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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81화 (81/104)

81화. 귀환

“그럼…… 오로지 신원을 숨기기 위해 성전환수술을 했다고요?”

“그렇게 보여요.”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규하는 이 세계의 비상식에 거의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연하는 스테판 블란두스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세운 어머니.

빛나는 미래.

단란한 가족…….

공존을 꿈꿨지만, 모든 걸 빼앗아간 흡혈귀들.

“그런데 왜 SN이랑 같이 있는 거죠?”

연하는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정확하게는 제노아틱스죠.”

셀레나는 대답했다.

“일단 겉보기에, 제노아틱스는 SN이랑 관계가 없죠.”

셀레나는 이어 말했다.

“SN에 자금을 댔다고는 하지만, 사실 제노아틱스에서 나간 돈이 아니라, 연관관계를 입증할 수 없는 인간 협력자들에게서 나간 돈이니까요. 그리고 인간들은 대가로 어떤 것도 받지 않았어요.”

“공짜로 그 많은 돈을 줬다고요?”

규하는 기막혀했다.

“그럴 린 없죠. 당연히 어음을 발행해 줬겠죠. 다만 보통 어음과 다른 점은 형태가 없고, 미래에 지불하기로 한 대가가 돈이 아닐 뿐이겠죠. 그러니까 어음보다 오히려 뭐라고 해야 할까…….”

셀레나는 잠깐, 그녀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을 응시했다.

“면죄부.”

붉은 눈에 우울한 빛이 돌았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그럼 설마…….

셋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셋 다 아무 말하지 못했다.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도 증거는 없어요. 철저하게 입으로만 거래했거든요. 자기들끼리 ‘형제단’이라고 부르는 일정그룹 안에서. 하지만 얼마 전 파괴된 서사하라 조병창에서 발견한 흔적도 그렇고, 아무래도 100% 감염이 성공하는 뱀파이어 바이러스 같은 걸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헐.”

규하는 참을 새도 없이 내뱉고 말았다.

“그러니까 미래에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듣고 돈을 제공했다는……?”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런 거겠죠. 자기들이 선택한 자들만이 영원히 살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상.”

규하는 관자놀이를 엄지와 검지로 주물렀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영원한 삶을 꿈꾸는 건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이건…….

‘너무 제정신이 아니잖아.’

셀레나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요즘 감염은 거의 의료 행위로 취급받으니까요.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아서 제대로 된 치료법으로 대접받지 못할 뿐이죠.”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성공가능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연구라고 하면, 저희 측에서도 할 말은 없거든요. 연구 과정에 동원된 온갖 불법들은 힘 있는 ‘형제’들이 처리해 줄 테고.”

도영과 규하는 연하를 보았다. 그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의료 행위로 살아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너 로또 사야 하는 거 아냐?”

도영이 말했다. 아무래도 바늘구멍 같은 확률을 뚫는 데 재능이 있어 보이니 말이다.

“로또도 이미 됐어요.”

규하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도영은 ‘아’ 소리를 삼켰다.

주식이고 뭐고 전부 넘겼다지만, 셀레나는 여전히 국장을 상왕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셀레나는 웃음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저희도 조금 방관한 면도 있어요. 있는 대로 고생하다가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자멸해 버리라지, 이렇게. 그런데…….”

셀레나는 연하의 배를 보았다.

“루아스 배아가 나타났죠.”

규하는 바로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것들이 단체로 무슨 약을 처먹어서 감히 내 조카를…….”

“선생님, 입, 입.”

셀레나는 연하의 배를 눈짓하며 다급히 말했다. 규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 알아듣지도 못할 거, 그렇게까지 유난 떨 필요 없는데.’

연하는 생각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테판이 신분을 숨기고 서울 지부에 간 이유부터 강 상사님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해요.”

연하는 옛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리웨이는 전출 왔을 때부터 유난히 그녀에게 붙임성이 좋았다.

