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84화 (84/104)

84화. BRAVO, BRAVO THIS NEW WORLD

규하는 창 앞에 서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잉.

뒤에서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났다.

“저거 비싼 건데. 하여간 전 드라마틱한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니까요.”

대신 아이들을 배웅하고 온 셀레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레나가 옆에 다가왔다.

“왜 의기소침해 있어요?”

“흡혈귀들을 미워했어요.”

규하는 바깥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내 가족을 뺏어갔으니까. 그런데 주변인들이 흡혈귀인 걸로 밝혀지면서 ‘흡혈귀여도 어쩔 수 없잖아.’ 생각해 버린 제가 얄팍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도시는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일까 신기했다.

구성원 중 단 하나라도 욕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텐데, 그 덩어리들이 얽히고설켜 이런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미워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면서, 멋대로 미워했던 것 같아요.”

셀레나도 잠깐 같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아이, 뱀파이어한테 어머니를 잃었다고요.”

“가연이요?”

가연은 이 견학이 무척 인상에 남는 것 같았다.

원래 호기심이 많고 개방적인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감을 활짝 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느라, 거의 셀레나에게 매달려서 이것저것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절 전혀 무서워하지 않더군요.”

셀레나는 한 허리에 손을 짚고 도시를 보았다.

“공통조상 ‘루아’를 인류와 루아스로 분화시킨 미지의 X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X가 흔히 하는 말로 외계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구 생성 초기라고 해도 좋은 아주 옛날 일이고, 우리는 계속 같이 이곳에 있었죠.”

규하는 셀레나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공존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요. 이 모든 혼란과 반목, 증오, 지금은 어쩔 수 없을지 몰라요.”

셀레나는 규하를 보았다.

“다음 세대는 바뀔 거예요. 진정한 변화, 부딪히고 갈등하며 결국 합일로 나아가는 정반합은 그때 일어날 거라고, 그런 세상이 올 거라고 믿어요.”

보랏빛을 띠는 붉은 눈동자가 도시의 빛을 받아 묘한 빛을 품었다.

“소장님은 그 청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그래서 다들 말려도 인간과 손잡으셨죠.”

셀레나는 조금 웃었다.

“우리 소장님이 인간일 때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인 구석이 있거든요.”

셀레나는 다시 도시를 보았다. 도시는 지평선 끝까지 내뻗어 있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와버렸는걸요. 많은 의혹과 의심이 올라오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규하는 입술이 떨려왔다.

“보고 싶어요. 렉스가…….”

규하는 입가에 댄 손에 반지를 쥐고 있었다.

사냥꾼의 표식인 화살 문양이 각인된 예거 연대의 반지, 지나가 경찰에 이송되어가기 전 건네주며 말했다.

“걔가 이거 전해주라고 해서 왔어요. 경찰에 잡힐까 봐 애들 사이에 숨어서 온 거고요.”

* * *

화면은 흔들렸다. 손으로 들고 찍는 것 같았다.

온갖 생명유지 장치를 달고 누워 있는 렉스는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치료는 되어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규하가 거의 울음을 터뜨리듯이 탄식하며 얼굴을 손에 묻자, 옆에 앉은 연하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규하는 연하에게 안겨 떨면서 중얼거렸다.

“좆같은 새끼. 장으로 담가 버릴 거야.”

주변에 있는 모두 그 섬뜩한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영상을 꺼줘,”

셀레나는 AI에게 말하고 일어났다.

“아이들에겐 대공 녀석이 직접 접촉한 모양이에요. 외모는 비슷한 나이대니까 의심하지 않았다더군요.”

화면에 사진이 떴다. 일전에 이반이 보았던, 요트에서 내리는 SN의 사진이었다. 오로지 대공만 이쪽을 보며 웃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대체 저 새ㄲ, 새가 바라는 게 뭐예요?”

규하는 이 와중에도 급히 된소리를 탈락시켰다.

‘이제 와서 의미가 있나.’

연하는 생각했지만 역시 별말은 하지 않았다.

“녀석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습니다.”

이반이 말했다.

“번성하던 이집트와 히타이트를 포함해 여러 나라가 멸망한 원인이 된 바다 민족# 중 하나인 룩카 출신이라는 정도.”

“그럼 청동기 시대 아니에요?”

규하는 기가 막혀 말했다.

“태생이 전투 종족이죠. 정말 인류의 악몽이라고 해야 할지…….”

셀레나는 쓰게 웃었다.

“아무튼 역사에도 바다 민족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 워낙 없어서 정확한 출신지역이나 생몰연대는 불분명해요. 생김새나 가끔 쓰는 단어 같은 걸로 룩카 중에서도 아나톨리아(현재 터키) 쪽 출신이라고 추측할 뿐이죠.”

모여 있는 사람들은 다시 사진을 보았다.

확실히 대공의 외모는 묘했다. 서양인으로도, 동양인으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둘 다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현대 터키인 같지도 않았다.

규하는 이마를 감싸 쥐고 심각한 눈으로 사진을 보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맞죠?”

“호모 사피엔스는 30만 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이반이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말했겠어요?”

규하는 이반을 타박했다. 왜 이렇게 농담이 안 통하느냐는 듯이.

셀레나는 이반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연하는 이렇게라도 규하가 기운을 낸다면, 이반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괜찮았다.

다행히 이반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맞지만, 유효한 지적일 겁니다. 녀석은 늪에서 태어났으니까요.”

“늪이요?”

화면에 무언가가 떴다. 이번에는 어디선가 발췌한 것 같은 글귀였다.

