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살아 있다면 사랑한다 (3)
규하는 북받치듯이 외쳤다.
“살아 있다면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어.”
그녀의 눈에 물기가 일렁였다.
“그럼 오래전에 흙 속에 묻혀 버린 난 널 탓할 수도 없지. 탓하면 그건 내가 나쁜 년일 테니까! 하지만 난…… 나는…….”
규하가 말을 끝내지 않고 멈추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규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렉스가 앞에 서 있었다.
렉스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자연스럽게, 규하는 그에게 깊이 안겨들었다. 그리고 울음을 삼키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다른 여자랑 자면 죽여 버릴 거야.”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잡니다.”
“말은 잘하지.”
렉스는 규하를 떼어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만났던 여성들이 아예 없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규하는 바로 눈이 험악해졌다.
‘질투가 많았구나.’
생각하며 렉스는 빨리 덧붙였다.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지금까지 제 인생에 여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었을 때 몰랐던 탓인지 왜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지 이해되지 않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수사였구나.’
규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당연히 죽기 전까지 깨끗한 몸이었을 것이다.
아니, 자신도 그렇고 요즘 같은 세상에 과거 따위로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기색을 읽었는지 렉스는 바로 이어 말했다.
“적잖은 세월을 살면서도, 이렇게 원하게 된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다들 말이야 쉽게 하지만…….”
렉스는 잡고 있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전혀 아프지 않게, 주목하라고 말하듯.
“제가 그들과 같아 보입니까?”
‘그들’은 불특정한 다수의 남자였지만, 규하는 갑자기 진리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한 대 얻어맞은 듯이.
그래, 역시 그녀는 아직 삼십 년밖에 살지 않은 인간 나부랭이였던가 보다. 이렇게 확실한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제 머리가 만들어낸 고민의 미로에 빠져 헤매고 있었다니.
“그러니까 안심하고…….”
창 너머의 빛에 비춘 렉스는 아름다웠다.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천 년 간 이 순간을 위해 타올라온 뭉근한 불처럼. 그 꺼지지 않는 빛처럼.
“절 사랑해 주세요.”
사랑을 갈구하는 흡혈귀라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짐승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끝에 뭐가 어떻게 될지는.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며 이 짐승을 사랑하지 않기에는, 너무 큰 것을 놓치는 일이었다.
규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이미 사랑하고 있어.”
한참 후에야 렉스는 규하가 아직도 쥐고 있는 장식품을 잡아 바닥으로 던졌다. 생각보다 약한 물건이었는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 * *
“무슨 생각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이반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연하에게 물었다. 무의식중에 미간을 찌푸리기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하는 생각에서 깨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그러고는 화제를 돌리려는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가리켰다.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이 꼭대기 층에는 뭐가 있어요?”
“수영장.”
“수영장이요?”
연하는 깜짝 놀랐다. 그 얼굴은 귀여웠지만, 이반은 의아했다. 수영장이 뭐 특별할 게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가봐도 돼요?”
* * *
“진짜 수영장이네요.”
그것도 생각보다 본격적이어서 감탄했다.
계절이 아니라서 옥외 수영장 외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음료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바와 테이블이 딸린 소파 자리, 한쪽에 작게 온천까지 있었다.
이반이 불을 켰다. 그러자 옥상 전체가 밝아지면서, 수영장 위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전선들에 걸린 색색의 조명들이 잔잔한 수면에 반짝임을 뿌렸다.
이반은 유난히 좋아하는 연하를 보면서 물었다.
“부대에 있지 않아? 시설도 좋은 걸로 아는데.”
“잘 안 가요. 다들 쳐다봐서. 악의는 없겠지만 뭐 다르게 생겼을 것 같은가 봐요.”
수영장 아래서 올라온 빛이 연하를 비추었다. 이제는 그런 사실이 속상하다기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어느 정도는 의외로 몸매가 좋은 편이라 그렇게 쳐다본 게 아닐까 싶긴 했는데, 별로 오해를 정정해 주고 싶진 않았다.
