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살아 있다면 사랑한다 (1)
연하는 저번에 왔던 펜트하우스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이반의 물건도 거의 없어서 정말 모델하우스 같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TV를 조금 본 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일어났다.
‘심심하네.’
하릴없이 집을 둘러보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어, 저건.’
침대에 이반이 벗어 놓은 거로 보이는 정복이 놓여 있었다. 어딘가 정복을 입고 갔다가 여기 들러서 갈아입고 왔던 모양이다.
연하는 반듯하게 놓여 있는 정복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를 못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애틋할 정도로 그리워지고 말았다. 규하에게나 느끼던 마음을 남자를 상대로 느낄 줄은 몰랐다. 물론 규하에게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이쪽은…….
연하는 혼자 있는데 괜히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생각을 그만뒀다. 그리고 옷을 들고 드레스룸 쪽으로 갔다.
지잉.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자동문이 열리고, 연하는 멈칫했다.
텅 빈 옷장 안에 딱 하나 걸려 있는 건 검은 드레스였다.
검은 실크 이브닝드레스.
정면에 걸려 있는 드레스는 마치 마네킹이 입고 있는 베트맨의 슈트처럼 그녀를 마주 보았다.
연하는 정복을 옷걸이에 걸고 드레스 앞으로 다가갔다.
‘이건 왜…….’
고급스러운 천에 연한 윤기가 흘렀다.
언뜻 마담 X를 떠올리게 하는 검은 드레스는 이반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톤이 다운된 것을 좋아하는.
아래쪽에 원래 드레스가 들어 있었던 것 같은 은회색 상자가 있고, 그 위에 카드가 놓여 있었다. 멋대로 열어봐선 안 되겠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남자친구…….
어, 그래. 남자친구.
연하는 거기서 한 번 괜히 혼자 수줍어한 다음에 계속 생각했다.
남자친구 방에 여자 드레스가 떡하니 걸려 있는데 어느 여자가 호기심을 참을 수 있을까?
연하는 카드를 펼쳐보았다.
<강 상사님이 좋아하시면 이바노프 씨도 좋아하실 테니까요.>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연하는 드레스를 옷걸이 채 꺼내 제 몸에 대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이즈가 딱 맞았다. 아래쪽에 놓여 있는 구두도 발에 대보니 제 사이즈였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발신인이 누구든지 간에 그녀에게 줄 셈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왜 주지 않고……?’
궁금해하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제게 어울리는 건 이거예요.”
‘혹시 취임식에서 한 말 때문인가?’
연하는 바깥쪽을 살폈다. 누가 오는 기색은 아니었다.
드레스를 들고 욕실에 붙어 있는 탈의실로 갔다.
탈의실은 거울만 덜렁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나의 독립된 공간처럼 테이블과 로만 카우치가 놓여 있고, 한쪽 유리 벽 안에는 테라리움처럼 작은 정원까지 꾸며져 있었다.
연하는 티셔츠와 바지를 벗고 드레스를 입어 거울에 비춰보았다.
‘브라가 드러나서 태가 나지 않네.’
브라까지 벗고 다시 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보았다. 이리저리 돌아보니, 워낙 얇고 함함한 재질 때문에 이번에는 팬티 자국이 드러나 태가 살지 않았다.
드레스를 들춰 팬티까지 벗어냈다. 하는 김에 한 갈래로 묶은 머리를 풀어봤다. 마침내 그럭저럭 볼만한 것 같았다.
‘화장기가 너무 없긴 한데…….’
그때 기척이 느껴졌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문가에서 이반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로.
* * *
이반은 펜트하우스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부른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의 결재가 필요한 일은 맞았으니 말을 삼켰다.
사실 그 말을 하는 시간에 빨리 연하에게 가자 싶었기 때문이다. 아까 하마터면 그대로 차를 세우고 이쪽으로 직행할 뻔했으니 말이다.
욕실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샤워 중인가?’
하지만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욕실로 통하는 탈의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전면 거울에 연하가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다. 이반은 멈칫했다.
연하가 그를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깊숙한 V 자로 파인 등에 진주로 장식된 금줄이 가로질러 늘어진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그 너머 그녀를 응시하는 그가 있었다.
“이런 거 좋아해요?”
온몸을 물처럼 타고 흐르는 실크 위를 그의 시선이 따라 흘렀다.
“잘 어울려.”
이반은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왔다.
“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역시 그때 취임식에서 한 대답 때문에 오해한 것 같았다.
“좋아해요. 예쁜 옷 싫어하는 여자는 없잖아요.”
“그래?”
“그냥, 이런 건 입고 뛸 수가 없으니까…….”
말하며 고개를 드는데, 그가 아까보다 가까웠다.
“다행이네. 내가 너무 옛날 남자처럼 구는 건 아닌가 싶어서.”
연하는 움찔했다.
‘어라, 나 왜…….’
새삼 움찔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상대는 이반인데. 나중에야 성적인 긴장감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이반은 조금 웃었다.
“옛날 남자는 맞지만.”
이미 입술이 거의 맞닿을 것 같은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입술이 간질간질했다.
“키스해 줘.”
연하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키스했다. 그동안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매끄러운 천을 쓰다듬으며 내려가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소유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래도 벗었구나.”
연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자국 때문에…….”
별생각 없이 벗었는데, 뭔가 바랐던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뜨거운 유혹이라니.”
“그런 건…….”
“아니야?”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루브르 박물관에 세워진 비너스 여신상도 이런 찬탄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라면 수줍음에 얼굴이 타오를 듯했겠지만, 거의 숭배에 가까운 남자의 눈빛에 제 안에 숨은 여성성이 활짝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았다.
