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바노프의 꽃 (1)
시몬은 항구에 서 있었다. 세상천지가 울리는 폭발의 순간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과 함께 거대한 선박이 기울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대처했나 보군.’
생각보다 선박은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루기엔 충분했다. 어쨌든 폭발을 정면으로 맞은 세 남자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안 그래도 그녀는 근래 이반 이바노프와 강연하를 지켜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대공의 말대로, 이반 이바노프는 결코 그녀를 강연하를 사랑하듯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포기 따위가 아냐.’
냉정한 상황 판단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도 내쫓겼던 노예에서 왕의 여자가 되어 당당하게 왕궁에 입성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녀를 무시했던 모두를 내려다보며.
아니, 실제로 그를 사랑했든 하지 않았든 더 이상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뾰족한 하이힐이 돌아서자, 수많은 검은 구둣발들이 따라 돌아섰다. 선두에서 나아가는 길은, 아무런 장해물 없이 뻗어 있었다.
그녀는 왕이 될 것이다.
왕의 여자 따위가 아니라.
그녀는 먼지 같은 안나 로스가 아니니까.
* * *
연하는 흐릿한 눈을 떴다. 팔에 링거 바늘이 연결되어 있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리웨이가 있었다.
‘의무대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리웨이, 나 자꾸 쓰러져서…….”
손을 들려고 하는데, 손이 멈추었다.
손목이 묶여 있었다. 그것도 코끼리나 묶어둘 것 같은 엄청난 두께의 족쇄에.
그리고 링거 바늘이라고 생각했던 건 헌혈 바늘이었다. 아래로 연결된 투명한 관을 타고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달팽이관이 고장 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연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웨이를 보았다.
“리웨이.”
리웨이는 전에 없이 냉정한 눈이었다.
“축하해. 아이를 가졌어.”
“뭐?”
안 그래도 리웨이가 자신의 배에 젤을 바른 초음파기기를 대고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하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난 임신을…….”
“할 수 있어. 이바노프는 가임이 가능한 혈통이니까.”
“그게 무슨…….”
“봐.”
리웨이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검은 구멍 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이 있었다. 하지만 연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리웨이는 배에서 기기를 떼고 라텍스 장갑을 벗어 내려놓았다.
“뉴스를 켜줘.”
AI가 벽 패널에 뉴스 화면을 켰다.
배경은 바다였고, 선박이 폭발한 사고 현장 같았다.
선박은 선두가 바다에 처박혀 있었다. 흩어진 잔해로 보면 폭발의 반경은 엄청났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에서 찍은 화면에서도 현장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크루즈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해군은 급히 생존자 구조에 나섰으며…… 폭발에 가장 가까이 있던 MCTC 서울의 이반 이바노프 국장과 중앙근위사단장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은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연하는 천천히 리웨이를 돌아보았다.
“뭐……?”
리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파헤쳤다.
[폭발의 순간이 담긴 CCTV 영상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선실의장에 달린 CCTV가 찍은 것처럼 내려다보는 영상 속에, 갑판에 있는 이반과 렉스에게 검은 머리 청년이 다가왔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던 청년이 옆에 선 은발 남자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화면이 흔들린다 싶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연하는 깜짝 놀란 듯이 움찔했다.
화면은 조금 더 느린 속도로 반복되었다. 은발 남자에게서 폭발이 터져나가는 순간, 이반과 렉스가 그에게 뛰어드는 순간, 대공을 포함해 모두 폭발에 휘말리는 순간까지…….
“거짓말이야.”
연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안해. 진짜야. 네 잘난 국장도 설마 대공을 미끼로 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 봐. 하긴, 나도 예상 못했으니.”
리웨이는 무심히 뉴스 화면을 보다가 훗 웃었다.
“그래,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야 유사 이래 최악의 재앙이라는 흡혈귀 악명이 아깝지 않잖아?”
연하는 리웨이를 보았다.
“바라는 게 뭐야?”
리웨이는 무표정하게 연하를 보았다. 환한 빛 아래 드러나 있는데도, 그늘에 잠긴 것처럼 어두운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진한 화장, 성형을 과하게 한 사람처럼 경직된 얼굴, 음울한 속내처럼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젊은 사람으로도, 나이든 사람으로도,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냥 모두 끝나길 바라. 이 모든 악순환, 파괴되고 재생되고, 또 파괴되는 악의 고리가.”
그때 문이 열리고 규하가 남자들에게 떠밀려 들어왔다. 연하는 움찔했고, 규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기겁해 달려왔다.
“강연하! 너 몰골이 왜 이래?”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짙은 다크서클,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 핏기라고는 없는 피부색이었다.
“규하야.”
연하는 신음처럼 그녀를 불렀다.
“게다가 왜 묶여 있…….”
규하는 뭔가 상황을 파악한 듯 말을 멈추고 리웨이를 노려보았다.
“넌 뭐야?”
“당신, 세상을 정당화하는 의인이에요.”
리웨이는 대뜸 말했다.
“리웨이!”
연하는 부르짖었다.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소리에 규하가 흠칫 놀라 물러설 정도로.
하지만 리웨이는 개의치 않았다.
“당신 같은 인간들이 숨어 있어요. 니스타르라고 부르는데, 니스타르가 다 죽으면 세상은 멸망해요.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에요. 니스타르가 수명을 못 채우고 죽으면 재앙이 내리거든요.”
규하는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잡소리인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리웨이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만팔천여 명이 한꺼번에 죽는 확률이란 게 더 어렵지만, 만팔천 번의 재앙이 내린다면 확실히 세상은 끝이겠죠.”
리웨이는 연하를 돌아보았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실 흡혈귀는 어떤 니스타르가 부른 재앙이 아닐까 하고. 홍수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아닐 뿐, 파괴력은 그 어떤 재앙보다 확실하잖아?”
