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80화 (80/104)

80화. 이바노프의 꽃 (3)

‘설마…….’

소름이 끼쳤다. 규하는 당장 연하에게 인공호흡 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을 불어넣고 심폐소생술을 해도 연하는 조용했다.

규하는 이를 악물었다. 심장마사지를 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일어나.”

그들 주위로 물이 철퍽거리며 튀었다. 규하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 일어나라고! 또 내 앞에서 죽기만 해봐!”

그때였다. 마치 누군가가 걷어찬 것처럼, 연하는 기침과 물을 토해냈다.

“콜록!”

규하는 안도감에 주저앉을 뻔했다.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가 콜록거리는 연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연하는 손등으로 입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강 건너에서 손짓하는 할아버지를 본 것 같아.”

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규하는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 할아버지 얼굴 모르잖아. 일찍 돌아가셔서.”

“그러…….”

연하는 지친 듯이 웃다가 흠칫 배를 짚었다. 규하도 긴장했다.

“있어?”

있냐고 묻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연하는 심각한 기색으로 배를 느끼더니 중얼거렸다.

“있어.”

‘이 아이는 강해.’

연하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자아조차 없는 존재지만, 제 자궁벽을 꽉 붙들고 있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온 존재로 삶에 대한 의지를 뿜어내는 것처럼.

연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가자.”

“신호는? 간 거야?”

“몰라. 올 때까지 버텨야지.”

“버티다니…….”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말 그대로 몸뚱이뿐이었다. 연하는 몸뚱이‘뿐’이라고 할 수 없는지 몰라도 명색이 임산부…….

그때 막 뭍으로 올라서던 연하가 넘어져서 몇 번 엄청난 기침을 토해냈다. 손을 떼자 피가 흥건했다. 규하는 기겁했다.

“너……!”

“괜찮아. 혈액부족 때문에 장기가 손상된 거야.”

연하는 람보도 반할 것 같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일어났다. 규하는 기가 막혔다.

“대체…….”

지금까지도 잘 상상되진 않았지만, 연하가 버텨온 시간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나기 전 연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오히려 심정적으로는 조금 여린 듯싶은, 정말로 평범한 아이.

대체 무엇이 그런 아이를 이렇게 인내의 벼랑까지 내몰았는지, 규하는 너무 기가 막혔다. 이딴 세상에 분노가 치밀었다.

평범한 열아홉 살 소녀였고, 이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아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까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굴려대는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가 싶었다.

“대체 어떻게 버틴 거야?”

연하는 돌아보았다. 숲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무너지면 네가 위험해지니까.”

무서웠다. 처음에는 매일을 울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자신을 위해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규하가 사는 세상을 지키고 서 있는 마지막 벽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무너질 수가 없었다.

연하는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도 똑같이 했을 거잖아.”

연하는 조금 웃었다.

“그렇지?”

규하는 숨을 몰아쉬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미친, 이럴 때가 아니잖아.

“가자.”

뭍은 숲으로 이어졌다. 숲은 싹 밀어버렸는데도 지치지 않는 의지로 싹을 틔운, 어리고 약한 나무들만이 간간이 서 있었다. 숲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절대 그들을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장소였다. 이런 평야 같은 지대에서는 안에서 달아나기도, 밖에서 원군이 오기도 힘들었다.

그때 달려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리고, 남자들이 그들을 사방에서 감쌌다. 연하는 날카롭게 사방을 훑었다.

남자들 가운데, 시몬이 걸어 나왔다.

“도망가려 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살짝 턱을 내리는 그녀의 얼굴은, 지독하게 음울했다.

“배를 갈라서 꺼내주지.”

남자들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런데 갑자기 헬리콥터가 다가오는 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다가오는 공격용 아파치 헬기는 한 대가 아니었다. 몇 대…… 적어도 수십 대였다.

시몬은 흠칫 하늘을 돌아보았다.

두쿵.

