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재회
연하는 잠들어 있었다. 자는 얼굴이 곤해 보였다.
예전에도 이렇게 유리 너머 연하를 본 적이 있었다.
이반은 팔짱 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늦었다. 제 힘과 제 생각을 과신해 온 자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담담히 받아들이기엔, 연하의 지친 얼굴이 심장을 죄어왔다.
“하긴, 폭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강 상사님이 납치되셨으니 모르셨을 법도 하네요.”
옆에서 셀레나가 말했다.
“저도 임신이라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미친 듯이 뛰었는데 늦어버려서…….”
이반은 웃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추적해 온 제 파트로네스의 정체를 이렇게 알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이반은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모두 무사하잖아.”
여기에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뿐이었다.
“뱃속에 계신 분은 건강해요. 성장 속도도 평범하고요. 오히려 조금 느린 편인가 싶어요. 하지만 별 문제는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수함을 띄워. 렉스를 찾아.”
어쩐 일로 셀레나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소장님 정말로…….”
“괜찮아. 살아 있어.”
사실 과거엔 이만한 물리력을 가진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이번처럼 위험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몹시 단호해서인지 셀레나는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아니, 깨우고 싶지 않아. 거의 자지 못했다며.”
“그래도 바로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이반은 다시 유리를 돌아보았다.
“깨자마자 알려줘.”
“그럼 자료부터 보시겠어요?”
“그래.”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 회의실로 들어갔다.
검은 유리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회의실은 깔끔했다. 전면창 너머 분주하고도 차분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반은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셀레나가 유리 탁자에 손을 대자, 건너편 벽 패널에 화면이 떴다. 그리고 그의 사망에 대해 다룬 기사들이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엔 당했군.”
“아주 크게요.”
그때 비서가 들어와 종이파일을 건네주었다. 셀레나는 파일을 열어 사진 한 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감염 당시 로스가 임신 중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손으로 쓴 임신 진단서였다. 잉크도 거의 날아가고 누렇게 색이 바란 걸 보니 꽤 오래된 것 같았는데, 필기 기록을 다시 사진으로 찍은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저희 이바노프 가가 임신이 가능한 가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모양이에요.”
“이건 어떻게 찾았어?”
“쇼 미 더 머니요.”
SN 쪽 정보원에게서 거금을 주고 샀다는 의미였다. 배신자는 어디나 있는 법이니까.
“아이는?”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SN에 넘어갔다면 충분히 알 만했기에, 이반은 더 묻지 않았다.
“아무튼 이 기록이 정확한지 찾기 위해서 날짜, 장소, 이 기록을 작성한 의사의 신상명세, 당시 근무 시간대, 수술기록을 모두 대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 찾아냈죠.”
셀레나는 계속 말했다.
“로스가 아일을 떠난 타이밍과 대공 무리가 움직인 경로를 생각하면 이 기록은 로스 게 맞아요. 뱀파이어 무리가 산부인과 의사를 필요로 할 이유가 달리 있을 리 없으니까요.”
“하여간 유능하군.”
“별말씀을요. 그리고 이건 페인 총장님을 암살한 SN 간부가 일을 치르러 가기 전에 전화 통화한 녹취록입니다.”
이번에 셀레나는 문서를 탁자에 내려놓고 어떤 지점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이런다고 그들이 갈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태 이 ‘그들’이 누군지 몰랐는데,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아무래도 이바노프 씨와 소장님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반은 녹취록을 들고 읽어보았다. 그동안 셀레나는 계속 말했다.
“로스가 임신했다면 이바노프가 그런 가계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품을 수 있죠. 그러면 확인할 방법이 있어야겠죠? 하지만 오랫동안 그럴 방법이 없었죠.”
어쨌든 이반이나 렉스는 섣불리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사실 최근까지는 이바노프 혈통이 가임이 가능한지 아닌지가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뱀파이어 배아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셀레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런데 얼마 전에 이바노프 가에 여자가 하나 더 생긴 거죠.”
