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바노프의 꽃 (2)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요.”
리웨이는 뒤따라오며 말했다. 시몬은 흘긋 돌아보았다.
“옆에 있는 동안 꽤 친해졌나 보지?”
“효율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굳이 실험체를 자극할 필요도, 쓸데없는 재앙을 부를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래, 과학자들에게 효율성은 생명이니까.”
시몬은 멈춰 섰다.
“스테판.”
리웨이, 아니, 스테판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SN에게서 널 구해준 건 나였어.”
SN가 블란두스 박사의 집을 습격한 그날 밤─
스테판은 가까스로 집을 탈출해 달아났다. 하지만 인간 청년이 뛰어봤자 정원을 채 벗어날 수 없었다.
아이는 흙바닥에 억눌려 부르짖었다.
“개자식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어머니가 어떻게 해줬는데!”
시몬은 온몸으로 울부짖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료를 찾기 위해 동행했을 뿐, 살육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SN이 아니니까.
“놓아줘.”
시몬은 말했다. 스테판을 억누르고 있는 흡혈귀는 황당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가게 내버려 두라고.”
시몬은 무표정하게 다시 말했다.
“네년이 뭔데 명령을…….”
서걱.
흡혈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리가 날아갔다.
시몬은 글라디우스처럼 생긴 군용 검을 내렸다. 세 번째까지 말하게 하는 건 정말로 참을 수 없었다.
알렉스가 검을 쓰는 모습은 수없이 봐왔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따라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일 때는 들 수조차 없던 쇳덩이를 휘두르는 일은 이제 제 팔을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솟구치는 피나 떨어져 나가는 사지가 더는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희열까지 느껴졌다.
‘난 이바노프야.’
그 자부심이 온 혈관에 흘러넘쳤다.
잘린 단면에서 피를 뿜어내며 흡혈귀가 옆으로 넘어갔다.
쿵.
청년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뭐가 어찌 됐든 도망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정신없이 제 몸을 끄집어 올려 뛰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똑똑한 녀석이군.’
얼핏 생각했지만, 연민 따위 때문에 그를 구해준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생존자가 있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SN은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어야 하니까.
물론─
몇 년 뒤 그가 여자 모습으로 앞에 나타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요?”
눈앞에 있는 스테판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흐릿한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며 돌아보던 그 눈동자, 공포와 분노가 일렁이는 깊은 늪 같은 눈동자는 이제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 무조건 충성하란 이야기는 아냐. 난 네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거야. 네 능력을 높이 사는 만큼 충분하게. 그러니까 최소한 너도 내 방식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스테판은 피식 웃었다. 시몬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뭐가 웃기지?”
“처세술을 보니 당신이 이바노프 가에서 보낸 시간이 헛된 것 같진 않아서요.”
시몬은 빤히 그를 보았다.
“건방 떨지 마. 내게 강연하에 대해 숨긴 걸 넘어가 주고 있으니까.”
스테판은 살짝 목례했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공이 입만 벙끗해도 죽여 버린다고 협박했으니까요. 명령체계는 하나로 통일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군요.”
시몬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 *
“괜찮아?”
냄새가…….
연하는 눈을 들었다. 규하는 연하의 눈 속에서 뭔가를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름이 끼쳤다, 어째서인지─
“떨어져.”
“뭐?”
“조금만 떨어져 있어줘.”
너무 가슴이 서늘해서, 규하는 토를 달지 않았다. 연하는 제 팔을 감싸 안았다. 규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정말 아이를 가졌어?”
아까는 센 척을 하느라 기세 좋게 말했지만, 실은 모든 일이 너무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았다.
아, 의인 부분은 빼고. 그런 잡소리는 신선하지도 않았다.
연하는 이불이 흩어진 모양새에 의미 없는 시선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나도 불가능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임신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초음파로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고.
위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플로스를 마셨던 거나, 샤워실에서 쓰러진 것, 자꾸 피 맛이 생각나는 것, 모두 아귀가 맞았다.
‘어지러워…….’
귀 뒤쪽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하는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플로스는 늘 충분했고, 부상으로 피가 부족했을 때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피에 대한 압도적인 갈망을 이렇게 또렷한 정신상태로 느낀 적이 없었다.
마치 안에서부터 누군가가 그녀를 파먹고 있는 느낌이었다.
연하는 흠칫 입을 막았다.
“왜 그래?”
규하가 다급히 물었다. 연하는 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가…….’
멋대로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규하를 먹이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습게도 이제야 깨닫게 되었지만, 자신은 정말 흡혈귀였던 모양이다.
‘꽃을 먹고 산다고 아닐 수가 없었던 건데.’
연하는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반은 정말로 죽었을까.’
조작된 화면 같은 게 아닐까. 하지만 저렇게 오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는 거라면 정말로 이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긴 게……. 그런 게…….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싶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쉬고 싶지가 않았다.
반면 규하는 애써 태연한 체하고 있었지만, 불안해 미칠 것 같은 상태였다. 연하는 한참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연하야.”
연하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규하는 주춤 물러섰다.
‘눈이…….’
연하는 아주 천천히 자세를 풀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마치 짐승이 먹잇감을 공격하기 전에 자세를 낮추고 움직이듯이.
규하는 몸이 떨려왔다. 나름 두 번이나 사지를 겪은 관록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이건 달라.’
왜 사람들이 흡혈귀를 재앙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걸음을 한 번 더 물린 순간이었다. 연하가 그녀를 덮쳐 왔다.