폭음과 진동이 울리며 지평선 너머에서 방어 지대공 미사일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상대도 금세 대응했다. 두 미사일이 공중에서 맞부딪히며 폭발해 천지를 뒤흔들었다.

“ISLE입니다!”

“여길 찾을 수 있을 리……!”

시몬은 외치다가 번뜩 연하를 보았다. 그녀가 뭘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도망갈 수 없다고 알면서도 왜 굳이 호수에 뛰어들었는지.

시몬은 이를 갈았다. 하늘에서 폭음을 동반한 빛이 번쩍일 때마다 검은 눈동자에 윤기가 돌았다.

이바노프의 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비장한 얼굴이, 정말로 증오스러웠다. 이제는 남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저것이 싫었다.

‘넌 뭐가 그리 달라서.’

“무모한 짓을 했군.”

“배가 갈리는 것보다는 낫지.”

연하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규하는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블랙 유머…….

“가셔야 합니다!”

시몬은 점차 다가오는 ISLE의 헬기 부대를 보고, 연하를 보았다.

스테판 패는 이번에 사용해 버렸다. 강연하가 ISLE로 넘어가면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몬은 분노에 차,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두쿵.

폭음에 묻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소 가까운 거리에서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빛이 사방을 환하게 씻었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었을 때, 남자들과 시몬은 보이지 않았다.

아파치 헬기가 호수를 모조리 쓸어버릴 것처럼 파문을 일으키며 땅에 내려앉았다.

쿵. 철컹.

문이 열리고, 메마른 흙바닥에 검은 하이힐이 내려섰다.

눈부신 빛 사이로 늘씬한 인영이 다가왔다.

“정말 무모한 짓을 하셨군요. 생체신호가 끊겼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덕분에 바로 찾긴 했지만.”

연하는 시린 눈을 가린 손 사이로 겨우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목까지 가린 검은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에 완벽한 웨이브를 넣은 헤어스타일을 했고, 모두가 압도될 만한 파워풀한 미인이었다. 그리고 컸다.

정말로 컸다.

거의 키가 이반만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붉은 눈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뱀파이어인 줄 알았을 것이다.

“누구……?”

연하도 얼떨떨했다. 아까 남자가 외친 말을 들으면 ISLE에서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체신호가 왜 MCTC가 아닌 ISLE로 갔는지…….

여자는 제비꽃 같은 색을 띤 붉은 눈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섬섬옥수지만 키만큼이나 큰 손을 내밀었다.

“셀레나 추예요.”

연하는 손을 잡으려다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얼굴…….

물론 규하는 연하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설마 ISLE의…….”

연하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셀레나는 달같이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장님의 클리엔테스예요. 제일 예쁘다는 셋째죠.”

* * *

도영은 복도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정복 모자를 만지작거리다가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규하가 나왔다. 도영은 바로 일어섰다.

“들어와요.”

도영은 규하를 따라 들어갔다. 깨끗하고 넓은 병실에 햇빛이 비쳐 들었다. 가운데 침대에 연하가 앉아 있고, 가는 팔에 링거와 수혈 팩이 연결되어 있었다.

연하를 처음 보았을 때 생각보다 하얗고 말라서 놀랐던 기억이 났다. 그나마도 이렇게 약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연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니까.”

“기절했다고 구박한 게 미안해지려고 해서 그런다.”

“계획되지 않은 일로 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린 건 나였으니까…….”

몇몇 대원들은 심각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그 자리에서 KIA(작전 중 사망)#는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는 걸 알고 지원부대가 뒤에서 거의 사생결단으로 폭약을 터뜨려 가며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팀도 온 힘을 다해 대응했다.

한쪽 방향으로 밀린 적들은 혼란한 와중에 잽싸게 연하만 들고 도망쳤다.

좁은 공간에 그렇게 많이 몰려들어서는 루아스들도 충분한 기동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작전을 누가 짰는지는 몰라도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군사작전에 대해 잘 알지 않거나, 그만큼 연하를 납치하는 데 간절했거나.