“나와 렉스를 몰아넣었군.”
이반의 미간에 심각한 빛이 흘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큰 데미지를 줄 수 없을 거라고 알면서도 그와 연하가 함께했을 때 저격했던 이유. 소위 둘을 좀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테러리스트가 커플 매니저 노릇을 하다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계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페인 총장님을 암살한 건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셀레나는 펼친 파일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강 상사님을 버린 것처럼 보여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봤다는 게 더 놀라운 점이지만요.”
“아니면 페인한테 챙겨주라고 했을 리가 없잖아.”
같은 니스타르 쌍둥이로서 페인이라면 그가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겠지만 말이다.
셀레나는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았다.
“이제 인정하시는 거예요?”
이반은 손짓했다. 셀레나는 다음 문서를 건넸다. 이반은 문서를 보면서 대답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엽다고 생각했거든.”
“와, 이바노프 씨, 위험한 발언. 강 상사님 그땐 진짜 열아홉이었다고요.”
“그냥 귀엽다고 생각했다고. 오버하지 마. 드레스까지 보내면서 응원할 때는 언제고.”
“분명히 마음이 있으면서 웬일로 제사만 지내고 있으셔서요.”
“웬일이라니……. 그렇게 난봉꾼이었던 기억은 없는데.”
“그러게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으면서 성욕도 잃으신 것 같아서 많이 걱정했죠.”
이반은 눈썹을 추켜들고 셀레나를 보았다. 셀레나는 그만해야 할 때라고 깨달았다.
“어쨌든 로스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을 겪는군요.”
사실 처음 아일에 왔을 때부터 눈이 묘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눈이 광채를 발했다.
‘그건 욕망하는 자의 눈이지.’
아무 욕심도 없다고 애써 주장하는 것 같은 겉모습이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어쨌든 필립의 아내였기 때문에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안나가 필립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 끝내셨어야 해요. 필립을 죽였을 때.”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크고 강한 사람이지만, 상처를 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 사건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이었을 때 형제처럼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왕국과 가족을 포함한 모든 걸 잃었다. 그 여파로 형제 비슷한 건 클리엔테스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겨우 가족 같은 형태를 갖추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지.’
그들로서도 안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SN이 그녀를 데려갔다. 괴물의 탄생은 그렇게 간단했다.
안나는 마치 욕망을 집어삼키며 비대해지는 눈사람 같았다.
처음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지내왔지만, 점차 존재감이 거대해져 이제는 대공이 꼭두각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필립은 사고라고 했지.”
이반은 조용히 말했다.
“원래 로스를 감염시키려 했는데 조절을 못했을 뿐이라고.”
“거짓말이었던 거 아시잖아요.”
“그건 상관없어. 필립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반이 탁자를 짚자, 패널에 다른 화면이 떴다. 붉은 눈동자에 사진과 서류가 어지럽게 올라가는 화면이 비쳤다.
“하지만 우리도 움직여야겠지.”
“저희요?”
셀레나는 희극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덩치만 크지 아무리 맞아도 움직이지 못하는 수백 톤짜리 하마라고 놀림받던 저희가 말이죠. 드디어요? 저 현기증 일 것 같아요. 너무 오랜만에 움직이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빈정거림에 꽤 쌓인 게 많았구나, 하고 이반은 생각했다.
“어쨌든 내 아이가 살 세상은 안전한 곳이었으면 하니까.”
그제야 셀레나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의욕에 찬 모습은 몇 세기만인 것 같네요.”
이반은 갑자기 궁금해져 셀레나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 무기력했나?”
“젖은 미역이나 다름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옷 좀 갈아입어주시면 안 돼요? 노숙 생활 하실 때 악몽이 떠오르니까요.”
이반은 해변 기념품 가게에서 산 싸구려 프린트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었다.
