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이의 뺨을 쳐라.
대공은 바닷물을 헤치며 해변에 올라섰다.
그가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거대한 자루 같은 것이 끌려 올라왔다. 그 아래로 모래를 헤치고 끌려가는 자국이 이어졌다.
푸른 바다와 초록 식물, 붉은 토양이 어우러진 낙원 같은 섬에 인기척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적당한 공간이 있는 해변에 헬리콥터가 돌풍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대공은 코웃음 쳤다.
“그렇게 터뜨려 놓고 미안하긴 했나 보군.”
정규군으로 보일 만큼 제대로 무장한, 아무 마크가 없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뛰어 내려왔다. 이어서 일반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렸다.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회사원 같은 느낌이었다.
대공은 그가 건네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자가 희고 고운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이건 뭡니까? 시체…… 입니까?”
대공은 티셔츠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보기 좀 그렇지만 살아 있어.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나름 수확은 있었던 셈이네. 참, 이바노프는? 살아 있지?”
“아직 사망 정정 기사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솟아나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야크트훈트 소장은…….”
남자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모래에 파묻힌 것을 보았다. 대공은 이죽이며 웃었다.
“사냥개 고기는 어떻게 요리해야 하려나?”
남자는 감출 새도 없이 섬뜩해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웃겼던지 대공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헬리콥터로 갔다.
“마르코프는 어떻게 됐습니까?”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당연히 죽었지. C-4를 그렇게 두르고 있었는데. 아직 어린 녀석이라서 그 정도 물리력은 감당 못 해.”
대공은 역시 심상하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갔다.
그래도 수백 년간 유일하게 곁에 두었던 걸로 아는데, 기르던 개가 죽은 것보다도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타고난 악당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는 차마 제 손으로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는, 모래에 파묻힌 소장을 보다가 군인들에게 손짓했다.
* * *
규하는 급히 신분 확인 개찰구를 나갔다.
미래적인 디자인의 로비에 아이들은 겁먹은 햄스터들처럼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로비를 오가는, 양복을 입은 선남선녀들도 회사 로비에 웬 고등학생들인가 하고 돌아보며 지나갔다.
“얘들아.”
“선생님!”
부르자, 아이들이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너희들 여긴 어떻게 왔어?”
안 그래도 연락을 받고 놀랐다. 이 거대한 부지에서 그녀가 머물고 있는 동은 거의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었지만,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기 오면 선생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해서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학교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한다고 통보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지나가요.”
아이들은 한 몸처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지나가 서 있었다. 적대적인 눈으로.
“휴직하셨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와, 대단해요. 저 이런 데는 처음 들어와 봐요.”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삐약삐약 우는 가운데 규하는 웃었다.
“잠깐 기다려 줄래?”
규하는 리셉션으로 다가가 어디론가 전화했다.
“잠시만 내려와 줄래요?”
그리고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잠깐 아이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저 멀리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셀레나가 그녀를 찾는 눈으로 돌아보며 내렸다.
셀레나는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와, 아이들을 보고 웃었다.
“안녕.”
셀레나는 한눈에도 인간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웅성거렸다. 예전에 응급실에서 스친 걸 제외하고, 루아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일 터였다.
“뱀, 아니, 루아스…….”
“루아스예요?”
“이곳의 CEO셔.”
규하가 말하자, 아이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루아스는 전부 군인 아니었어요?”
셀레나는 빙긋 웃었다.
“다 그렇진 않아요. 연구소에서 일하는 일반직도 많고, 소재지와 직업만 확실하면 민간에도 있거든요.”
규하는 셀레나의 팔을 가볍게 짚었다. 아이들에게 이 사람은 안심해도 된다고 이야기하듯.
“CEO님, 아이들에게 회사 견학 좀 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저 바쁜…….”
규하는 지나 쪽을 알게 모르게 고갯짓했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셀레나는 바로 아이들을 보고 웃으며 손짓했다.
“그럼 이쪽으로 갈까요?”
아이들은 금세 불안감보다 신기함에 압도되었는지 별말 없이 셀레나를 따랐다. 규하는 뒤에서 따라가려는 지나를 잡았다.
“지나 넌 선생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지나도 견학이나 방문 따위가 목적은 아니었는지 순순히 그녀를 따랐다. 규하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지나야.”
“훈계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 담임도 아니시잖아요.”
말을 꺼내자마자 아이는 바로 이를 드러냈다. 저번에는 죄책감으로 떨더니 이번에는 분노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춘기 아이가 불안정한 상태라고 알 수 있었다.
규하는 에두를 것 없이 물었다.
“왜 루아스가 되고 싶니?”
지나는 물어볼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물어봐주길 바란 것 같기도 했다.
“영원히 젊고 예쁘게 살 수 있으니까요. 힘도 세고…….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모두가 절 우러러봤으면 좋겠어요.”
사춘기 소년 소녀라면 누구나 해볼 법한 생각이었다. 특별한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왜 그 시절 그녀에게도 없었을까.