아니, 그렇다고 느낄 새도 없었는데 이미 그녀에게 붙들려 넘어지고 있었다. 규하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 * *
“수영, 할 수 있지?”
연하는 목덜미를 물고 있느라 불분명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목덜미를 물고 있지만, 날카로운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규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 지린 것 같아.”
이불처럼 펼쳐진 머리카락 아래로 연하가 ‘쉿’ 소리를 냈다.
“이곳을 탈출해야 해.”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규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것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그녀는 갈수록 약해질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규하는 머리카락 아래로 얼굴을 감추고 입술만 달싹였다.
“여기는 물 위야. 소리가 들려.”
연하는 감시화면에 정말 피를 빨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몸까지 조금 꿈틀거렸다. 규하도 손을 들썩거릴까 하다가 너무 과한 연기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그만뒀다.
“모든 루아스 군인은 생체반응이 끊기면 자동으로 위치 정보가 전송되는 칩을 몸에 심고 있어. 그건 살아 있는 루아스에게서는 제거할 수 없거든. 하지만 이 건물은 신호가 차폐돼있을 거야.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야 해.”
루아스의 시신은 훌륭한 연구 자료니까 입대할 때 조건이었다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잠깐, 그 말은…….”
생체반응이 끊기면, 이라니.
“날 끌어올려 줘야 해. 할 수 있지? 한때 인천 바다의 인어였잖아.”
수영을 그만둔 지 10년도 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규하는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마. 그런 위험한 짓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아이는? 설사 네가 버티더라도 아이에게 그런 충격은 위험해.”
연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버텨줄 거라고, 믿어.”
그녀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감히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저 믿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넌 어떻게…… 계속 이런 식으로…….”
연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난 기뻤어. 널 지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네가 날 도와줘야 해.”
연하는 단숨에 일어나, 자해하는 것처럼 벽을 들이받았다. 하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하는데, 벽을 짚은 연하의 손가락이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연하의 팔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연하는 기합을 내질렀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고, 벽이 갈라져 나왔다.
쩍, 하고.
이미 여러 번 보아온 힘이지만, 규하는 또 놀라고 말았다. 다른 루아스들에 비해도 놀라운 힘이었다. 순수한 근육의 힘만으로 분명히 무언가 처리되어 있을 벽을 뜯어내다니.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일어나면서 재킷을 벗어 던지고 달렸다. 그리고 바닥이 끝나는 곳에 섰다. 아래에서 용솟음치는 바람에 쓸려나갈 뻔했다.
“조심……!”
연하가 재빨리 그녀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순간 그런 건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규하는 벽 너머 세상을 보고 말을 잃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지평선 끝까지.
사방으로 어린아이 하나 숨기지 못할 것 같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을 뿐, 광활한 부지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공주님을 가둬두는 탑 같은 이 건물만 세상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래 해자처럼 건물을 둘러싼 호수에 뛰어들어 무사히 살아난다 하더라도, 엄폐물 하나 없는 이 넓은 땅을 뛰어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연하는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규하는 까마득한 아래 석유처럼 까맣고 기름진 빛으로 일렁이는 물을 보고 침을 삼켰다. 적어도 10층 이상의 높이였다.
‘못 하겠어.’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규하는 연하를 보았다.
‘하지만 임산부가 저렇게 결연한데, 내가 차마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잖아.’
씨발, 인천의 피바다 강규하 가오가 있지.
그런데 왜 다리가 떨려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할 수 있어.”
그건 오히려 자신에게 세뇌를 시키는 말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연하는 배를 내려다보았다.
“제발 버텨줘.”
연하는 벽의 파편을 문으로 집어 던졌다.
쿵.
굉음이 나며 문이 막혔다.
쾅.
하지만 역시 루아스인 상대는 바로 문을 걷어차 열었다. 연하는 뒤돌았다.
“뛰어!”
규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뛰었다.
훅─
공기가 몸을 감싸왔다. 이어서 심장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섬뜩한 부유감이 몸을 때렸다.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지를 수만 있었다면.
영원히 수면에 닿지 않을 것 같았는데, 충격과 함께 물속에 박혀들었다.
쿵.
플라스틱 덩어리에 몸을 억지로 갖다 박은 것 같았다.
규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자, 연하는 우주 공간 같은 물속에서 이미 시체처럼 푸르게 떠 보였다. 철근을 찬 것처럼 가라앉는 속도가 빨랐다.
규하는 무저갱 같은 아래와 수면을 번갈아 보았다. 불안해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연하는 서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수면은 빠르게 멀어졌다.
연하는 몽롱한 눈으로 수면을 보았다. 수면에 빛이 넘실거렸다.
이반을 품은, 푸르고 맑은 수영장의 물과 이반을 품지 않은, 어둡고 탁한 강의 물. 생명의 물과 죽음의 물.
생명과 죽음, 죽음, 생명…….
교차되는 이미지 너머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지금!’
규하는 연하를 끌어안고 다리를 박찼다.
트로피를 향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온 힘, 온 생명, 온 영혼을 다해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촤악!
수면을 깨고 올라왔다. 차단되어 있던 온갖 소리가 들이닥쳤다. 건물 저 높은 곳에서 이는 소란, 개가 짖는 소리, 불빛이 수면을 훑는 소리까지.
연하는 뭍에 닿자마자 쇳덩이를 끄는 것처럼 엄청난 무게였다. 그나마 가능한 얕은 곳까지 끌어냈다.
“강연하!”
당장 들여다보았지만, 반쯤 물에 잠긴 연하는 숨을 쉬지 않았다.
푸르고, 창백했다.
강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