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TAKE OFF
“두 분.”
막 움직이려는데, 셀레나가 불렀다. 연하와 이반은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위치로 돌아가고, 연하와 이반, 규하, 셋만 남았다.
셀레나가 다가와 말했다.
“알아봤는데, 특정 가계에 가임 능력이 있다지만 그것도 문제가 좀 있네요. 생겨도 유산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에요.”
연하는 흠칫했다. 그런데 걱정 말라고 이야기하듯, 이반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이반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뭐든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연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유는 몰라요. 태가 너무 강해서인지, 약해서인지, 아니면 뭐가 안 맞는지. 뱀파이어의 임신능력이란 게 의외로 연약한 모양이에요.”
“그런…….”
“그래서 걱정하시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러니까 상사님이 루아스라는 사실을 한동안 잊어버리세요. 평범한 임산부처럼 먹고, 걷고, 행동하세요.”
“그러니까 그 의미는…….”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사님은 작전에 참여하실 수 없다는 의미에요.”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규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참여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셀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둘이 죽이 잘 맞는 느낌이었다.
“잘 아시잖아요. 작전에 나갔는데 상사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면요?”
연하는 잠깐 생각했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인 이야기였다. 저번에는 리웨이가 준 비타민을 가장한 약 때문에 기절했지만, 정말 몸 상태가 나빠져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알았어요. 작전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게요.”
“왕자님을요.”
“네?”
“우리 사모님, 뱃속에 계신 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셔야죠.”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연하는 당황해 중얼거렸다.
“사, 사모님…….”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성별은 아직 모르지 않아요?”
“그냥 느낌이요.”
셀레나는 빙긋이 웃었다.
“왕국은 후계자가 필요하니까.”
듣고 있던 이반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ISLE은 네 거야. 줬잖아.”
“네? 하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 너밖에 없었어. 당연히 네 거지.”
셀레나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반은 조금 혀를 찼다.
“그리고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철지난 발상은 왜 하고 있는 거야? 역시 너도 남자라서 그런지…….”
연하와 규하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뭐라고…….
“남자?!”
연하와 규하는 동시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거대한 격납고가 울릴 정도로.
셀레나는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오, 굉장히 쌍둥이 같은 반응…….”
두 사람은 셀레나를 위아래로 정신없이 훑었다.
아니, 키는 물론이고, 목소리도 허스키했고 뼈대가 굵다고는 생각했다. 어깨도 벌어진 편이고.
하지만 인간이어도 인종에 따라 이 정도로 파워풀해 보이는 여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생각하진 않았다.
“이거 원조는 저예요.”
셀레나는 싱긋 웃고는 여성적인 동작으로 풍만한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스테판이 아니라. 절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닐까 싶다니까요. 아,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 100% 자연 그대로니까.”
그 말은…….
연하는 치마를 입은 셀레나의 하반신을 쳐다보았다. 이반이 그녀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어딜 봐?”
“아, 저도 모르게…….”
연하는 머쓱해하고, 규하는 손을 내저으며 가버렸다.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거야.”
연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
‘아, 취임식 때 소장님이 그래서…….’
상당히 복잡한 표정이었지, 셀레나가 애인 아니냐고 말했을 때.
클리엔테스이기 전에 남자라고 말도 못하고 얼마나 속 끓는 심정이었을지, 새삼 미안해졌다.
‘하지만 역시 남자라기엔…….’
너무 경국지색이라고 해도 좋은 미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지, 셀레나가 물었다.
“왜요?”
“예뻐서요.”
간만에 필터 없는 본심이 나왔다. 셀레나는 웃었다.
“감사해요.”
“그럼 그 가슴은 뭐예요?”
연하는 호기심을 느끼는 아이처럼 풍만한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셀레나는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건 보형물 패드예요.”
“진짜 같네요.”
“촉감도 진짜 같아요. 만져 보실래요?”
“만져 봐도 돼요?”
연하가 당장에라도 손을 뻗을 태세라, 이반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만져 보지 마.”
그리고 셀레나를 보고 엄하게 말했다.
“너도 놀리지 마.”
“놀리는 거였어요?”
연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셀레나는 이반을 보고 씩 웃었다.
“우리 상사님 매력이 이런 거였네요.”
‘아, 남자 얼굴.’
연하는 생각했다. 역시 남자는 남자구나 싶었다.
“추 씨. 이글아이(공중조기경보통제기)#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때 한 프로그래머가 불러, 셀레나는 그쪽으로 갔다.
“잠시만요.”
연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려 있는 문 너머 햇빛이 비쳐 드는 격납고는 각자 할 일을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지만 묘하게 평화로웠다.
“이반.”
연하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불렀다. 이반이 그녀를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데 환멸을 느껴 떠났었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이 살아나온 시간은 헛된 게 아니었어요.”
연하는 돌아보았다.
“사는 걸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이 먼 시간이 지나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가 어느 순간 사는 걸 포기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변수를 뚫고 그들은 이곳에 함께 서 있었다.
이반은 연하의 손에 키스했다.
“나야말로 감염을 이겨내 줘서 고마워.”
그러고는 조금은 짓궂게 덧붙였다.
