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스투포르 문디- “세상의 경이” (2)
이반은 연하의 팔을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아주 살짝, 그 손짓에도 닳아버릴까 걱정하듯이.
연하는 그의 품에 깊이 안겨 있었다. 몸이 너무 나른해서, 의식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이반이 속삭였다.
“응……. 안 해요.”
연하는 반쯤 잠에 잠겨 대답했다.
“인간들 사이에 사는 일이라도.”
연하는 고개를 들어 이반을 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까 그 장미 꽃다발도 옛날에 그녀가 대공에게 받은 장미 꽃바구니에 대한 기억을 상쇄시켜 주기 위해 사 왔으리라.
“이반. 소장님과 필립 씨, 저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요.”
연하는 갑자기 말했다.
“무슨 공통점?”
뜬금없는 이야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을 모두 감염시킨 그로서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태어난 시대도,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인 세 사람이 같은 거라고 해봤자 그의 클리엔테스라는 점 정도…….
“죽는 순간에 남을 생각했다는 점.”
이반은 그녀를 보았다.
“소장님은 죽어가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냐고 물었고, 필립 씨는…… 아내를 불렀고, 저는, 사실 그건 아직도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규하를 구해달라고 했다고 했죠? 잘 생각해 봐요. 이반이 감염시킨 사람들은 모두 그렇지 않았어요?”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웬만하면 클리엔테스를 만들지 않으려는 이반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런 점이 아니었을까요? 너무 많은 걸 봐와서 환멸감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반은 믿는 거예요.”
“…….”
“그래도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들만 사는 세상만은 아닐 거라고. 물론 부국장님 같은 사람도 있지만…….”
부국장이 차별한다고 인식하고는 있었구나, 생각했다.
“사실 부국장님도 싫어하진 않아요. 이상한 방향으로 너무 열심히 해서 그렇지, 나름 귀여운 점이 있거든요.”
몽롱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까 생각하며 이반은 차진 볼을 만지작거렸다.
“포기하지 말아요. 이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덕분에, 내가 이반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난…….”
연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잠들었다. 그의 어깨에 볼이 척 눌어붙어 있었다. 부드럽고, 따듯하고, 말랑하고…….
스투포르 문디(Stupor mundi). ‘세상의 경이’라는 별명은 프리드리히 2세가 아니라 연하에게 줬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볼을 쓰다듬는데, 갑자기 그녀가 씁 침을 삼키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언젠가는 제가 포기하고 싶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그땐 이반이 날 잡아줘야 해요.”
그러고는 정말 잠들었다. 이반은 피식 웃어버렸다.
할머니같이.
이반은 연하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래, 어쨌든 경이가 마르지 않는 세상이니까.
* * *
[학살극을 막고 싶다면.]
천장이 높은 공간, 스피커를 통해 렉스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당시 야크트훈트 소장은 이바노프 국장에게 민간인을 학살할 의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 아닙니까?”
참고인 석에 앉아 있는 렉스는 자신에게 맞게 마이크를 조정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학살극’이라는 단어를 해명하는 렉스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오른쪽 피고인석에는 렉스처럼 정복을 입은 이반이 앉아 있었다.
인간, 그것도 민간인에 대한 공격혐의로 회부가 된 군사재판이었다.
“폐정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일어나 자리를 비우고, 이반도 군 변호사와 밖으로 나왔다. 렉스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변호사는 렉스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이반을 돌아보았다.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페인 전 총장님께서 돌아가시고 이쪽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해서 말이죠.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서 오히려 이렇게 툭툭 찔러보는 거니까요.”
이반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렉스와 이반도 법원을 나섰다. 계단 아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렉스는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강 상사를 참고인으로 소환하지 않은 건 진심으로 이쪽을 자극할 의도는 없다는 의미로 풀이되는군요.”
“그래 보이는군.”
이반은 기분이 썩 유쾌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려한 것만큼 분노한 학살자 모드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재판 내내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침착했다. 다소 공격적인 질문에도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다 뒤집어엎으실 줄 알았습니다.”
SN 서사하라 조병창 습격 사건은 공론화되지 않았다. 위쪽에서도 사건은 파악하고 있지만, ‘그룹 내 파벌 간의 투쟁으로 인한 전멸’ 정도로 결론지은 것 같았다.
애초에 피해자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테러리스트기도 하고, 본능적으로 거기까지는 파고들면 안 된다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렉스도 소식을 듣고 당장 출동했지만, 이반은 이미 모든 일을 끝내고 은둔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데 오늘 아침,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어제도 출근했던 것처럼. 강 상사도 부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것 같았지만-오히려 이제야 그렇게 된 게 놀라울 정도지만-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기에 법원에 오면서도 우려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너희 둘 다 MCTC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클리엔테스들을 실직자로 만들 수는 없잖아.”
이반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어쨌든 처음으로 인간과 협력해서 무언가를 한 거니까요. 아직은 가능성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이반은 허공을 보고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내 팔자가 어찌나 사나운지.”
“다음 생엔 클리엔테스들을 두지 않는 쪽을 추천합니다.”
“참고하지.”
이반은 어깨 넘어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지만 말이야.”
그리고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더니 돌아보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내 녀석들끼리 다시 이러지 말자고. 소름 끼치는군.”
렉스는 차가운 무표정이었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기한 차 앞에 서자, 이반이 말했다.
“먼저 돌아가.”
“어디 가십니까?”
이반은 그를 보았다. 그걸 꼭 물어야 아느냐는 듯.
“데이트.”
* * *
“너 어디가?”
도영이 뒤에서 물었다. 조용히 사라지려던 연하는 움찔하고 돌아보았다.
“어…….”
