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살아 있다면 사랑한다 (2)
“자매끼리 몸싸움 좀 했다가 골로 갈 판이네.”
이제 슬슬 제집처럼 느껴지려고 하는 응급실 침대에 앉아, 규하는 굽힌 다리에 팔을 걸친 불량한 자세로 중얼거렸다. 이마에는 핏기가 비치는 습윤 밴드가 붙어 있었다.
연하가 당황해 휘두른 손에 이마가 찢어져서 다섯 바늘을 꿰맸기 때문이다.
스친 건데 말이다. 맞은 게 아니고.
침대 옆에 서 있는 이반이 말했다.
“옛날 같을 순 없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죠.”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규하는 울컥해 이반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삐친 아이처럼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혼잣말했다.
“내가 가장 잘 아니까.”
“미안해.”
이반 옆에 있는 연하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규하는 한숨을 쉬며 연하에게 손을 뻗었다. 연하는 그 손을 잡았다.
“괜찮아. 먼저 못된 말을 한 건 나였고.”
안 그래도 잔뜩 곪아 있는 예민한 부분을 연하가 찔러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어린애처럼 반응해 버리다니, 나도 진짜 인간이 되려면 멀었구나.’
한동안 앉아 있다가, 연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일어났다.
“아, 소장님. 잠깐만요.”
그리고 퇴원 수속을 하고 있는 렉스에게로 갔다.
그런데 시선을 느낀 규하가 돌아보니, 국장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예요?”
아무래도 이 남자한테는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연하를 살려준 건 고맙지만, 결국 제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말이다.
“쌍둥이라서 좋은 점도 있군요.”
“뭐가요?”
“어쨌든 연하가 인간이었다면 지금 이런 얼굴이었겠구나 싶어서.”
연하가─ 어떤 소유형의 표현을 들은 것보다 기분이 묘했다.
“남의 얼굴 보면서 멋대로 상상하지 마세요.”
이반은 피식 웃었다. 무슨 말로도 흔들 수 없을 것 같은 여유로운 모습에 규하는 기분이 더 묘해졌다.
‘연하의 상대로 이런 타입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오히려 연하만큼 어리바리해서 세상 착한 제부, 몸도 좀 동실해서 곰 같은 타입을 상상했다.
둘 다 저리 착해 빠져서 이 험한 세상 어찌 헤쳐 가겠나, 역시 내가 잘 돌봐줘야지,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뭐…….’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이반이 갑자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화제 널뛰는 소리예요? 도통 따라가질 못하겠네.”
이반은 입구 쪽으로 고갯짓했다.
“규하 양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규하는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묻기 전에 다음 질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다.
“그럼 저쪽은 손해 볼 일이 있을 거란 의미인가요?”
“어쨌든 나머지 세월을 버티는 건 저희 몫이니까요.”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파도.”
규하는 이반이 말을 끝내자마자 말했다.
“지나간 건 잊혀요. 잊혀야 하고요.”
“잊히는 게 무서운 겁니까?”
이반은 조금 의외라는 투였다.
“제대로 기억되기도 전에 말이죠.”
규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 이반은 알고 있다는 듯이 조금 웃을 따름이었다.
정말, 이런 타입은 싫었다.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래서 연하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들여다볼 것도 없으니.
“그거 처음이었어요.”
규하는 갑자기 다른 소리를 했다. 이반은 의아해했다.
“저도 좀 따라가기 어렵군요.”
“그거 연하의 첫 키스였다고요.”
이반은 뭘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연하를 감염시킬 때.
연하가 피를 마실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규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처음으로 치지 않을 거예요. 연하의 모든 ‘첫’이 당신인 게 용서가 안 된달까……. 저 멍청이는 살면서 연애도 하지 않고 뭐 했대요? 보아하니 마지막도 당신일 것 같은데, 영원히 살면서 당신 하나 아는 게 무슨 재미라고.”
이반은 수속 창구 앞에 서 있는 연하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연하는 온전히 그로만 채워진 존재라는 사실을.
“다양한 경험이 선호되는 세상이라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거죠.”
규하는 ‘헐’이라는 글자가 쓰인 얼굴로 그를 보았다.
“대박, 어쩜 멀쩡한 얼굴로 그런 소리를…….”
이반은 간지럽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규하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은 아주 다양하게 경험해 보셨을 텐데요. 불공평하잖아요?”
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늦게 찾은 불행한 남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을 말죠. 의외로 실없는 구석이 있었네요, 당신.”
이반은 또 조금 웃을 따름이었다. 수속을 끝낸 렉스와 연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반은 규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참고로 저 녀석도 피를 마실 의식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
규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이해했는지 가차 없이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연하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반은 규하에게 물어보라는 듯 고갯짓했고, 규하는 묻지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천 년이나 지나지 않았으면 내 입술을 잘라낼 뻔했다는 이야기야.”
연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는지 말했다.
“수속 끝났어. 가도 된대.”
이반이 연하의 어깨를 짚었다.
“가자.”
“어…….”
연하는 소리를 내면서 규하를 보았다. 규하는 가버리라는 듯이 손짓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건강한 거리감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제 쌍둥이에게 어린애처럼 굴고 싶었던 건 자신이었는지도 몰랐다.
국장을 싫어했던 이유도, 괜히 생짜를 놓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어른스러운 건 연하 쪽이었달까…….
“내일 전화할게. 이마 조심하고.”
“아무렴 알아서 할까. 박수칠 때 떠나라.”
연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이반과 응급실을 나섰다. 보는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
“보기엔 아무리 봐도 원조교제인데 묘하게 어울리네.”