“강 선생 때문이었겠지만.”
연하는 뭔가 생각하듯 눈을 위로 올렸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모르죠. 그때 이반을 얼핏 보고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이반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정말?”
연하는 손을 올려 이반의 턱을 쓰다듬었다.
“수염도 섹시했어요.”
이반은 제 턱을 쓰는 손을 잡고 불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셀레나,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패널 앞에 서 있는 셀레나는 돌아보고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10분 정도 있어요.”
충분하다는 듯이 이반은 연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반!”
연하는 깜짝 놀라 부르고, 뒤에서 셀레나가 소리쳤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신다는 거 잊지 마세요.”
사람들이 전부 능글거리는 눈으로 돌아보는데, 연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반은 격납고 한쪽에 있는 작은 회의실 같은 방으로 연하를 데리고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틈새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이…….”
부르려는데, 이반이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어.”
“그랬어요?”
연하는 조금 놀랐다.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으니까. 포기하고 있었달까……. 기대도 하지 않았지.”
사실 연하는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루아스는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냥 ‘그렇구나.’ 하는 생각 정도뿐이었다.
이반을 만난 뒤로도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던가 생각해 볼 새가 없었고.
하지만 아이를 가졌음을 알았을 때, 기뻤다.
“전 혹시 제 멋대로 가져 버린 건 아닌가…….”
이반은 그녀를 조금 떼어내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보았다.
“넌 날 위해 기적을 일으켜 준 거야.”
솔직히 연하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그녀가 그를 위해 성모마리아급의 기적이라도 일으켜준 줄 알았다.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까지 가능한 건가─ 조금은 멍하니 생각하고 말았다.
실제로는 가임이 가능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건 기적이었다. 가능하리라고 차마 믿지 못했던 기적.
“미안해.”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뭐가요?”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반도 테러를 당해서 어쩔 수 없었던…….”
“감염되고 나서.”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이반은 말했다.
“내가 파트로네스 노릇을 제대로 했다면 네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연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파트로네스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원망도 하지 않았지만, 만약 파트로네스가 있다는 걸 알았고 그가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그녀는 그를 원망했을까?
어쩌면.
하지만 그날들은 지났고, 영원히 사는 뱀파이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혼자 설 수 있었어요. 이반 같은 파트로네스가 옆에 있었다면 어리광을 피울 줄밖에 몰랐을 거예요.”
연하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반도 매일 질질 짜는 열아홉 짜리한테 기가 질려 버렸을걸요.”
이반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어둠에 잠긴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사랑해요.”
연하는 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정말 참으려고 했는데…….”
이반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손길을 느낀 연하는 그를 밀어냈다.
“안 돼요, 이반. 밖에 다 들릴 거예요. 게다가 여기 루아스들이 많아서…….”
지금 이 대화도 다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이…….”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로 연하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밖에 있는 셀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늦바람이 더 무섭다더니.’
“자, 그럼.”
셀레나는 돌아보았다.
“우리 인간 형제님들 쪽은 어떻게 됐나요?”
* * *
[저희 가족이 전부 죽을 뻔했다는 걸 인지하고 계시는 겁니까?]
화면 너머 하인리히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시몬은 태연했다.
“미리 모셔오도록 사람을 보내지 않았나요?”
그날 갑자기 나타난 남자들은 그들 가족을 반강제로 구명보트에 태워 크루즈를 떠났다. 그리고 구명보트가 뭍에 닿기도 전에 폭발이 일어났고.
안 그래도 성격이 예민한 아내는 그 일로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이 정도 트랩이 아니면 이바노프가 걸려들 리 없어서요. 양해 부탁드리죠.”
하인리히와 대공이 동시에 현장에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면 이바노프는 이미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목숨이라고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우는 소리라니.
‘생각보다 간담이 작은 모양이군.’
시몬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하인리히는 그녀를 잠깐 보다가 말했다.
[일이 성공했다면 넘어갈 용의가 있었습니다만.]
시몬은 무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예 핵을 준비했어야 한 모양이었다. 늙은 것들이 몸만 질겨서.
그때, 소리가 들렸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넓은 앞마당 같은 공간에 헬리콥터가 내려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대공이 내려섰다. 시몬은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군요.”
“사과 한 마디는 하지?”
“진심이 아닐 걸 알면서도 듣고 싶으신가요?”
대공은 특별한 감흥은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다지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넌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군.”
시몬은 훗 웃었다.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이걸로 비긴 셈 치죠. 당신은 멋대로 제 걸 가져갔고, 대가로 저도 당신 걸 가져갔다고.”
시몬은 손을 내밀었다.
“다시 시작해 볼까요?”
대공은 치우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군.”
대공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이제야 좀 제대로 된 파트너 느낌이네. 사랑 타령하고 있을 때보다.”
동의하는 바였다. 왜 남자 따위에 목을 매고 있었는지, 그녀는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시몬은 어둡고 광막한 대지를 돌아보았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잠들어 있는 땅은 그녀가 정복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시몬 드무스티에입니다.”
시몬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다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AEW&C, Airborn Early Warning & Control, 공중조기경보통제기의 별칭. 원래는 피스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