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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70화 (70/104)

70화. 스투포르 문디- “세상의 경이” (1)

연하는 몽롱한 눈을 떴다.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 잠겨 있었고, 이반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밖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이반이 전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전화를 끊고 이반이 들어왔다. 일찍 일어난 듯 이미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일어났어?”

연하는 몸이 너무 나른해서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이 나른하다니 얼마 만에 느껴보는 느낌인지…….’

생각하는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연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침대에 와 앉았다. 그리고 크고 따뜻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잘 잤어?”

그의 목소리가 그야말로 달았다.

“그게…….”

일단 무작정 입을 열긴 했는데, 볼이 너무 뜨거웠다.

그런 밤을 보내고 아침에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연하는 주섬주섬 일어나 무릎을 모아 앉고는, 일본 사무라이처럼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 감사했습니다?”

“뭐?”

이반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연하는 ‘이게 아닌가?’ 싶은 얼굴로 일어나 우물거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반은 기가 막혔다.

이 녀석은…….

그렇게나 겪고도 또 황당했지만,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이반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말했다.

“키스해 줘.”

“네?”

연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반은 웃음기 띤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연하는 누가 있기라도 할 것 같은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반은 기다렸다. 연하는 무릎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앞에 꽤 비장하게 앉아서는 그의 볼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아이가 뽀뽀하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남자의 입술이 이 정도로 부드러울 거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연하는 키스를 끝내고 떨어졌다.

창문의 코팅 덕분에 특유의 눈부심이 없는 햇살 속에서 그는 마치 광고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눈에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말했다.

“배고프지? 내려와. 아침 먹자.”

이반은 일어났다.

대충 세수하고 아래로 내려가자, 테이블에는 이미 호텔 조식 같은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는 상태였다. 연하는 놀랐다.

아침이라고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걸 혼자 다 준비하셨어요?”

이반은 역시 광고에나 나올 것 같은 깔끔한 모습으로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즐거웠어. 네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연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이반은 지그시 그녀를 보았다. 눈에 감도는 온기에 어쩐지…… 몸이 다시 뜨거워지려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장면들이 다시 생각나 얼굴에 열기가 화끈거리려는데,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앉아.”

역시 이런 일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허둥거리는 건 자신뿐이구나 싶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편안했다.

“많이 먹어.”

“이반도요.”

식사를 끝내고 이반이 식기를 치우려고 하기에 연하도 일어났다.

“앉아 있어.”

“아뇨, 저도…….”

“앉아 있어.”

연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식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다가 파도치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모든 일이 다 꿈이었던 것 같았다. 며칠 전 일만 아니라, 루아스가 된 것부터.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연하는 움찔했다.

“참, 규하는요? 저녁 먹기로 했었는데…….”

이제야 생각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을 많이 했을 텐데…….

이반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급한 작전에 투입됐다고 해뒀어.”

연하는 안도했다. 규하 성격에 만약 이 일을 알게 되면 당장 군인 따위 그만두라고 길길이 날뛸 것이다.

“부대엔 언제 돌아가야 해요?”

이반은 갑자기 표정이 묘해졌다. 팔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연하는 제 팔을 보았다.

“팔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이번처럼 위험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반은 대답하지 않고 식기를 마저 정리했다.

‘화가…… 났나?’

연하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특별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곧 이반은 부엌 수건에 손을 닦으며 돌아보았다.

“일단은…….”

연하는 상급자로부터 명령을 기다리듯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반은 부엌 수건을 걸어놓고 그녀를 웃으며 보았다.

“영화 볼래?”

“네?”

이반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영화 싫어해?”

“아뇨. 좋아해요.”

일단 그건 사실이라 대답했다.

“이리와.”

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반을 따라갔다. 그는 복도 너머 작은 거실로 갔다.

그곳에는 제대로 된 영상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개인 영화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소파는 세 사람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컸다.

그래서 생각하길, 집은 어제 지은 것처럼 깨끗하고 물건은 별로 없지만 의외로 이반이 꽤 오랫동안 지낸 곳이 아닌가 싶었다.

“뭐 볼래?”

“음, 저거요.”

연하는 안 그래도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서 골랐다. 이반은 영화를 재생하고 소파에 앉았다.

연하는 영화가 시작되는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는데, 이반이 뒤로 가더니 누웠다. 돌아보니, 한쪽 머리를 괸 채 자기 옆자리를 탁탁 쳤다.

“누워.”

연하는 왠지 왕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거부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가 누웠다.

“팔베개해 줄까?”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반이 내민 팔에 얌전히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의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올라왔다.

누군가와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규하와 영화를 볼 때도 이렇게까지 친근한 자세를 취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

안 그래도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여서, 한참 몰입해 있을 때였다. 그가 머리를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누웠다.

“자요?”

연하는 돌아보았다.

“아니.”

어지럽게 지나가는 스크린 불빛에 비친 이반은 전혀 졸린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눈이 맑았다. 연하는 흘긋 영화를 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영화 안 봤죠.”

“눈에 안 들어와.”

“영화 재미없어요?”

“재미있어.”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에 안 들어온다면서요.”