중얼거리는데, 렉스가 병원 매점에서 사온 슬리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안겨 나왔기 때문이다.
“저희도 가죠.”
규하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문짝이 그 지경 났는데 집에 가라고?”
“아뇨.”
렉스는 어쩐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호텔로 갈 겁니다.”
* * *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호텔 카운터 직원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렉스가 열쇠를 받아 돌아섰다. 규하는 정중한 미소를 띤 철가면 아래로 그녀를 훑는 직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집에서 입는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에 렉스의 코트를 걸치고 이마가 찢어진 몰골이었으니까.
‘이건 데자뷔인가.’
저번에 호텔 레스토랑 직원이 꼭 이런 눈으로 그들을 봤었는데 말이다.
‘하필 이 자식은 오늘따라 때깔 좋게 하고 나타나서.’
저번엔 둘 다 차림이 그래서 무림의 숨은 고수들처럼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 ‘알고 보니 재벌 커플’ 느낌이라도 줬을 텐데, 오늘은…….
규하는 렉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 공식적인 자리라도 다녀왔는지 정복 차림이었다.
“여기 비싸지 않아? 나중에 더치 해달라고 해도 소용없어. 교사 9호봉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렉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그렇게 한마디 하고 말이 없었다. 눈이 아프도록 번쩍이는 금색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얼굴도 무표정했다. 규하도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갈 때도 둘은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데면데면했다.
렉스는 호텔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규하는 들어갔다. 현관에 서서 봐도 상당히 비싼 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옷장에 있는 가장 좋은 정장을 입고서도 들어서기 미안할 정도인데, 지금은 뭐…….’
갑자기 렉스가 뒤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규하는 흠칫 돌아보았다.
그가 짚은 것은 벽이 아니라 AI의 중앙 패널이었다. 안심하기를 잠깐, 조명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남은 빛은 창 너머 타오르는 도시의 불빛뿐이었다.
어둠 속에 붉은 눈동자가 규하를 응시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물러났지만 금세 그가 따라왔다. 하지만 규하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리진 않으니까.
‘불평은 했지만…….’
안 그래도 오늘 그가 유난히 때깔 좋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조금…… 아니, 상당히 그런 기분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렉스는 규하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가까이 왔다. 그녀는 눈을 낮게 떴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런데 입술이 맞닿는 대신 그가 속삭였다.
“키스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규하는 멈칫했다.
“전 장난감이니까요.”
규하는 홱 고개를 뗐다.
렉스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역시 연하와 한 이야기를 들었던 거였다.
규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네가 장난감이 아니고 뭐야? 우리 사이에 몸 말고 뭐가 있는데? 아무리 그래봤자 넌 흡혈귀고…….”
“그래서 키스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규하는 렉스를 밀치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놔!”
규하는 울컥해 손을 날렸다. 하지만 렉스는 숨 쉬는 것보다도 쉽게 팔을 붙잡아 막았다. 지금은 당해줄 마음이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양팔을 문에 밀어붙이며 왈칵 키스했다.
규하는 문에 못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팔 대신 다리를 버둥거렸다. 거의 그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공간이 없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난감.’
처음에는, 침대 위에서 오가는 은밀한 농담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도 오히려 즐겼던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을 줄은…….
그녀에게 키스한 순간부터 그는 진심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태 고작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을 줄은, 그게 그가 흡혈귀라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 숨 막혔다.
숨이 막히는 만큼 그녀의 것까지 여분의 폐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격하게 키스했다.
그런데 규하는 천천히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규하는 잠잠했다.
그런데 몸이 희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렉스는 흠칫 놀라 몸을 뗐다.
“놔.”
규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겨우 말하는 것처럼. 눈은 금방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그렁거렸다.
글래디에이터에게 목이 붙잡혀서도 욕지거리를 날려주는 여자를 자신이 울게 만들었다는 데 렉스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합니다.”
렉스는 규하의 볼을 감싸기 위해 손을 올렸다가 차마 손대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규하는 렉스를 노려보더니 밀치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최악의…… 정말로 최악의 기분이었다.
렉스는 화장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규하.”
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들려왔다.
렉스는 한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숨을 몰아쉬는 소리는 진정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가 혼자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만 가겠습니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오늘은 이곳에 묵고 가세요.”
렉스는 혹시 몰라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반응이 없어서 숨을 길게 내쉬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오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렉스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돌려 날아드는 물건을 피했다.
샴푸 통은 문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게 다야?”
규하는 버럭 소리치며 이번에는 린스 통을 던졌다.
“규…….”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키스하고…… 멋대로 내 마음에 쳐들어와 놓고…….”
규하는 두리번거리며 뭔가 더 던질 걸 찾는 것 같더니, 화장실 안쪽에 있는 장식품을 꺼내와 던지려는 듯이 홱 손을 들었다.
“흡혈귀라고 하면 다냐고!”
하지만 규하는 장식품을 던지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난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고 널 사랑해야 돼?”
렉스는 반응할 수 없었다.
“난 파파 할머니가 돼서 늙어 죽어도 너는 영원히 이, 이, 이.”
규하는 성질은 치받히는데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지 장식품을 들고 있는 손으로 그를 마구 손짓하며 더듬거렸다.
“몰라, 이 모습으로 남을 텐데!”
규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가 겨우 조금 진정하고 말했다.
“물론 네가 정말 못돼먹은 냉혈한이거나 날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러니까 아마 한동안은 날 기억하며 자중해 주겠지. 아니, 진심으로 몇십 년 정도는 정절을 지킬지도 몰라.”
규하는 손을 내리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넌 살아 있잖아.”
그리고 북받치듯이 외쳤다.
“살아 있다면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