그렇게까지 편견 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드물어서, 연하도 어느새 마음을 열었고 의무대에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연하와 가까워진 도영도 자연스럽게 의무대를 찾았다.

그렇게 그들은 계급을 떠나 ‘친구’가 되었다.

“강 상사님이 가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옆에 붙어 정보를 빼돌린 거죠.”

연하는 심각한 얼굴로 이불이 구겨진 모양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 4년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도영도 마찬가지였다.

그 심정을 알 것 같아 규하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우리 클랜에는 여자가 강 상사님 전에는 없어서 가임 능력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는데…….”

규하와 연하는 셀레나를 보았다. 셀레나는 이건 무슨 시선인가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아, 모르셨어요? 저희, 그러니까 소장님 클리엔테스들은 전부 양자들이에요. 소장님은 한 번도 누굴 감염시킨 적이 없으시거든요.”

“몰랐어요.”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로 렉스다운 일이었다.

렉스 이야기가 나오자, 규하는 흠칫 손을 떨었다. 연하는 그 손을 잡았다.

둘 다…… 이렇게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마음은 절대 그럴 수가 없으니까.

“클리엔테스를 양자로 들인다는 것 자체를 소장님이 거의 처음 하신 일이죠. 덕분에 밥값이 엄청 들어간다고요. 저희가 이 회사를 괜히 세웠겠어요?”

셀레나가 쓰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말에, 그제야 둘은 조금 웃었다.

“아무튼 그럼…… 스테판은 그 바이러스 개발을 돕고 있는 거고요?”

“아마도요. 어쨌든 어머니를 닮아서 천재거든요. 신분세탁을 위한 의학 공부도 독학으로 마쳤을 거예요. 물론 스테판이 제노아틱스와 SN의 관계를 모를 린 없을 테니, 그 좋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 짐작도 못하겠어요.”

셀레나는 잠깐 생각했다.

“글쎄요, 가족이 비명횡사하는 걸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얻었거나……. ISLE에선 그런 바이러스를 개발할 리 없으니까요.”

연하는 납치됐을 때 스테판이 한 말을 떠올리고 말했다.

“모든 게 끝나길 원한다고 했어요. 파괴되고 또 재생되는 악순환이 끝나길 바란다고.”

규하는 알 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가 신쯤 된다고 생각하는 중2병 환자 아냐? 천재들한테 흔한 증상이지.”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셀레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셋은 기다렸다.

“이바노프 씨가 스테판을 찾으라한 건 그 아이가 좋은 머리를 적들을 위해 쓸까 봐서나, 저희도 모르는 박사님의 연구 자료를 가지고 있을까 봐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셀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황하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신 거죠.”

셀레나는 슬프게 웃었다.

“집으로.”

* * *

도영과 규하는 복도로 나왔다. 도영은 규하를 보고 충동적으로 말했다.

“소장님은 돌아오실 겁니다.”

규하는 방을 나오는 짧은 새에 탈색돼 버린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위로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섣부른 위로는 하는 게 아니에요.”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오로지 연하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임을─ 소장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영은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규하는 복도의 소실점을 보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제 경호원들, 모두 사망했다고요.”

도영은 정복 모자를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막 다녀온 합동 장례식은 침울했다. 그가 있는 현장에서 KIA는 없었지만, 근무 중이던 제로 14팀 3조는…….

“도저히 나한테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네요. 대체 왜 다들 이런 일을 하는 건지……. 의인?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내가 얼마나 평범한 인간인지 더 느낄 뿐이에요.”

도영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이 모든 건 MCTC의 입대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이미 각오한 일이었고,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은 아버지도 누차 경고했다. 하지만 이건 절대 씹히지 않는 고기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여러 번 씹어도, 절대 씹혀 넘어가지가 않았다.