“이건 블란두스 박사님의 수제자이자 현재 블란두스 연구소 소장님인 프리츠 홀스트 박사님이 얼마 전에 발표한 ‘The X’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블란두스 박사님 서거 이후 연구 결과를 모은 책이죠.”

사람들은 모두 화면을 보았다.

<태초, 머나먼 은하 너머에서 온 한 줄기 빛이 불모의 혹성에 도착했다. 그곳이 진정한 목적지였는지, 아니면 사고로 불시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X’는 자아나 생각을 가진 생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유기체였음에도 불구하고 ‘X’는 불모의 혹성에는 영양분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이 기생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았다.

처음에는 자갈이었고, 바위였고, 용암이었고, 바다였고, 그리고 종내에는 그 바다 속에 녹아 있는 유기물이었다.>

“이 ‘유기물’은 이후 인간으로 진화하죠.”

이반이 말했다.

“생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희가 논의할 사항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지구의 지물에 ‘X’가 녹아 있었다는 점이죠. 최초의 흡혈귀들은 이 원시 형태의 X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들입니다. 현대 흡혈귀들의 원형으로 봐야 하죠.”

셀레나가 덧붙였다.

“이 원형들은 남아 있지 않아요. 아마 공룡이 멸종한 이유와 같거나, 혹은 공룡을 멸종시킨 이유였겠죠. 어쨌든 지물에 있는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로 남아 있지 않고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죠? 늪에서 몇 천 년 전 미라가 썩지도 않은 채로 발견됐다는.”

늪 사진이 떴다. 특정한 장소의 사진이라기보다 이해를 도와주는 일반적인 이미지 같았다.

“쉽게 말씀드리면 자연의 보관소 같은 늪의 특수한 화학작용 때문인데, 그래서 늪에는 X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반은 다시 사진을 보았다.

“녀석은 그 늪에 빠졌고, X에 감염되어 흡혈귀로 되살아난 걸로 보입니다.”

규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바닥은 어떻게 된 게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 있었다.

“바다 민족 시대에 말이죠.”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바노프 씨를 감염시킨 흡혈귀도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모두 이반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반을 감염시킨 흡혈귀도 늪에 빠졌다가 그곳에 남아 있는 X에 감염됐을 거라고요?”

연하가 물었다.

“아마도요. 일단 이바노프 씨가 감염되었던 그 지방 자체가 원래 늪지대가 많은 곳이었죠. 그러니까 이바노프 씨를 감염시킨 흡혈귀도 자신이 뭐가 된 줄 몰랐겠죠. 아마 늪에 빠졌다가 이상한 병 같은 거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특히 고대에는 신에 대한 심성이 깊었으니까 일종의 신병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반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빠졌다.

아마 그를 감염시킨 흡혈귀는 죽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정말 늪에서 태어났다면 제 파트로네스라고 할 수 있는 그 흡혈귀에게도 파트로네스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이 됐는지 알 수 없었겠지.’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내내 시달리다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을 것이다.

한때 그 역시 잠깐이지만 고려했듯이.

어쨌든 그 흡혈귀가 죽어 없어진 지금 모두 가설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퍼즐이 맞았다. 일부러 자살하려는 것처럼 그에게 덤벼든 것이나, 앙그라 마이뉴 이야기를 한 것이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날 그를 공격한 흡혈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반은 고개를 들고 막 말하려는 셀레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바노프 씨를 감염시킨 흡혈귀도 늪의 X에 감염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임 능력 때문이에요.”

이번에는 모두 연하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현대 흡혈귀들은 백이면 백 가임 능력이 없어요. 유일한 예외는 늪의 X에 감염된 경우죠.”

셀레나는 덧붙였다.

“아마 최초의 흡혈귀들은 인간처럼 생식할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진화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쓸 일이 없다고 여겨져서 퇴화됐거나……. 그건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늪의 X에겐 남아 있는 거죠, 원형의 능력이.”

연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럼 혹시 대공도……?”

규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깨달은 얼굴이 되더니, 손으로 입을 막았다.

“토할 것 같다.”

“그건 모르겠어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제 몸을 이용하지 않고 이바노프 씨와 상사님을 노렸던 걸 보면 예외일 수도 있고…….”

그건 특별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셀레나는 계속 말했다.

“아무튼 기준이 되는 ‘원형’이 있었기 때문에 100% 감염이 성공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아이디어도 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녀석이 무엇을 원해서 바이러스를 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요. 서로 탁 까놓고 물어볼 사이가 아니라서.”

침묵이 감돌았다. 어쩐지 사람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이반을 보았다.

주변으로 격납고는 분주했다.

그들이 모여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저 너머, 신호수가 군대 선두에서 깃발을 내저으며 진군을 알리는 기수처럼 힘차게 깃발을 내저었다.

그 몸짓에 따라 격납고 문밖으로 거대한 수송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 가운데, 이반은 조용히 말했다.

“침략자는 늘 있었고, 내 쪽이 침략자인 적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아.”

좌중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단호한 위엄에 넘쳤다.

“하지만 마을에서 살 셈이라면 따라야 할 규칙이 있어. 그 규칙을 어긴 녀석의 사정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아. 처형대 위에서 정상참작은 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 그는 정말로 제왕이었다. 잠깐 옛 모습이 나온 것처럼.

셀레나는 격납고 문밖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햇빛이 비쳐 들었다.

“그럼, 구하러 가보죠. 우리 소장님.”

# 기원전 13세기를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 말까지 동아나톨리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이집트를 침략한 호전적인 해양 민족의 총칭. Encyclopedia 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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