄쩍 뛰면서 기겁했다.

“자, 자네 미쳤나? 당장 일어…….”

하인리히가 손을 들어 집사를 막았다.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100% 감염이 성공하는 뱀파이어 바이러스? 그런 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요리사는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하인리히는 잠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0년 이상 이곳에서 일한 수석 요리사인 걸로 아는데.’

요리사는 코웃음 쳤다.

“로스가 여러분을 끌어들여 벌이고 있는 짓은, 면죄부를 팔면서 ‘동전이 궤짝에 짤랑 하고 떨어지면 영혼은 그 즉시 천국으로 간다.’#고 선전하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그의 가문이 중세에 교황청 대리로 면죄부를 판매했던 금융가 푸거 가의 방계인 점을 들어 비꼬는 것이었다.

익숙한 비아냥거림이 새삼 뼈아프진 않았지만……. 확실히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여러분은 순진하게도 그 소리에 넘어가 로스가 멋대로 설치고 다닐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말이죠.”

요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거절하기엔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겠죠, 영원한 삶이란. 게다가 윈윈 게임이었죠. SN이 날뛸수록 루아스 관련 약품을 파는 제노아틱스의 주가는 오히려 치솟으니. 1-1이 꼭 0이 되리란 법은 없는 이런 묘한 사회 시스템은 대체 누가 고안해 낸 걸까요?”

하지만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요리사는 바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여러분을 협박해서 일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쨌든 저희가 원하는 건 공존이니까요.”

“이미 협박하고 계시군요.”

요리사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저희가 다른 수가 없어서 지금 여러분을 말로 설득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의 곁에만 감시를 붙여놨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형제들의 신상은 철저히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는 빙긋이 웃었다.

“이런 게 협박이죠. 이 모든 건 차선책이었을 뿐입니다. 끝까지 사용하지 않을 패였을 수도 있죠. 저도 십년쯤 되니 계속 이쪽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더군요. 일단 안정적이어서.”

‘하지만 결국 사용했다는 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말.’

그로서는 그 변수가 연하의 임신이라는 건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제대로 본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드무스티에도 머리란 게 있다면 그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변했지.’

문밖의 수상한 인기척보다 반항적인 눈빛이 도는 개가 더 경계심을 일으킨다고 모르는 걸 보면, 어린 가정주부일 때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개의치 않거나.

소위 그 잘난 육체 능력이라는 걸 믿는 것 같았다.

‘위험하지만 태만한 짐승.’

과연 그녀 스스로 흡혈귀에 대해 잘 정의했다고 생각했다.

흡혈귀는 지구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함께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은 세월이 없었다는 걸 보면, 배운 점이 있을 텐데 말이지.’

개체가 적었다거나, 호전적인 본성 때문에 자기들끼리 싸움을 반복하느라 그랬다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런 변명이 통하는 세상이었다면 소국들이 거대한 제국을 무너트리고 세계의 패자가 된 일도 없었을 것이다.

튼튼한 몸뚱이란 콜로세움에 섰을 때나 진정으로 인간에 비해 유리한 것 아니겠는가?

하인리히는 말했다.

“드무스티에를 내드리죠.”

그들은 더 이상 철이 아니라 물 같아야 했다.

물처럼 어디든 스며들 수 있고, 매끄럽게 흐르며, 파괴적인 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해야만 이 울퉁불퉁한 욕망들의 땅을 뒤덮어 지배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 개발이 늦어지겠지만, 다행히 그는 아직 젊었다.

‘인간의 시간도 생각보다 긴 법이니까.’

“역시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리사는 일어나 방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인간인 것 같군요.”

요리사는 무심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분법으로는 재단하기 힘든 세상이죠.”

* * *

“절 해고하신다고요?”

형제단 대변인을 맡은 남자는 웃는 얼굴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긴 시간을 드렸지만, 여태 아무런 성과가 없군요.]

“저는 하이마를 개발하는 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당신들을 돈방석에 앉혀 드렸죠.”

시몬은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말했다.

[덕분에.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약간 도를 넘으신 느낌이 드는군요. 저희는 ISLE과의 어떤 충돌도 원하지 않습니다.]

시몬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뒤에 있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핵을 준비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이바노프는 절대 당신들을 감염시키는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바이러스 개발은 물론이고.”

그 말에만은 동의하는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웃음은 잃지 않았지만.

시몬은 좀 더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당신들은 인간의 껍질을 벗고 나오고 싶은 것 아니었나요? 그래서…….”

[당신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요.]

남자는 말을 끊고 말했다. 내 말을 끊지 마, 라고 외칠 뻔했다.

[우리는 인간이길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닙니다.]

시몬은 멈칫했다.

[영원히 인간이고 싶은 거죠. 바로 거기에 당신과 우리의 절대적인 차이가 있죠.]