연하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드레스의 어깨끈을 잡고, 벗어 내렸다.
하늘거리는 천이 공기를 타고 물결치며 파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그에게 사랑받을 준비가 된 몸.
“맞아요.”
이반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후궁 여자들 사이에서 연하를 선택했을 거냐고?
아니, 생각해보니 틀렸다. 그는 연하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속절없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 * *
갑자기 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연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 그런 행동을 하다니……!’
아마 몸부림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규하의 집에 저녁을 먹기 위해 와 있지 않았더라면.
찌개를 냄비 받침에 내려놓은 규하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건 무슨 표정이야?”
“무슨 표정?”
연하는 흠칫했지만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물었다.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 막 발광하는 것 같은 얼굴.”
하여간 이렇게 눈치가 빠르다.
연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겠다. 된장찌개야?”
규하는 영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말하진 않았다. 문 쪽으로 고갯짓했다.
“저 사람들 밥은 먹고 일한대?”
“나라에서 굶기진 않아.”
이제 경호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중요한 임무에 참여하는 대원들은 직계 가족까지 경호대상에 포함시킨다고 말해두었는데, 규하가 진심으로 믿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팔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그날 연락도 하지 못하고 갔어.”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알게 되면 규하가 어떻게 반응할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기사라도 터뜨릴지 몰랐다.
“그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영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이었는데,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자 넘어갔다.
대공 쪽에서 움직이면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경계하고는 있지만, 사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마조마했다. 다시 죽은 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기쁘면서도 우려되는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맛있다. 요리라고는 못하더니.”
연하는 찌개를 떠먹고 말했다.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이었으니까.”
규하는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찌개를 뜨던 연하는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가셨는지 알아?”
규하도 손을 멈췄다.
“사고의 충격으로 뭘 느낄 새도 없었을 거라고 하더라.”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공기가 무거웠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었다. 하지만 정말 심정적으로 이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둘뿐이니까…….
규하는 보글거리는 찌개를 응시했다.
“가끔 잠깐이라도 느낄 새가 있어서 우리 걱정을 하셨으면 어쩌나 생각해.”
“응. 분명히 그러셨을 테니까.”
“그러셨겠지.”
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먹자.”
“응.”
갑자기 규하가 고개를 들었다.
“하긴, 네 걱정은 하셨어야 맞겠다. 대체 뭔 소리를 들었는지 군인 같은 게 되어 있지를 않나, 속에 능구렁이가 득시글거리는 정체 모를 남자랑 사귀지를 않나.”
연하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이반이 어때서?”
“야, 솔직히 사람이 마흔만 먹어도 세상의 단맛, 쓴맛 다 보고 능구렁이가 되는데 그 남자는 능구렁이 조상이 와도 한 입 거리일걸. 그런데 네가 상대된다고?”
“왜 굳이 상대해야 하는데? 난 그냥 이반이 좋을 뿐인데.”
규하는 기겁했다.
“뭐 이런 부끄러운…….”
“그런데 소장님도 오래 사신 걸로 아는데?”
규하는 다시 밥을 먹으며 더 이상 심상할 수 없게 말했다.
“너랑 나랑은 경우가 다르지. 걔는 장난감이야. 힘세고 오래 가는 장난감.”
현관문 너머, 이반은 흘긋 렉스를 보았다. 렉스는 무표정했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에 자매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누를 타이밍을 놓쳤고,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더더욱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연하도 대화에 정신이 팔려 바깥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뭐? 너 그렇게 멋지고 상냥한 분한테…….”
연하는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이반은 다시 흘긋 렉스를 보았다.
칼춤 한 번에 ‘멋지고 상냥한 분’이 되다니, 그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멋지고 상냐앙? 너 걔 좋아하냐?”
이번에는 규하가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이반이 좋다니까.”
“그럼 왜 그쪽한테 껄떡거려?”
연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기분이 상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너한텐 소장님이 아깝지.”
이어서 숟가락으로 탁자를 때리듯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야, 강연하!”
“뭐, 왜?”
“너! 이……!”
“무슨, 하지 마! 아프…… 아니, 아프진 않지만, 아, 아, 잡아당기지…….”
이반은 애써 참았다. 자매 싸움에까지 끼어들면 팔불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미 연하의 가족에게 밉보이고 있는 것 같아서…….
악!
그런데 쿵 소리가 나면서 비명이 울렸다. 규하의 목소리였다.
얼음 조각처럼 굳어 있던 렉스가 당장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큰소리에 연하가 놀라 돌아보았다. 그 옆에 규하가 이마를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너 언제……!”
손 아래로 렉스를 보더니 놀라 외치려는 규하를, 렉스는 구둣발 채 안으로 들어가 단번에 안아 들었다.
“무, 무슨……!”
허우적거리면서 이마에서 손을 뗀 규하는 제 손에 흥건한 피를 보고 더 놀랐다.
“이게 뭐……. 나 쟤 손에 스쳤을 뿐인데?”
렉스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이반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렉스는 복도 난간에 한 손을 짚었다.
“부서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잠깐, 너 뭐하는 거야?”
규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래에서 솟구친 바람이 얼굴에 훅 끼쳐 왔다. 명치가 섬뜩해졌다.
“이러는 편이 빠릅니다.”
렉스는 난간 밖으로 뛰어내렸다.
“여긴 8츠으으으으ㅇ……!”
기겁하여 외치는 소리는 어둠 속으로 긴 꼬리를 늘이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