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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77화 (77/104)

77화. HAIL TO THE KING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옆에 서 있는 렉스가 무심히 말했다. 이반은 고개를 내젓고 바다를 돌아보며 난간에 두 팔을 걸쳤다.

“내가 괜히 다 버리고 떠났던 게 아니라니까.”

“차라리 정복해서 왕국을 세우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이 모든 고생을 하지 않으셨어도 됐을 텐데요.”

이반은 인어의 손짓처럼 우아하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다가 렉스를 보았다.

“지금 21세기 아냐? 왕국이라니, 민주주의도 배우지 못한 것 같은 소리를 하는군.”

“최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모두가 높은 곳을 욕망할 수 있는 세상이 과연 좋기만 할까…….”

렉스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처럼 말했다.

“모두의 욕망이 얽혀서, 이렇게 복잡한 세상이 돼버린 걸 보니까요. 정의롭고 단순한 하나의 의지로 영원히 지배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역시 수사 출신이라고 해야 할까.

“더럽게 따분한 세상이겠지.”

“적어도 안전한 세상이겠죠.”

“그거야말로 인간성을 경원시한 결론이야.”

이반은 난간을 짚고 일어섰다.

“평생 농부가 아닌 뭔가가 돼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옆집 농부보다 당근 하나를 더 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봐? 인간은 제 욕망이 억압된 세상을 용납하지 못해.”

이반은 빛이 반짝이는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한동안 참을 수는 있어도.”

안락한 집을 위한 욕망, 부와 명예를 위한 욕망,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어떤 욕망이든 간에.

이반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 다시 렉스를 보았다.

“근데 얼마 전부터 묘하게 나한테 허물없이 이야기하는데, 너.”

렉스는 태연히 말했다.

“천 년쯤 알고 지냈으면 조금은 괜찮지 않습니까?”

“아주 맞먹지…….”

그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요.”

이반은 돌아보았다. 느긋한 밤바람을 맞으며, 연미복을 입은 하인리히가 서 있었다.

이반은 하인리히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인리히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오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반은 웃었다.

“오지 않을 이유가 없죠. 제노아틱스와 MCTC는 여전히 좋은 사업파트너니까요. 하이마 재계약 건은 안타깝게 이해관계가 맞지 않은 일이었죠. 하지만 앞으로도 함께할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을 규하가 봤으면 뭐라고 할지, 렉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와, 입 터는 거 봐.’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당할 수 없군요.”

하인리히는 피식 웃었다.

“아버님.”

그때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리히 뒤에 동서양 혼혈 소녀가 서 있었다.

“어머니께서…….”

하인리히는 어깨 너머를 보고 낮게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꾸나.”

열다섯쯤으로 보이는 소녀는 그 나이대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차분한, 아니, 초연한 것에 가까운 눈으로 이반을 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동양적인 기품이 있는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마침 부모의 인종이 같아서 그런지 만약 연하와 제 딸이 있다면 저런 아이지 않을까 싶었다. 저렇게 차가운 느낌은 아니겠지만.

“영애께서 아주 예의가 바르군요. 유일한 딸이었던가요?”

이반은 말하고 시험 삼아 덧붙였다.

“푸거-들뢰크의 이름을 가진 중엔.”

하인리히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똑똑한 아이기도 하죠.”

제 치부를 딱히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세련된 껍질을 뒤집어써도 인간은 결국 인간이라고 깨닫게 되고 말았다. 유사 이래 결코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고나 할까.

‘필립 다음에 이런 남자라니, 로스도 어지간히 벤츠를 똥차로 바꾸는 재주가 있군.’

그때 이반의 안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실례하죠.”

이반이 말하자,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즐겨주십시오. 사업 이야기는 또 할 자리가 있겠죠.”

“그럼.”

이반은 전화를 꺼내며 돌아섰다. 마침 기다리던 전화였다.

* * *

규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저 아이, 아까부터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는.

