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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75화 (75/104)

75화. POSITIVE

“우와…….”

도영은 무표정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하가 땀에 젖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왔어?”

“지금 한 손으로 100킬로그램짜리를 들고 있는 거? 얘가 또 평범한 인간 박탈감 느끼게 하네.”

연하는 아령을 내려놓고, 막 헬스장으로 들어온 도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소령님도 딱히 ‘평범한 인간’ 범주에 들어가진 않는데?”

“소령님 요즘 아예 헬스장에서 살았거든.”

옆에서 운동하고 있던 리웨이가 말했다.

“미스터 코리아에라도 나갈 작정이신가 봐.”

“본업에 충실한 거죠.”

도영은 장갑을 끼면서 데드리프트 기계로 갔다. 연하는 바닥에 놓아둔 물병을 들면서 그를 보았다.

그러게. 인간도 저런 몸을 가질 수 있는지 몰랐는데 말이다.

“참, 강 상사 너 팔은…….”

도영이 갑자기 돌아보았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연하를 망연히 보았다. 어쩐지 서커스를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 앞에 연하가 들이켜는 2리터짜리 물병에 물이 하수구를 열어놓은 것처럼 꿀럭, 꿀럭, 꿀럭 요동치며 빠르게 수위가 낮아졌다.

“하마세요?”

도영은 기막혀하며 말했다.

“목구멍에 깔때기 꽂았냐? 무슨 물을 그렇게 들이부어?”

연하도 그제야 자신이 단번에 2리터를 비웠음을 깨달았다. 텅 빈 물병을 내리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거 물 아냐.”

“뭐?”

팔 운동을 하던 리웨이가 바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병을 뺏어서 냄새를 맡았다.

“진짜네. 이거 플로스잖아? 너 이 자식, 누가 이걸 이렇게 마시래?”

“배고파서.”

허기라고 해야 할지, 갈증이라고 해야 할지, 요즘 이상하게 플로스를 마셔도 포만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팩 두 개를 따서 동시에 마실 때도 많았다.

특히 운동이라도 좀 하고 나면 리터가 아니라 갤런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진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분명히 돼지 루아스가 될 거라고 할 테니까.’

하지만 리웨이는 염려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팔 때문인가?”

연하는 그런가 싶어 왼팔을 보았다. 이제 팔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연상 작용으로, 어두운 이미지가 다시 눈앞을 스쳤다.

번들거리는 눈들, 빛, 피…….

피.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도영이 걱정스럽게 말해, 연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얼떨떨했다. 그때 혀에 떨어진 피 맛이 생각나다니.

“그럴까? 안 그래도 안 한 지 좀 됐으니까.”

연하는 리웨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국장님께 보고서 내고 허락받았어?”

리웨이는 표정으로 ‘이 계집애가…….’ 라고 말했다. 도영은 고개를 내젓고 자리로 돌아갔다.

운동을 끝낸 연하는 물건을 챙기고 일어나 탈의실로 들어갔다. 리웨이도 운동이 끝났는지 들어와 캐비닛을 열었다.

그런데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리웨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뚫어져라.

“왜?”

연하는 옷을 벗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채 물었다.

연하의 몸은 깨끗했지만, 등에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있었다. 얼핏 보면 모기에 물린 자국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상식이 있는 어른이라면 다 알았다. 그리고 연하가 루아스라는 사실을 고려 했을 때 저렇게 자국이 남으려면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알 만했다.

“리웨이?”

연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불렀을 때에야,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벌거벗은 남자의 환영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냐.”

“싱겁기는.”

연하는 등을 둥글게 굽히고 팬티까지 마저 벗었다. 그리고 좀 더 안쪽에 있는 리웨이를 지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리웨이는 꼼짝 않고 있다가 연하가 지나가고 나서야 캐비닛에 옷을 넣으며 생각했다.

‘하여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니까.’

쾅!

갑자기 샤워실에서 굉음이 울렸다. 리웨이는 깜짝 놀랐다. 샤워실을 돌아봤지만, 이어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 뭐 하는…….”

지금 샤워실에는 연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바닥에 연하가 쓰러져 있었다.

선 채로 의식을 잃고 머리부터 넘어졌는지 머리 아래 바닥 타일이 얻어맞은 유리처럼 깨져 있었다.

“강연하!”

리웨이는 놀라 달려갔다.

* * *

“미끄러진 거라니까.”

의무대 침대에 앉은 연하가 말했다. 옆에 서 있는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엄청난 소리가 났다고. 기다려. 곧 파웰 대위가 검사 결과를 가지고 올 거…….”

“왔어요.”

열려 있는 의무대 문 너머, 의사가운을 입은 리웨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다가와 패드를 보고 말했다.

“별 이상 없어. 머리도 멀쩡하고. 차라리 바닥 타일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연하는 ‘거봐.’하고 말하듯이 도영을 보았다. 그래도 도영은 미간에 주름을 펴지 않았다.

“그렇게 쓰러졌는데요?”

“플로스를 과다섭취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네요. 아직 그런 부작용이 보고된 바는 없지만, 괜히 과유불급이라고 하겠어요?”

연하도 그런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하긴, 요즘 너무 마시긴 했다.

‘하여간 덕분에 이게 무슨 쪽인지…….’

의식을 잃은 그녀를 옮길 방법이 없어서, 마침 가장 근처에 있던 루아스이자 남자인 박 원사가 들것 노릇을 해야 했다.

리웨이가 담요로 덮어둬서 박 원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맹세했지만, 그보다 요즘 자꾸 실려 다니는 게 영 군인 본새가 살지 않았다.