연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괜히 복도 쪽만 가리킨 채로 말을 흐렸다. 도영은 깨달은 듯 손을 휘저었다.
“아, 그래. 가라, 가.”
꼭 개를 내쫓듯이.
오늘 아침 출근했을 때는 거의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흘릴 태세더니 몇 시간 만에 옆집 개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도영은 갑자기 돌아보고 말했다.
“무리하지 마라.”
“무슨 무리?”
연하는 정말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저건 평생 저럴 거야.”
도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누구한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일단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한 번 보고 걸음을 옮겼다.
* * *
차창 너머로 보이는 연하는 광장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앞으로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다녔다.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확실히 연하는 언뜻 보면 수수한 느낌마저 있었다. 예쁘장한 편이기는 해도 어디서나 눈에 띌 만큼 화려한 얼굴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만약 연하가 그가 인간이었을 때 후궁에 들어온 여자 중 하나였더라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어제 그가 물었을 때였다. 연하는 질문이 뜻밖인 것 같았지만 바로 대답했다. 늘 생각해 온 것처럼.
“같이 길을 걷고 싶어요.”
“길?”
“네. 평범한 연인 같잖아요.”
그러면서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끌어안자,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또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연하가 후궁 중 하나였더라도 그는 그녀를 골랐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는 아기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사람 혼을 빼놓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반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옷은 갈아입고 왔기 때문에 평범한 정장 차림이었다.
“연하야.”
반대쪽을 보던 연하가 돌아보았다.
“이반.”
“오래 기다렸어?”
“아뇨. 금방 왔어요.”
연하는 일어나며 대답했다.
“근데 어디 다녀왔어요? 청사에 없던데.”
“잠깐. 일 보러.”
이반이 손을 내밀었다. 연하는 맞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겉보기로는 나이대가 묘해 보이기 때문이리라.
“특별히 따로 걷고 싶은 길이 있던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니에요. 준비물은 이반만 있으면 돼요.”
이반은 피식 웃었다. 연하도 따라 웃었다.
손을 잡고 한참 길을 걷는데, 문득 연하가 길을 본 채로 말했다.
“가끔 걷고 있는 길의 옛날 모습을 상상하고는 했어요.”
“그래? 어떤 식으로?”
“어제는 누가 이 길을 걸었을까, 몇십 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몇백 년 전에는 그냥 흙바닥이었겠지, 그때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복장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길을 걸었을까…….”
연하는 지켜보고 있는 그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네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었어요?”
“모르겠어.”
“몰라요?”
“이것저것 많은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다 까먹었어.”
이반은 그녀를 보았다.
“문득 멈춰선 곳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연하는 말문이 막힌 듯하더니 샐쭉한 소리를 냈다.
“치…….”
이반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삐친 척한 거야?”
“네.”
이반은 웃고 말았다.
“우리 연하, 여자가 다 됐네.”
“저 원래 여자였는데요.”
“그러게. 안타까웠어.”
“뭐가요?”
이반은 앞에 이어진 길을 보았다. 진짜 열아홉 살 때 그녀가 걸어오는 걸 보는 것처럼.
“아주 귀여운 아이였는데, 괜히 루아스가 돼서 매춘부 역할 같은 걸 하고.”
“그건…….”
연하는 그때 생각이 났는지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지금쯤 누군가와 결혼했을까?”
아이도 낳았을까?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뻔했던 이반은 멈칫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연하는 그냥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받아들이고 대답했다.
“하지만 누구와 결혼했든 그 사람을 이반만큼 좋아하진 않았을 거예요.”
이반은 조금 난감해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연하는 선선히 웃었다.
“그냥 알아요.”
한참이나 그냥 쳐다보고 있었던지, 연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불렀다.
“이반?”
이반은 연하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자, 그녀는 조금 움찔하며 고개를 뺐다. 슬쩍 옆을 봤다가 다시 그를 보고는 속삭였다.
“여기서요……?”
행인들이 그들을 힐끔거리고 지나갔다. 붉은 눈을 한 이반이 시선을 끄는 탓도 있겠지만, 역시 대로 한가운데서 묘한 분위기를 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서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그런 기분이 들어버리다니.
한동안은 성 기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서 정말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춘기라도 다시 온 모양이었다.
아직 못내 쑥스러워하는 연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마음만.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이반은 무시하려고 했지만 벨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연하도 신경 쓰이는지 벨소리가 나는 안주머니 쪽을 힐끔거리기에 이반은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드물게도 정말 짜증이 난 얼굴로 액정을 보았다.
“가봐야 해요?”
“차라리 그만둘까 싶어지네.”
연하는 웃었다.
투덜거리는 그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 같아 귀여웠다. 이렇게 커다랗고 남자다운 사람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신기했다.
“가보세요.”
이반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호텔에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그 의미는…….
연하는 못내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반은 뒤쪽을 가리켰다.
“타고 가.”
돌아보자, 어느새 그가 타고 왔던 차가 대로 옆에 와 있었다. 공무용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가 타기에는 너무 크고 윤기 나는 차였다.
“그럼 이반은요?”
“나는 다시 부르면 되니까.”
“그래도 어떻게 국장님 차를…….”
이반은 차 문을 열고 연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타고 가.”
어쩔 수 없이 차에 오르자, 문을 닫아주었다. 연하는 다급하게 창문을 내렸다.
“저기.”
다른 차를 부르려는지 핸드폰을 귓가에 댄 이반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연하는 손짓했다.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리라는 듯이.
핸드폰을 귀에서 뗀 이반은 창가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왜?”
연하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잽싸게 그의 볼에 뽀뽀했다.
“금방 오세요.”
차가 출발했다. 멍하니 차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반을 뒤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