“수영할래?”
“해도 돼요?”
내심 기다린 제안인지 연하는 얼굴이 밝아졌다.
“당연하지. 근데 춥지 않겠…….”
잠깐 돌아본 사이에 연하는 옷을 벗고 있었다. 이미 재킷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올리느라 말을 듣지 못했는지 반문했다.
“네?”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춥지 않겠냐고.”
어쨌든 인상을 찡그리게 하던 생각에서는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잠수 훈련할 때 겨울 바다에 비하면 온천이죠.”
연하는 발목까지 끌어내린 바지를 운동화와 함께 차서 벗어냈다.
순식간에 속옷만 남기고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 같은 몸이 드러났다.
연하는 바로 바닥을 짚고 물로 들어갔다. 물 만난 개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웃으며 보고 이반은 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연하는 물속에서 다리를 휘저어 돌아보고는 물었다.
“이반도 들어올래요?”
이반은 웃었다.
“괜찮아. 할 게 좀 있어서.”
그녀가 수영하는 동안 일할 생각인지 패드를 꺼내 들었다.
연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먼 곳으로 나가서 잠수했다. 몇 번 헤엄치다가 몸에 힘을 빼자 무게 때문에 금세 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연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생각에 빠졌다.
규하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실감했다.
물론 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감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녀를 지켜온 세월이 뭐였나 싶을 정도로 낯선 깨달음이었다.
어쩌면 그건 무의식중에 가진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누구든 규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어쨌든 그녀는 루아스치고도 힘이 좋은 편이었고…….
하지만 세월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죽음에서만큼은 규하를 지킬 수가 없었다.
심란해져, 안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 손을 머리 아래 받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렇다고 감염시킬 수도 없잖아.’
다른 이유를 다 제쳐 놓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극히 희미하기 때문이었다. 감염시키지 않는다면 적어도 규하가 성질 괄괄한 할머니가 될 때까지는 함께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감염시킨다면, 실패하는 그 순간이 마지막─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져, 연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수영장 먼 곳을 쳐다보았다.
‘꼭 이솝우화의 뼈다귀를 문 개 이야기 같네. 수면에 비친 뼈다귀를 갖고 싶어 하다가 이미 물고 있는 뼈다귀마저 물에 빠뜨려 버리는 거야.’
어쩐지 우울해질 것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세를 풀고 수면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저 멀리 소파에 앉은 이반은 패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연하는 무슨 생각이 들어, 다시 조용히 물속으로 잠수했다.
* * *
이반은 고개를 들었다. 한참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패드를 내려놓고 수영장 가에 섰다. 푸른 조명이 올라오는 수영장은 비어 있었다.
“연하야?”
기척─
이반은 몸을 조금 틀었다. 그를 밀려 했던 연하는 그대로 허공에 쏟아졌다.
그가 피할 줄은 몰랐는지 아차 싶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근육의 힘으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그의 팔을 잡았다. 물론 이반은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촤아악.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질량 차이로 연하보다 더 무거울 수밖에 없는 그는 빠르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연하는 침몰선 주위를 맴도는 인어처럼 헤엄쳤다. 장난이 성공해서 즐거운지 몸짓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사랑하는 육체는 몸짓마저 사랑스러워, 이반은 오래전에 침몰선에 갇혀 죽은 선원의 썩은 육체가 생명력으로 넘치는 인어를 동경하여 바라보듯 연하를 지켜보았다.
수면에 쏟아지는 색색의 불빛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빛을 이고 헤엄쳐오는 그녀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아주 많은 것을 보아온 눈에도 낯설었다.
연하는 물속에서 이반을 마주 보았다.
구두에 코트까지 그대로여서 그는 배가 난파당해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조난당했다고 하기엔 너무 침착하지만, 푸른 물속에서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연하는 왕자를 본 인어공주의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목소리 따위 아깝지 않아.’