그래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긴 했다.

“착한 것도 그 정도면 호구야, 자식아.”

도영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건 맞아야겠지만. 몇 살이야, 대체?”

“생길 줄 몰라서…….”

연하는 허를 찔린 것처럼 우물거렸다. 옆에서 규하가 인상을 썼다.

“지금이 6.25도 아니고 애를 배게 해놓고 행방불명이라니. 국장, 돌아와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규하야.”

연하가 말리듯이 불렀지만, 규하는 똑바로 그녀를 보며 힘주어 다시 말했다.

“죽여 버릴 거야.”

도영은 아무렴 훌륭한 태도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규하에게 물었다.

“휴직하셨다고요.”

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안전이 걱정이니까요.”

이번 일로, 자신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이 말려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라도 학교를 떠나는 게 맞았다.

일이 해결되고도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문이 열리고 셀레나가 들어왔다. 진주 빛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H라인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네요.”

셀레나는 손을 내밀었고, 도영은 맞잡았다.

“셀레나 추입니다.”

“도영 드페흐 소령입니다.”

연하가 바로 물었다.

“찾은 게 있나요?”

셀레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력을 총동원해서 찾고 있지만 폭발이 워낙 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걸 의심하진 않아요.”

연하는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수색에 나서고 싶었다. 도움이 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웨이 파웰 대위…….”

셀레나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도영은 꾹 주먹을 쥐었다.

리웨이.

배신자는 늘 있었지만, 이건 정말로…….

이번만큼은 적들이 너무 아픈 곳을 쳤다고, 생각했다.

“본래 이름 스테판 블란두스는 마리에테 블란두스 박사님의 아들이에요.”

연하와 도영은 거의 숨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그 틈에 규하가 물었다.

“블란두스 박사라면 뱀파이어들이 먹는 꽃을 발견한 사람 말이죠?”

“네. 저희에겐 대모님 같은 분이랄까요.”

“그런 분의 아들이 어째서…….”

겨우 정신을 차린 도영이 끼어들었다.

“지금 뭐라고…… 아들이라고요?”

셀레나는 제 몸을 아래서부터 얼굴까지 손짓했다.

“싹 다 갈아엎었어요. 아예 뇌만 본인 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하와 도영은 서로를 보았다.

“눈치챘었어?”

“전혀. 넌?”

“나도…… 아니, 그러고 보니 가끔 야한 농담 같은 걸 할 때 남자 동료랑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어, 그건.”

도영이 곤란한 듯 말을 삼키자, 규하는 알 만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셀레나는 피식 웃고 말했다.

“가족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테판은 어느 날 사라졌어요. 더 이상 흡혈귀들 따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끝으로.”

웃음기는 점차 사라졌다.

“물론 계속 찾았죠. 하지만 지구상에 있는 한 이 정도로 저희의 정보망에 잡히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어서, 신원미상의 시신으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종결했어요.”

셀레나는 조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일이 드문 세상도 아니니까. 얼마 전에 이바노프 씨가 다시 찾아보라고 하셨을 때에야 재수사를 시작했죠.”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해 보자 싶어서, 정보원들을 풀어서 탐문 수사로 하나하나 흔적을 되짚어갔어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역시 구관이 명관이더군요. 스테판에게 성전환수술을 해준 의사와 간호사는…….”

셀레나는 잠깐 말을 삼켰고, 도영과 연하는 뒷말을 예상하고 싶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얼마 뒤 강도 사건으로 사망했지만, 간호사의 동생을 찾아냈어요. 그날 밤 자신의 언니가 지나가듯이 말했다더군요.”

“그런 놈이 왜 멀쩡한 걸 떼다버리는지 모르겠다. 생긴 것도 멀끔하던데.”

“마지막 순간까지 간호사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하더군요.”

세 사람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듯하자,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테판은 평범한 청년이었거든요, 동성애 성향도, 트렌스젠더 성향도 없는.”

# Killed in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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