복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옆 반 학생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불량서클과 어울리는 등 문제가 많았는데 한동안 무단결석을 해서 옆 반 담임인 국어 선생이 골치 아파하는 모습을 봤다. 그런데 오늘은 학교에 나온 모양이었다.

규하는 ‘아’ 소리를 내었다.

“저, 지나야?”

지나는 눈에 띄게 흠칫했다. 하지만 모퉁이 너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규하는 난감한 웃음을 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혹시 선생님한테 할 말이라도…….”

규하는 아이를 보자마자, 아이에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이다.

“괜찮으면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할래?”

지나는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입을 뗐다.

“가능하다면…….”

얼마나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 옆에 비어 있는 미술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이 닫히자마자 지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것처럼 와락.

규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정말 죄송해요.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전, 전…… 진짜…….”

“괜찮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이야기해봐. 여긴 선생님밖에 없어.”

규하는 자세를 숙이고 지나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지나는 한참을 울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냥…… 그냥…… 피를 조금 얻고 싶을 뿐이었어요. 오빠, 언니들이 그럴 줄은…….”

규하는 난감한 웃음을 삼켰다.

“선생님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좀 자세히 설명해 줄래?”

“그 뱀파이어 있잖아요. 선생님하고 닮은…….”

규하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 아이가 어떻게 연하를…….

“뭐?”

지나는 의아하게 그녀를 보았다.

“모르……세요?”

“뭘 말하는 거니?”

“팔이…….”

규하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이 다시 생각난 듯 토할 것 같아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대강 알 수 있었다.

연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것도 이 아이와 관련된 일로.

‘그날이겠지.’

저녁을 먹기로 하고는 급한 일이 있었다고 사라진 날.

며칠 뒤 돌아와서 평소처럼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규하는 꾹 주먹을 쥐었다.

‘역시 할 수 없어.’

연하는 저 밖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르는데, 자신은 이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범하고 즐겁게 살 수가 없었다. 보호 따위 받으면서.

규하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쾅.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아니, 열리면서 부서졌다.

안 그래도 밖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싶은 참이었다. 지나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강규하 선생님?”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두 번 생각하기도 전에, 규하는 당장 지나를 등 뒤로 감추었다. 남자들은 한눈에도 인간이 아니었다.

“뱀파이어……?”

지나도 등 뒤에서 멍한 소리를 내었다. 규하는 긴장했다.

경호원…… 경호원들이 곧 올 것이다.

‘조금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규하는 흘긋 옆에 있는 석고상을 눈짓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경호원들은 오지 않을 겁니다.”

* * *

쿵.

연하는 청년을 포박해 바닥에 넘어뜨렸다. 같이 달아나던 일행은 흠칫 돌아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미 잡은 청년은 뒤에 오는 대원에게 맡기고 연하는 뛰어올랐다. 그리고 천장에 드러난 파이프를 잡고 몸을 돌려 달아나는 일행 앞에 내려섰다.

그는 움찔 멈췄다. 다급하게 둘러보았지만 좁은 복도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청년은 접이식 경찰봉을 꺼내 펼쳤다. 그녀가 루아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용기가 가상했다.

“다치니까…….”

말했지만 청년은 경찰봉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당연히 슬로우 모션을 보듯이 느린 공격이라 연하는 살짝 몸을 젖혀 피했다.

그런데 봉이 어깨를 스쳤다.

“……?”

연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청년을 보았다. 청년은 다시 봉을 휘둘렀다.

연하는 청년의 발목을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소리 지르며 반항하는 청년을 팔을 등 뒤에 누르고 바닥에 눌렀다. 미간에 금이 갔다.

어쩐지 움직임이 둔한데.

‘착각이었나?’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다른 청년이 그녀를 향해 각목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팔다리를 바닥에 고정시켜 놓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에 쓰러졌을 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은 꼭 무슨 약을 먹은 것처럼─

청년은 뒤에서 날아온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여덟, 뭐 하는…….”

거기까지가 연하가 기억하는 것이었다.

쓰러진 연하를 제 몸으로 받아낸 청년은 비명을 터뜨렸다.

“여덟!”