하지만 으레 겪는 성장통이 이토록 파괴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성숙한 마음을 이용하는 어른들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한테는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둘 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될 수 있는 거니까요. 전 감염을 이길 자신 있거든요.”
지나는 제법 거만한 얼굴로 말하더니,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였다.
“노래와 춤은 안 되지만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조금은 웃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규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해줘야 할지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오히려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더니 아이의 손톱에 낀 때가 눈에 들어왔다.
집안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잉.
그때 문이 열리고, 셀레나가 들어왔다. 규하는 돌아보았다.
“셀레나, 애들은…….”
“다른 직원들이 견학시켜 주고 있어요. 다들 인간 아이들은 가까이서 볼 일이 드무니까 엄청 좋아한다고요. 그 많은 과자랑 초콜릿을 애들이 다 어떻게 먹는다고 다용도실을 털어왔는지, 아무튼 걱정 마세요.”
셀레나는 옆에 서서, 그녀의 등장에 위축된 지나를 보았다.
“일단, 루아스가 돼서 예뻐지는 게 아냐. 대체로 외모를 포함한 신체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루아스가 되는 거지. 그런데…….”
셀레나는 꼭 거만한 기획사 사장 같은 눈길로 아이를 훑었다. 아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오히려 규하가 ‘애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라고 할 뻔했다.
“뭐, 그건 둘째치고.”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뱀파이어가 돼도 너보다 강한 사람은 있어. 오히려 이 모습으로 뱀파이어가 되면 넌 인간들한테도 붙잡혀서 피를 빨리게 될 거야. 네가 공격하는 데 가담한 여자 뱀파이어처럼.”
지나는 흠칫했다. 어쨌든 아이에게 연하에 대한 죄책감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왜 다들 자기는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셀레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혼잣말했다. 물론 진짜 혼잣말은 아니었지만.
“옛날에도 우리가 정체를 감추고 마냥 우월한 눈빛으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살았을 것 같니?”
셀레나는 한쪽 허리에 손을 짚었다.
“조금만 이상한 티가 나도 너희 인간들은 우리를 잡아다가 쳐 죽여. 뭐,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거니까 그걸 탓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아? 너희에게 우리는 무기일 뿐이야.”
셀레나는 어린애라고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더 잘 들으라는 듯 가감 없이 말했다.
“뱀파이어 군인은 인간 군인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전쟁기계니까. 어지간하면 죽지 않고, 대개 가족이 없어서 뒤끝이 없기 때문에 막 굴릴 수도 있지. 인간들이 정말 ‘공존’ 같은 이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해? 순진한 소리지. 결국 모든 건 돈이야.”
셀레나는 손가락을 돈 모양으로 둥글게 말았다.
“우리의 힘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회사가 있는 거야. 어쨌든 동등하게 거래할 입장이 되려면 우리도 이 정도 덩치는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아니면 영혼까지 털어버릴 것처럼 호구 취급을 하거든.”
그녀가 가리키는 황금색 ‘ISLE’ 로고에 시선이 갔다.
역시 밥값 이야기는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농담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보면 좋은 놈’이라고 턱도 없는 주장을 하는 게 아냐. 사실 알고 보면 더 나쁜 놈들이 수두룩하지. 흡혈귀가 괜히 흡혈귀겠어?”
셀레나는 오해는 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지구상에 도시의 불빛이 늘어갈수록 숨어 사는 건 불가능해졌고, 무기 취급이라도 그게 공존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였어.”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가볍게 덧붙였다.
“어쨌든 오늘까지 신세진 게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지나를 보는 눈은 진지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인간 마을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야. 언제라도 마을 밖 야생의 숲으로 내쫓을 수 있는.”
셀레나는 갑자기 손을 들어, 강하게 탁자를 내려쳤다.
쩍.
단단한 방탄유리 탁자 전체에 균열이 일었다.
“꺄악!”
지나는 비명을 지르며 규하에게 안겨들었다.
“셀레……!”
규하도 놀라 아이를 끌어안았다. 셀레나가 해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셀레나는 그대로 탁자에 손을 댄 채 지나를 보았다.
“똑똑히 봐. 여기가 마을의 경계석이야.”
“그게 무슨…….”
“옛날엔 마을 경계석 앞에서 아이들 볼을 후려치거나 강에 빠뜨려서 충격을 줬거든. 절대 마을의 경계를 잊지 못하게 하려고.”#
셀레나는 탁자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서 유리조각이 파스스 떨어졌다.
“잊지 마, 마을의 경계를. 네가 이 밖으로 뛰쳐나가면, 여태까지 널 보호해주던 인간 사회의 시스템이 널 공격하기 시작할 거니까.”
지나는 몸을 떨며 울먹였다.
“그딴 시스템, 지금도 절 보호해 주진 않아요.”
“그건 네가 숲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까.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곳인지 모르니까.”
셀레나는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인간보다는 우리 사이에 너 같은 이기적인 욕망덩어리들이 많은 건 사실이야. 그런 녀석들만 자꾸 유입되기 때문인지. 그래도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어.”
문을 잡고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흡혈귀인지.”
# 아베 긴야,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오정환, 한길사(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