아마 평생 입속에서 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암담한 사실이라도, 그는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모르고 입에 넣은 것도 아니니까.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도영은 똑바로 규하를 보았다.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한 가치는 저희가 판단하겠습니다. 제삼자인 선생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도영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죽은 대원들 중 하나라면 규하에게서 무엇을 원할지.

“고맙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규하는 침묵했다. 그리고 절대 씹히지 않는 고기를 같이 씹는 사람처럼,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고맙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고마워요…… 너무. 날 지켜줘서…… 고마워요.”

병실에 있는 연하는 그 말을 들었다. 셀레나는 무릎에 얼굴을 박고 있는 연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울지 않을 거예요.”

연하는 그대로 말했다.

“제가 죽었다 하더라도 팀원들이 울어주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연하는 고개를 들었다.

“얼른 정신 차리고 절 죽게 만든 녀석을 혼내주길 바라겠죠.”

검은 눈동자가 살기를 품고 빛났다.

연하를 가만히 보던 셀레나가 어깨에 손을 짚었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보랏빛이 나는 붉은 눈동자가 걱정과 우려를 담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뱃속에 계신 분부터 생각해 주세요.”

이때만큼 자신의 말에 확신이 없는 적도 없었지만, 셀레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바노프 씨는 반드시 돌아오실 거예요.”

* * *

밤바다는 고요했다. 멀리 휘황한 불빛이 수면에 어려 색색의 빛으로 넘실거렸다.

해변에는 비치타월을 깔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커플 하나가 전부였다. 그들은 이번이 함께 온 첫 여행인지 나란히 앉은 엉덩이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남자는 수줍게 웃으며 맥주를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도 수줍은 미소로 답하고 맥주를 받았다.

수면에 낭만적인 불빛이 넘실거렸다.

촤아악.

그리고 수면이 솟구쳐 올랐다. 커플은 거의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기겁해 바다를 보았다.

수면을 깨고 올라온 알몸에 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반은 얼굴을 쓸고 제 몸을 둘러보았다. 너무 갈가리 찢겨서 재조합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다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팔과 다리 쪽에 붉은 흉터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렉스 녀석은…….’

흐릿한 의식에 그만큼 갈가리 찢겨 반대편으로 떠내려가는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일단 이반은 해변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해변에 앉은 커플은 얼어붙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반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옆을 지나갈 때까지.

이반은 갑자기 그들을 돌아보았다.

“깔고 앉으신 것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남자가 허겁지겁 건네주자, 이반은 비치타월을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낯선 풍경을 둘러보고, 도로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얼빠져 쳐다보던 남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 누드비치였나…….”

그런데 여자가 아예 목이 돌아간 것처럼 도로 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저기?”

“어? 어. 아니. 저기. 어…… 어.”

여자는 횡설수설하다가 뭔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면 내면의 질문이나.

이 커플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 * *

이반은 젖은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바다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래된 전화 수화기였다.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뒤를 지나가는 남자 둘이 그를 수군거리며 보았다.

그가 떠내려 온 곳은 남미 어딘가의 휴양지 같았는데, 그래도 도로가에 비치타월만 두른 상태로 서 있기에는 눈에 띄는 게 사실이었다.

결국 연하가 받지 않아 끊고 다른 곳으로 전화했다. 이번 상대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셀레나.”

잠깐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바노프 씨!]

거의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였다. 사실 그들 중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셀레나에게서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셀레나. 렉스는?”

[아직 소식이 없어요.]

“연하는?”

[무사히 구출…… 아니, 여태 어디 계셨던 거예요? 육해공을 모조리 수색해도 흔적이 나오지 않아서 이번에는 정말 죽으신 건가 했어요.]

이반은 미간이 움찔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사히 구출이라니, 어디서?”

[네? 모르시는 거예요? 잠깐, 어디서부터 모르시는 거예요? 구출, 납치…….]

셀레나는 말할수록 의심이 짙어지는 목소리더니 설마 싶어진 것처럼 조심스레 물었다.

[임신?]

이반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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