이 사람과 하룻밤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이반.
연하는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입모양으로 말했다.
사랑해요.
* * *
두 사람은 수면을 깨고 올라왔다. 머리부터 물의 장막이 쏟아지고, 입술이 거칠게 맞부딪쳤다.
그는 연하를 밀어붙였다. 등에 수영장 벽이 닿았다. 잠깐 숨을 쉴 새밖에 없었다. 다시 입술이 덮쳐 왔다.
연하는 정신없이 그가 입은 코트를 벗기려다 물에 휘감겨 있는 와이셔츠까지 뜯어버렸다. 물에 젖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연하는 오히려 찢어진 와이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등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날 잡아.”
그는 뜨거운 숨을 끼얹으며 속삭였다. 연하가 그를 끌어안자, 마치 수영장 전체가 그녀에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연하는 숨을 몰아쉬며 이반의 얼굴을 감쌌다.
그에게 빛이 쏟아졌다. 그의 눈에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빛들이 있었다.
다가오는 그를 받아들이며, 그녀는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신기해했다.
* * *
이반은 연하를 안은 채 수영장 바를 잡고 올라왔다. 엄청난 양의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코트를 벗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연하가 잡아 뜯은 와이셔츠는 풀어 헤쳐져 있고 바지도 잠그다 만 상태였다.
“연하야.”
그의 어깨에 거의 축 늘어져 있는 연하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힘들어?”
“네, 조금…….”
온몸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주위로 수영장 물 온도가 적어도 5도는 더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연하의 배에 닿아 있는 제 손이 인식되었다.
이반은 피식 웃었다. 연하가 몽롱한 눈에 의문을 담고 그를 보았다.
“왜 웃어요?”
“그냥. 좋아서.”
“저도 좋아요.”
연하는 힘들어서 그런지 더 묻지 않았다. 귀엽게 웃으며 웅얼거리고는 그의 어깨에 늘어졌다.
이반은 조금 눈을 내리깔았다.
손바닥 아래 연하의 배가 따듯했다.
참, 사람의 욕심이란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지다니.’
인간이었을 때 삶에서 그리운 것은 없었다. 단 하나, 꼭 그를 닮은 금발이 눈부셨던 아이를 빼고는.
아이는 유복자였다.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 그는 죽었고-죽었다고 알려지고- 따라서 실제로 만난 적도, 부자 사이의 정을 느껴볼 새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겼음을 알았을 때 그는 세상을 전부 가진 것보다도 기뻤다.
태어나는 그 순간만을 누구보다 고대해왔다.
결국 실제 제 핏줄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멀리서나마 지켜봤을 때 태어난 아이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도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후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겐 모든 걸 설명해 주고 가르쳐 줄 파트로네스가 없어서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도 알지 못해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감염되고 수십 년은 제 정체를 알아내는 데 골몰했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 아이만이 아니라 이미 그가 세운 모래성조차 사라지고 난 후였다. 세차게 들이치는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그것이 저 짧고 눈부신 자들의 숙명이라면.’
그렇게 무심히 생각하고 돌아섰지만, 입안에 쓴맛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이후 단 한 번도 아이 같은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하의 아이라면…….
연하를 닮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아이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졌다.
움켜쥐고 있느라 축축한 작은 손, 시금한 우유 냄새, 보드라운 배내털 같은 것이 이미 실제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반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거야말로 부질없는 생각이군.’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이런 상태로도 잘도 자고 있었다. 웃음이 샜다.
‘더 바라는 게 양심 없는 짓이지.’
이반은 연하를 안은 채 아래로 내려갔다.
* * *
콰르륵.
변기에 물보라가 소용돌이치면서 물이 내려갔다.
“연하야.”
문밖에서 이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갈게요.”
연하는 문을 돌아보고 대답하고, 이제 잠잠해진 수면을 보았다. 배를 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뭘 잘못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