연하는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1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뭔가 비밀이 밝혀지는 중인 거 맞지.”
규하는 중얼거렸다.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듣는다고 확 죽어버리진 않네요.”
“나한테 설명 좀 해줄래? 적어도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라면 말이야.”
“니스타르는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죽는다고 하거든요. 전설에 불과한 것 같지만요.”
규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연하를 보았다.
“너 설마 이거 때문에……?”
“아니야.”
“그럼 뭐야? 이거랑 관계가 있는 거지? 바른대로 말해.”
확신을 얻은 규하는 무섭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연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널 죽인다고 했어. 내가 네 앞에 나서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이고 말겠다고…….”
규하는 잔뜩 인상을 썼다.
“누가?”
“아주 무서운 테러리스트 그룹의 리더가요.”
리웨이가 덧붙였다. 규하는 리웨이를 돌아보고 물었다.
“테러리스트 리더가 날 왜?”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긴들 알겠느냐는 듯.
규하는 연하를 보고 험악해 보일 정도로 인상을 썼다.
“너 진짜 병신 아냐? 그딴 말 때문에 12년이나?”
“대공은 SN의 리더야. 테러리스트들이 널 노리게 둘 수가 없었어.”
규하는 기가 막히다 못해 너무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12년을……!”
“널 위험하게 하는 건 감수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커지는 목소리를, 연하가 내지른 소리가 덮었다. 규하는 멈칫했다. 도저히 연하가 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굵은 소리였다.
연하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그럴 수가 없었어.”
강한 눈빛이었지만, 파리한 낯빛으로 희미하게 떨고 있는 연하는 비를 쫄딱 맞은 채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아이 같았다.
규하는 잠깐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의인? 내가?”
규하는 헛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리웨이를 보면서 연하를 가리켰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내가 그나마 착한 일 좀 하고 살았던 건 모두 얘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했겠지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거 하나.”
규하는 리웨이를 보았다.
“대체 무슨 대단한 착각들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좆까. 나 같은 인간이 의인이라면 그딴 세상 나부터 살기 싫으니까.”
지잉.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돌아보았다. 막 방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납치되어 헬기로 이곳에 내리자마자 헬기장에 기다리고 있던 여자였다. 마피아 두목처럼 검은 남자들을 거느린 채.
연하는 눈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시몬 드무스티에. 규하를 건들이지…….”
시몬은 코웃음 쳤다.
“걱정하지 마. 난 의인 따위에 관심 없으니까. 신의 의도 같은 건 궁금하지 않거든.”
그래, 그녀는 처음부터 니스타르에 관심이 없었다.
그건 말뚝 같은 존재일 따름이니까. 제자리에 꽂혀 있다는 게 확인만 되면 아무래도 좋은.
그리고 니스타르를 건드리면 유대인들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흐샤야르샤는 세상 어떤 일에도 간섭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니스타르의 숫자가 적정선 아래로 내려가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들로서도 세상이 멸망해 버려서는 곤란하니까.
시몬은 리웨이를 보았다.
“어때?”
“맞아요, 임신.”
규하는 번뜩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두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 추출할 수 있어?”
시몬이 묻자 리웨이는 연하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꼭 이 자리에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준비되는 대로.”
시몬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몸은 전부 스캔했지?”
“여기요.”
리웨이는 옆에 놓인 쟁반을 들었다. 언뜻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칩이 올려져 있었다. 입대하면서 심은 GPS였다.
리웨이는 연하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 널 죽이진 않을 테니까.”
“암말로 이용할 뿐이겠지.”
시몬과 리웨이는 동시에 규하를 보았다. 규하는 독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리웨이는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아세요?”
규하는 코웃음 쳤다.
“왜 몰라? 너희 둘은 악당이고, 아무래도 연하는 임신이 가능한 것 같고, 너흰 아이가 필요하고. 무슨 나쁜 짓에 써먹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웨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이 뱀파이어가 됐다면 상당히 무서웠을 것 같네요. 어쩌면 제 정체도 금방 들켰을지 모르죠.”
“당연하지. 썩은 내가 진동하잖아.”
리웨이는 난감한 웃음을 짓고 연하를 보았다.
“오히려 너였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연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웨이가 연하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규하는 그녀를 밀쳐 냈다.
“손 떼!”
“진정하세요. 바늘을 제거하려는 것뿐이니까. 놔두면 계속 피가 빠져나갈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규하는 연하 팔에 꽂혀 있는 헌혈 바늘을 보았다. 검붉은 피가 관을 타고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규하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리웨이는 다가섰다. 규하는 다시 밀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리웨이를 지켜보았다. 허튼짓하기만 해보라는 듯이.
리웨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팔에서 바늘을 제거했다.
규하는 다급히 연하를 확인했다.
“괜찮아?”
그사이에 리웨이는 시몬을 보았다.
“피를 부족하게 만드는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태아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규하가 홱 돌아보았다. 시몬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뽑아다 쓸 게 정상일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위험할 일 없어. 먹이라면 바로 여기 있으니까.”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이 똑바로 규하를 가리켰다. 연하는 이를 악물었다.
시몬은 손을 내렸다.
지금도, 흡혈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하얗고 맑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욕망에 허덕이는 꼴을 꼭 봐야 이 뒤틀린 뱃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혼자서만 깨끗한 것 같은 얼굴이라니.
‘다 같은 흡혈귀 주제에.’
시몬이 돌아서고, 리웨이가 일어나 따랐다. 시몬은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이바노프는 오지 않을 거야.”
갑자기 연하의 팔을 묶은 족쇄가 자동으로 풀리고, 시몬은 차갑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넌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네 형제인지, 네 아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