대원들이 놀라 달려왔다. 늘어진 연하를 뒤집어보자, 이번에도 단순히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다른 외상징후는 없어 보였다.

“아, 이 자식이! 또!”

도영은 분노를 터뜨렸다.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해야지, 이게 어디서 아마추어 같은 짓거리야?”

옆에서 한 중사가 온 힘을 다해 달아나는 아이들을 한참 쫓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근데 어린애들이 이렇게 화력이 좋은 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죠. 딱 봐도 어디서 지원받고 있는…….”

팅.

날아온 총알이 벽에 맞고 튕겼다. 도영과 팀원들은 바로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대응 사격하며 엄호하는 동안 도영과 한 대원이 연하의 방탄복을 붙잡고 끌었다.

“으아, 대박 무겁……!”

“강 상사야, 제발 우리 좀 도와줘라! 네가 이러지 않아도 우리 인생이 힘든 사람들…….”

온갖 불평을 토하며 연하를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한 중사가 불렀다.

“소령님.”

그때 한 중사가 낸 목소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웃음기라고는 쫙 빠진, 그답지 않게 떠는 것까지 한 목소리.

도영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도 떨고 말았다.

검은 인영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앞뒤를 꽉꽉 채우며.

모조리 뱀파이어들이었다.

* * *

이반은 전화를 받았다.

“셀레나. 검사 결과는…….”

검사 결과로 봤을 때 연하가 별 이상은 없었지만, 전반적인 수치들이 조금 높아서 아무래도 다시 정밀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셀레나에게 연하의 혈액 샘플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네? 아, 그건 아직 확인을 못 했어요. 아니, 그보다, 드디어 찾았어요. 스테판 블란두스.]

바로 미간에 심각한 빛이 스몄다.

“말해.”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었어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ISLE의 정보망에 잡히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이름 따위야 몇 번을 바꿔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그런데 셀레나가 덧붙였다.

[성별도요. 블랙마켓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은 기록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여태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반은 미간이 꿈틀거렸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은…….]

“리웨이 파웰.”

셀레나는 놀라는 것 같았다.

[알고 있으셨어요?]

“짐작이었지. 지금 당장…….”

그때 옆에 있는 렉스가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경계하는 자세로 이반을 불렀다.

“이바노프 씨.”

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안녕?”

대공이었다.

MCTC가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 찾고 있는 녀석은, 마치 초대받은 손님이 초대받은 자리에 온 것처럼 느긋하게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녀석의 태도가 워낙 자연스러워 사람들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은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그리고 그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는 둘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과 교환하라기에.”

대공은 뒤따라온 남자를 가리켰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붉은 눈, 러시아인 특유의 무감동한 얼굴.

마르코프 야코블레프.

대공의 유일한 클리엔테스이면서, 12년 전 연하를 직접 죽인 뱀파이어였다.

“강연하를 죽인 녀석이야. 대신 교환조건은 뭐라 했냐면…….”

갑자기 대공은 말을 멈추고 의아해하는 눈으로 마르코프를 보았다.

“마르코프, 너한테 무슨 소리가…….”

마르코프는 무표정하게 대공을 보았다.

“꼭 목적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찰나, 이반은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선박의 모든 것을 인식했다.

수많은 인간들. 수많은 삶들.

짧고 눈부신 자들.

세월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모래 위의 그림 같은 군상들. 그가 구태여 지킬 의무가 없는 자들.

“왕께서 승하하셨다.”

수많은 울음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통곡이 하늘과 대지를 울렸다.

“왕을 돌려주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세상 끝까지 데려가 줄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위대하고 관대한…….”

“신의 아들…….”

이미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린 목소리들이 하나로 모아지며, 머릿속에 공명처럼 울렸다.

“우리의 왕.”

이반은 외쳤다.

“알렉스!”

렉스는 바로 이해했다. 빛이 번쩍이며 마르코프의 몸이 터져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들었다.

폭발이 덮쳐 오는 걸 보며 대공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시몬 너 이 녀석…….”

폭음이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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