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76화 (76/104)

76화. 대가

“아이는…….”

시몬은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겨우 평온한 목소리가 나왔다.

대공은 결국 이 이야기까지 왔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생각해 봐. 뱀파이어 배아줄기세포라고. 차라리 황금 양털이 더 찾기 쉬운 엄청난 연구 샘플이잖아. 우리 ‘연구’가 애초에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시몬은 떨려오는 몸을 참기 위해 초인적인 힘이 필요했다.

“당신들은…… 제가 필요한 게 아니었군요.”

[네가 뭔데?]

대공은 전에 없이 오만한 얼굴이었다.

[남편 덕분에 운 좋게 이바노프 가에 들어간 플러스 원이었을 뿐이잖아.]

시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건 아냐. 보다시피 우리도 이바노프 가가 그런 가계인 줄 몰랐으니까. 그냥 쓸모가 있을까 싶어서 줍고 보니, 그게 당첨 로또였던 거지.]

대공은 손을 한 번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그때 일로 넌 가임 능력을 잃었으니까. 자궁을 같이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거든. 이런 이야기는 나도 미안하지만, 좀…… 끔찍한 상태였거든.]

대공은 그때 생각을 하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몬은 꾹 어금니를 물었다. 안 그래도 만약 제게 가임 능력이 그대로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았을 것이다.

아니, 어떤 식으로든 대공이 이용했을 거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건 나도 오히려 아쉬운 일이야. 네게 가임 능력이 그대로 있었다면 일이 더 쉬웠을 테니까.]

마침 대공이 그렇게 말해, 시몬은 조금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튼 표본이 하나 더 필요했어. 기왕 하는 김에 이번에는 완벽한 걸로.]

이런 와중에도 시몬은 기가 막혔다.

이건 정말, 미치광이구나 싶었다.

“설마 지금 그래서 이바노프 씨를 강연하 옆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건가요?”

[정확하게는 ‘이바노프 남자’야. 가임 능력이 있는 다른 가계를 찾느니 그게 더 빨랐으니까.]

시몬은 이 미치광이가 강연하 상대로 알렉스까지 생각했다는 점이 황당한지, 이바노프를 상대로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게 더 황당한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인 총장을 죽였군요.”

가만히 둬도 시간이 해결해 줄 페인을 굳이.

드디어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강연하의 뒤를 봐주던 페인이 사라지면 이바노프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일석이조였지. 워낙 눈에 거슬리던 녀석이라.]

“이바노프 씨, 아니, 어느 쪽이든 강연하와 그런 사이가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었죠?”

[강연하를 봤으니까. 의지가 굳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건 알겠더군.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던데.]

이 미치광이가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 놀라웠다.

[강연하의 외모가 어리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이바노프가 그 정도 융통성은 발휘할 줄 알더군.]

그러더니 이죽이며 덧붙였다. 마치 시몬을 놀리듯.

[아니면 외모가 어려도 상관없었다는 걸까……?]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대공도 더 입을 놀리지 않았다. 시몬이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시몬은 마침내 말했다. 태연히.

“하지만 그런 중요한 정보에서 저를 배제시키고 있으셨다니,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한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대공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군. 울고불고할까 봐 긴장했잖아. 네게 숨긴 이유는 그런 게 좀 걱정돼서 말이야.]

“앞으로 계획에 대해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군요. 끊겠습니다.”

시몬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끼익, 의자를 밀고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탁자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필립.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온화한 녹색 눈동자가 눈앞을 지나갔다. 탁자를 짚은 손이 떨려왔다.

‘필립……!’

필립은 그녀를 사랑했다. 이반 이바노프가 강연하를 사랑하듯이,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오로지 그녀를 위해 죽음에서까지 돌아왔다.

이바노프 가의 왕자로서 어떤 여자든 고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녀만을…….

‘오로지 나만을.’

시몬은 힘겹게 시선을 들어 화면을 보았다. 색색이 빛이 반짝거렸다.