도영은 팔짱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국장한테 연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장은 어제부터 출장을 간 상태였다.

“국장님한텐 왜?”

왜 부사관이 쓰러진 걸 국장한테까지─ 라고 말하듯이 연하가 멀뚱히 물어, 도영은 기가 막혀 그녀를 보았다.

“왜긴, 너님의 남자친구시잖아요.”

연하는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에 눈치를 보듯 물었다.

“알아……?”

도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누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의무대에 있는 사람들은 간호 장교들이고 환자들이고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냐는 듯.

연하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도영을 노려보았다.

“놀리지 마.”

옛말에 그런 말이 있었다.

헐, 씨발, 심쿵사.

이 쓸데없이 사랑스러운 흡혈귀를 어찌해야 할지,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국장이 앞으로 고생이다 싶었다.

“아서라, 아서.”

리웨이가 손을 내저었다.

“자기 허락 안 받고 검사했다고 얼마나 뭐라고 할지 벌써 머리가 아프…….”

“강 상사.”

그때 문이 열리고, 이반이 들어왔다. 모두 깜짝 놀랐다. 연하도 놀라 말했다.

“이…… 국장님. 출장 가신 게…….”

“소식 듣자마자 출발했어.”

누구한테 소식을 들었다는……?

모두의 머리에 질문이 떠올랐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괜찮아?”

“네. 그냥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예요.”

별것 아닌데 출장 간 사람까지 오게 해버려 민망하기도 하고, 둘 사이를 아는 모두가 보는 앞이라 연하는 쑥스러워 대답했다.

안 그래도 모두 이쪽을 연극 무대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이반은 리웨이를 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결과 좀 보죠.”

“네? 아, 네.”

멋대로 검사했다고 뭐라고 할 것 같았는지 리웨이는 바로 패드를 건네주었다. 이반은 한동안 심각한 눈으로 패드를 보았다.

그동안 의무대에 있는 모두 왠지 모를 긴장감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다렸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이반은 다시 패드를 리웨이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정말로.”

연하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나 이제 가도 되지?”

“그래.”

연하는 가자는 듯이 이반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이반은 이 동작의 의미는 뭔가 싶어 보았다.

연하는 어쩐지 주변 시선을 신경 쓰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무언가 아는 것 같은 능글맞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반은 피식 웃고, 분분히 사라지는 연하를 따라나섰다. 일단락되었다 싶었는지 나머지 사람들도 흩어졌다.

리웨이는 책상에 앉아 패드를 보았다. 화면에 패스워드를 치고 들어가자, 다른 검사 결과 화면이 떴다.

혹시나 하고 몰래 곁들여서 해본 검사였다. 그런데…….

떨리는 눈동자에 화면에 떠 있는 글자가 비쳤다.

* * *

시몬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화면은 옥상 수영장을 높이에서 비추고 있었다.

수영장 위로 조명들이 색색이 빛났다. 수영장 한쪽에, 한 몸처럼 얽혀 있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코트에 가려져 보이는 건 없었지만, 그들은 지금 세상이 멸망한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몰입해 있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남자는 위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차가운 눈으로.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지켜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시몬은 전화를 받았다.

“말해.”

시몬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들었다.

“뭐……?”

멍한 외마디를 내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그건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잖아.”

시몬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말이 없었다.

“일단 알았어. 끊어.”

시몬은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탁자에 완벽한 네일아트가 된 손을 올려, 손가락을끼리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왜?]

화면 가득 대공이 떴다.

게임을 하는지 헤드셋을 쓰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옆을 돌아보고는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르코프,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시몬은 그 모습을 보다가 태연하게 말했다.

“강연하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대공은 멈칫하고 그녀를 보았다.

[뭐?]

하지만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무너지듯이 등을 기대며 탄성을 냈다.

[와, 그게 사실이라니…….]

“뭔가 알고 있군요.”

시몬은 무표정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대공은 그녀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분명히 말해두지만 불가능해. 뱀파이어는 생식 능력이 없어.]

그는 확신했다.

[흡혈귀가 애 낳았다는 말처럼 황당한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그리고 감염 같은 편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인간처럼 번식할 필요가…….]

시몬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내 말 안 끝났어. 그런데 가끔 그런 가계가 있어, 생식 능력이 있는.]

시몬은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생식 능력이 죽지 않은 가계라고 해야 하나. 워낙 드문 일이라서 우리도 추측할 뿐이었지만, 특정 가계가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드문 일인데 꼭 몇몇 가계에서만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그 의미는……”

[이바노프가 그런 가계겠지.]

시몬은 애써 평온한 숨을 내쉬었다.

“이바노프 씨는 그런 언급은 없었는데요.”

[본인도 모르는 거겠지. 그 녀석, 자기 파트로네스가 어떤 녀석이었는지 모르잖아?]

“그래서 리웨이 파웰을 강연하 옆에 붙여놨군요.”

시몬은 발작적으로 말했다.

“강연하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문제는, 이바노프 본인도 모르는 사실을 대공이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 그것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입을 열었다.

“제게…… 아이가 있었습니까? 당신이 절 데려왔을 때.”

대공에 의해 구출되고 그녀는 며칠간 의식이 없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갓 감염을 겪은 스트레스와 부상 여파, 정신적인 문제 등 여러 개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눈을 시리게 만드는 천장 조명을 바라보며,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유달리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인간이 흡혈귀가 되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난 후였으니까.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뱃속에서 죽어 있었어.]

시몬은 화면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

대공에게는 이바노프가 임신할 수 있는 혈통이라는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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