급한 대로 사서 입고 와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이게 의외로 렉스의 자유로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왜? 난 꽤 마음에 드는데.”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바노프 씨까지 왜 이래요? 외모 낭비는 소장님만으로도 충분해요.”
* * *
이반은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멈칫한 찰나, 자동문이 열렸다.
연하가 서 있었다. 얼마나 허겁지겁 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하지만 자신이 보는 걸 믿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서 있었다.
자동문이 다시 닫히려하는 순간에, 이반은 손으로 문을 막아 멈췄다.
지잉, 덜컥, 덜컥…….
닫히지 못하는 자동문이 애처롭게 울었다.
“이반.”
연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반은 온 품속에 연하를 끌어안았다. 연하도 온 힘을 다해 그를 안았다.
“규하한테 사과할 거예요.”
연하는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건, 정말로 지옥이었어요.”
“미안해.”
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야 규하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과하지 말라던.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이반은 그녀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에 서 있던 셀레나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편이…….”
자동문이 닫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ISLE은 방음시설이 완벽하니까.
셀레나는 돌아서면서 허공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래요. 사랑은 언제나 좋은 거죠. 왕자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 * *
“가슴이 커졌어.”
이반은 제 무릎에 앉은 연하의 가슴을 쥐고 말했다.
“눈치챘어야 하는데.”
사실 얼핏 가슴이 커졌다고는 생각했는데, 유별나게 여기진 않았다. 설마 임신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반도 임신이 가능한 건 몰랐잖아요.”
그래도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자, 연하는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이반은 한 손으로 볼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임신한 몸으로 그런 일은 겪게 하지 않았을 거야.”
“나보다 아이가 더 놀랐을 거예요. 셀레나 말로는 평범한 인간 아이였으면 100% 유산이었다고…….”
이반은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하는 연하를 한참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젠 이런 몸이 된 걸 감사해야 할 것 같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일은 없다는 건 이런 걸까요?”
그때 문이 열리면서 규하가 들어왔다.
“대체 어디에 나자빠져 있다가 이제 온 거예요?”
“규하야.”
규하는 두 사람 앞에 서서는 척 팔짱을 꼈다.
“생리하면 임신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애를 임신시켜 놓고.”
* * *
“혹시 생리를 계속 하셨어요?”
구출된 직후 셀레나는 물었다. 연하는 의아하게 셀레나를 보았다.
“생리는 누구나 하잖아요?”
“뱀파이어는…… 안 하는데요.”
연하는 연하대로, 셀레나는 셀레나대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리웨이는 아는데…….”
연하는 혼나는 아이처럼 어물거렸다.
주치의니까 당연히 그랬겠지만…….
셀레나는 힘이 빠지는 얼굴이었다.
“스테판은 원래 강 상사님이 임신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게다가 여자 루아스는 어차피 많지 않으니까, 따로 물어볼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연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생리 중이라고 하면 역시 여자 대원은 성가시다고 생각할 테니까 절대 말하지 말라는 조언은 해준 적 있어요.”
옆에 있는 규하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넌 그대로 따랐고.”
연하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게 연하 탓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이기 전에 여성 대원으로서 얕잡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 * *
“게다가 안정을 취해야 할 애를 잡고 뭐하는 짓이에요?”
규하는 ‘난 이 결혼 반댈세.’ 하고 외치는 시어머니처럼 완고한 표정이었다. 이반은 연하를 놓고 일어났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럼에도 규하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안 하면 다예요?”
“미안합니다.”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혼자 돌아와서.”
규하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그걸로 뭐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
규하는 멈칫했다. 숨이 떨려왔다.
“살아, 있는 거죠?”
“살아 있습니다.”
이반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연하는 규하를 안았다.
“살아 있어.”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이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연하가 있고, 아직 가족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믿음을 주는 국장이 있었다.
“살아 있어.”
규하는 정말 그 말을 믿고 싶은 것처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