아름답고, 안온한 세계.

뼛속까지 사랑받는 여자.

그리고 아이.

그녀가 한때 가졌던 것…….

시몬은 손가락에 뼈가 튀어나오도록 힘을 주었다.

그래, 안나 로스였다면, 남편밖에 바라볼 것이 없었던 그 어리고 힘없는 가정주부였다면 내 아이를 살려내라고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우둔한 증오심만을 곱씹었을 터.

시몬은 손을 탁자에서 떼고 허리를 똑바로 폈다.

‘하지만 그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울고불고할 가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빛나는 미래를 위해.

* * *

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반은 제 방엔 처음이죠?”

“그러네.”

이반은 그녀의 흔적을 읽듯 방을 둘러보며 들어왔다.

그가 어떤 루아스들처럼 유난한 거구도 아닌데 어쩐지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이반은 침대에 걸터앉아 옆을 두드렸다. 연하는 그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멀뚱히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쳐서 웃었다.

“왜요?”

연하는 웃음기를 띠고 물었다. 이반의 눈에도 웃음기가 있었다.

“언제 키스해 줄 건가 싶어서. 나름 출장 다녀왔는데.”

연하는 ‘아’ 소리를 내고,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침대에 무릎을 짚고 일어나 키스했다.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키스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몸이 돌려지고 점점 자세가 낮아지더니, 입술이 떨어지자 침대에 등을 대고 있는 상태였다.

“근데 저 때문에 중간에 나온 거 아니에요?”

연하는 이반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키스했다.

“괜찮아.”

이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돌아가 봐야 하긴 하지만.”

연하 때문에 시작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하고 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점은 있었다.

“그럼…….”

연하가 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기에, 이반은 고개를 내렸다.

“시간은 충분히 있어.”

그런데 연하가 살짝 어깨를 밀어내며 우물거렸다.

“저기, 사람들이 전부 알아버려서…… 이반이 너무 방에서 안 나오면…….”

물론 관사는 방음이 잘 되어 있긴 하지만…….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괜찮아. 세상이 전부 알아도.”

그가 내려왔다.

“아니, 세상이 전부 알았으면 좋겠어.”

* * *

대공은 꺼진 화면을 응시했다. 한참을 꼼짝 않고 있다가, 갑자기 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마르코프가 돌아보는 기척이 났다.

“마르코프. 일이 좀 희한해진 것 같아.”

대공은 천천히 웃음을 멈추었다.

“뱀파이어는 배아 시절이 없잖아.”

대공은 의자 등받이를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서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만능성을 가진 배아줄기세포도 없지. 하지만 만능성이 없는 성체 줄기세포로는 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어. 우리 연구가 계속 답보상태에 있는 이유지. 인간의 경우에는 iPS# 연구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왔지만, 뱀파이어는 다르니까.”

마르코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대공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아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그것도 반쪽짜리가 아니라 순수한 혈통의, 완전한 뱀파이어 배아줄기세포를 말이야.”

대공은 마르코프를 보았다. 눈이 번들거렸다.

“정말 재밌는 세상 아니야? 하필 이바노프가 가임 혈통인 것도 기막히지만, 내가 죽였고, 그래서 뱀파이어가 된 강연하가 결국 모든 것의 열쇠가 되다니 말이야.”

* * *

격납고 벽 쪽에 한 무리의 대원들이 빙 둘러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거의 출동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벽 패널에 화면이 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브리핑 담당 소령이 말했다.

“오늘은 이례적으로 비행 청소년 단속에 좀 나가야 할 것 같아.”

대원들이 웅성거렸다. 소령은 반응을 이해하겠으니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이 비행 청소년들이 좀 본격적이어서, 일반 병력으로 상대하기가 힘들다고 하는군.”

“그럼 뭐, 총기로 무장이라도 했답니까?”

한 대원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거의 장난으로 물은 거였는지 대원은 어이없는 기색이었다.