남자는 끝까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은 영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화가 끊겼다.

시몬은 그대로 죽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공은 다 들었을 텐데도 무심한 얼굴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시몬은 땅을 돌아보았다.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땅은 천천히 젖어들고 있었다. 저 멀리 검은 구름이 일었다.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군대 같은 검은 구름 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때 어두운 문 쪽에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공은 돌아보았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스테판.”

시몬은 나직이 말했다. 스테판은 가짜 눈처럼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샴페인을 준비해. 드디어 우리는 오늘 새로운 지평선을 열 테니까.”

지평선 너머에서 폭풍의 왕이 울부짖고 있었다.

* * *

“추 씨!”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격납고로 뛰어 들어왔다.

셀레나는 돌아보았다.

사십대 중반쯤 되는 서양인 남자는 ISLE 최고경영자 비서1팀의 오로스코 비서실장이었다.

그 뒤로는 전 비서실이 다 온 것 같은 많은 직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이반과 연하도 안쪽 방에서 나왔다.

“저희, 뛰어야겠는데요.”

오로스코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로스가 그쪽 형제단을 소집한 것 같습니다. 형제단원들 대부분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답니다.”

다른 비서가 급히 덧붙였다.

“측근으로 동행한 저희 측 감시자들 소재도 파악되지 않습니다. 연락을 다 끊게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 좌표가 인도 아그라 상공입니다.”

셀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네. 형제단을 소집했다는 건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 바이러스를 완성했거나, 모조리 몰살해 버릴 셈이거나.”

일단 전자는 가능성이 없었다. 루아스 배아도 얻지 못했고, 이후 연구를 진행할 만한 시간도 없었으니까.

“협력자들을 제 손으로 없애는 건데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인간 협력자들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면요?”

오로스코 비서실장은 오래 전부터 합리적인 의심을 품어온 것처럼 말했다.

“생각해 보면 로스 뒤에는 SN이 있습니다. SN의 궁극적인 목표가 뭡니까?”

“인류를 없애는 거죠.”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뱀파이어들이 굳이 그런 걸 원할 이유가 있을까요? 인간들이 다 죽어버려서야 지배할 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꾼다고 하기에는, 그냥…… 그건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건 세대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층의 세대교체.”

셀레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럼 처음부터 목표는…….”

“예. 인간 권력자들이었겠죠.”

오로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비서가 말을 이었다.

“육체적인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학살해 버리면 편하겠지만, 역성혁명에도 대의명분은 필요하니까요. 저희 인간들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우리 편 권력자들을 학살하고 공포로 지배하려는 자들을 받아들이겠어요?”

“뱀파이어들도 역사를 보고 배운 점은 있었겠죠. 특히 그 역사를 살아나온 장본인들이라면.”

그들끼린 이미 토의를 끝낸 이야기인지, 오로스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 권력자들에게 피해자 이미지를 입힐 수는 없었겠죠. 하지만 지상에서 얻은 권세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삶까지 꿈꾸다가 수상한 바이러스 같은 걸 맞고 집단 자살한 인간들을 어느 누가 그리워하겠습니까?”

“이제 알 것 같아요.”

연하가 중얼거렸다.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다. 연하는 비장한 눈이었다.

“리웨이…… 아니, 스테판이 제노아틱스와 SN에 협력하는 이유.”

셀레나도 깨달았다.

그건 아마 자신들의 욕망과 권세를 위해, 제 가족이기 전에 인류의 보물이었던 영웅을 죽인 근시안적인 욕망덩어리들에 대한 천벌─

욕망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귀들에 대한 심판.

인간이 인간인 한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할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효시.

셀레나는 신음처럼 말했다.

“어머니를 죽인 진짜 배후에게 복수하려는 셈이군요.”

바로 형제단.

SN을 사주해서 블란두스 박사를 죽이고 연구 자료를 강탈한 건 그들이었으니까.

* * *

“아 참, 이 말을 드리는 걸 잊었군요.”

식어가는 요리를 보고만 있었는데, 요리사가 돌아왔다. 하인리히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영생은 모르겠지만, 오래 사시겠군요. 운이 좋으신 걸 보니.”

“덕담은 감사합니다만……?”

갑자기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하인리히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로스가 오늘 형제단을 소집했더군요.”

하인리히는 심각해졌다.

“저한테 알리지 않고 말입니까?”

요리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방이 폐쇄된 요새라는 건 적군에겐 강하지만 지름길을 알고 있는 배신자에겐 취약한 법이죠. 유명한 명언에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리사는 흘긋 그를 보며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아니면 마크 트웨인의 말대로 ‘그대로 반복되진 않아도 그 운율은 반복된다.’고 해야 할까요?”

# 중세의 수도자 테첼이 면죄부를 팔면서 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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