“여기 대한민국 아닌가요.”

“루아스를 상대로 자위력을 올려야 한다고 총기 밀매가 빈번해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그러다 과격한 어린애들 손에까지 들어갔겠지. 아무튼, 이게 지금까지 확인된 멤버들 명단이고…….”

화면에 명단이 떴다. 대원들 사이에 있는 연하는 무심히 명단을 훑다가 어디선가 멈칫했다.

“저 아이.”

주변이 시끄러워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인 건 옆에 있는 도영밖에 없었다.

“왜?”

“본 적 있어.”

연하는 명단의 중앙에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날 다리 밑에 있었어. 아이들 사이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 전혀 유별날 것 없는 아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미끼 역할을 했던 소녀가 제 친구라고 가리킨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마 아무나 가리킨 걸 테지만, 연하의 기억에는 남았다. 특히 손가락이 자신을 향했을 때 흠칫하고 놀라던 얼굴이.

주변이 바로 조용해졌다. 대원들은 연하의 팔과 명단에 있는 소녀의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소령이 패드를 보고 말했다.

“그룹을 따라다니는 여자애들 중 하나로군. 이름 김지나, 나이 열일곱, 혜문 고등학교 1학년 5반…….”

도영이 흠칫했다.

“잠깐, 혜문 고등학교라면…….”

연하의 눈이 심각해졌다.

규하네 학교.

소령이 돌아보고 말했다.

“혜문 고등학교 1학년 5반 김지나라는 소녀에 대해 알아보고, 경찰에 연락해서 학교로 인력을 보내라고 해.”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좌중을 보았다.

“뭐 해? 출동할 준비들 해.”

“저 아이 데려오기 전에요?”

“정보는 이미 흘러나왔어. 우물쭈물하면 일망타진은 물 건너 가는 거야. 어서 엉덩이들 움직여.”

대원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소령이 막 앞을 지나가는 연하에게 손짓했다.

“넌 괜찮겠어?”

어제 쓰러졌다는 소문이 전 지부에 퍼진 모양이었다. 연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대원들과 함께 격납고 앞에 나가 있는 헬기로 가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강 상사.”

의사가운을 입은 리웨이가 격납고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먹고 가.”

리웨이는 알약을 건넸다.

“뭔데?”

연하는 이미 먹으면서 물었다.

“비타민. 아무 이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몸 관리해야지.”

“고마워.”

연하는 손을 흔들고, 달려갔다. 막 따라잡은 그녀를 보고 한 대원이 한 말에 연하는 가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눈이 흔들렸다.

‘왜 하필 네가…….’

격납고의 환한 조명에, 바닥에 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그림자였다.

‘하지만 돌아갈 수가 없어……. 어떤 것 앞에서도 돌아갈 수 없도록, 다리를 불태웠으니까. 다리 너머에 모두 버리고 왔으니까.’

리웨이는 꾹 이를 물었다.

‘이러니까, 이 나약한 인간성이 언젠가는 튀어나올 줄 알았으니까, 다리를 불태웠던 거야.’

리웨이는 연하를 차갑게 일별하고 돌아섰다.

‘돌아갈 길은 없어.’

* * *

“아무리 그래도…….”

이반은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화려한 선상 파티가 열리는 크루즈의 갑판은 나직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검은 바다에 빛을 뿌리는 은은한 조명들이 빛나고, 손님들이 저마다 들고 있는 가느다란 샴페인 잔에 기포가 보글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간간이 아이들도 있고 퇴폐적인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나마 참아줄 수 있었다.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옆에 서 있는 렉스가 무심히 말했다.

#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 유도만능줄기세포. 이미 분화된 체세포에 외부에서 인위적인 자극을 주어 [...] 배아줄기세포와 비슷한 만능성을 획득한 세포. 윤병선, 유승권, “역분화줄기세포의 연구현황과 임상적용을 위한 과제” (J Korean Med Assoc 2001 May; 54(5): 502-510, 2011)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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