이반은 허리에 얹은 팔을 밀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 반응을 보면 재미있는 걸 알겠어.”

그렇다는 건…….

연하는 장난처럼 말했다.

“보란 영화는 안 보고 나만 보고 있었구나.”

“응.”

그런데 이반은 바로 대답했다. 말문이 막히면서도, 슬그머니 장난 뿔이 돋았다. 연하는 다시 원래대로 누웠다.

“그럼 계속 봐요.”

이반이 제 옆얼굴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기만?”

“네.”

연하는 일부러 신경을 끄고 영화에 집중했다. 이반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래서 연하는 어느새 그에게 말한 것도 잊고 영화에 빠져 있었다.

“연하야.”

어느 순간 그가 불렀다. 연하는 바로 신경이 뒤로 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연하야.”

역시 묵묵부답. 하지만 이반은 포기하지 않았다.

“연하야.”

연하는 어깨 넘어 시선을 던졌다.

“이름 닳겠어요.”

이반이 팔베개해 준 팔을 당겨 일어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연하는 똑바로 누워 그의 품에 들어간 자세가 되었다.

“하고 싶어.”

내려다보는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말문이 막혔다. 말투나 목소리만 들으면 국회에서 연설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영화 보고 싶은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들여다보면서 무게를 이용해 지그시 몸을 밀어붙였다. 두 몸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그의 가슴, 배, 허벅지, 가볍게 닿아 있는 발까지 느껴졌다.

연하는 정신이 혼미했다.

이런 육탄전을…….

“영화…….”

연하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그는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 맞추었다.

“하게 해줘.”

그로서도 자신에게 이런 사춘기 소년 같은 욕정이 되살아날 거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영화 한 편이 끝나길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참기가 힘들었다.

사실 어제 체력을 다 소진하고 기절하듯이 잠든 연하를 좀 더 지분거렸다는 건 비밀이었다. 새근거리며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무언가 끓어올라서…….

연하는 너무 귀엽고 부드럽고 깜찍해서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연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하세요.”

* * *

화면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시몬은 서서, 대공은 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사하라 조병창입니다.”

오늘도 완벽한 차림을 한 시몬이 말했다.

“표준시각 04시 23분 45초부터 46분 12초까지, 정확히 23분 33초 만에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는 해도, 혈혈단신으로 나타난 침입자에게 말이죠.”

“와, 씨. 무섭네. 지금 나 보라고 저러는 거 맞지?”

대공은 막 화면에 지나가는 장면을 보고 ‘으’ 소리를 내며 치를 떨었다.

“나 가끔 억울한 거 알아? 내가 많이 죽이긴 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굴지는 않았다고.”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올려다보자, 시몬은 팔짱을 낀 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누르고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화면을 집어삼킬 듯이.

대공은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왜, 저러는 것도 멋있어?”

그제야 시몬은 돌아보더니 웃지도 않고 말했다.

“손해액만 얼만지 아십니까? 무엇보다 큰 손실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일부분이 소실…….”

“아, 알았어. 잔소리는.”

시몬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 아이를 손봐준 일은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하지만 안 그래도 계속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되던 차, 이 광견에게 목줄을 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조병창에 보관되어 있던 연구 자료도 다행히 시간에 맞게 빼낼 수 있었다. 자료를 빼내느라 대처 병력을 보낼 수 없어서 결국 전멸을 면치 못했지만…….

시몬은 흘긋 화면을 보았다.

‘대처 병력을 보냈다 한들 시간문제였겠지만.’

“더 이상 개인행동은 금지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공동체 아니었습니까?”

대공은 한숨을 내쉬고 다리를 내려 의자에서 내려왔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돌아보고, 화면을 가리켰다.

“원래 알고 있던 걸 이번 일로 더 확실히 깨달았지만, 저 녀석을 먼저 없애지 않으면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리스 석상처럼 완벽한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한쪽 허리를 짚고 서 있는 시몬 옆 화면에는, 이반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온통 피 칠갑을 한 채.

“네가 세상을 갖다 바친다고 저 녀석이 널 첩으로 삼아주기라도 할 것 같아? 세상 같은 게 갖고 싶었다면 애초에 진작 가지고도 남았을 녀석이라고.”

“루아스가 되고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죠.”

시몬은 갑자기 말했다.

“모든 건 쟁취하는 거라는 걸요.”

시몬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모두가 아는 단순한 이야기죠. 하지만 다른 이들이 대체로 쟁취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지레짐작하고 포기하기 때문이라는 걸, 그들의 간절함은 꼭 거기까지라는 걸…….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될까요?”

대공은 한동안 그녀를 보다 돌아섰다.

“그래,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지. 다 사라지고 남은 팔 한 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대공은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가말이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건 일찍부터 납득하고 있었다. 삼천 년을 찾았으니까.

가말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디선가 혼자 자살했거나, 어떤 일엔가 오지랖을 부리며 끼어들었다가 이름도 없는 시신으로 죽었거나…….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소리 소문이 없을 수가 없었다. 가말을 봤다는 사람도,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도 없었다.

특히 자신 때문에 죄 없는 니스타르들이 죽어 나가는 10여 년 전 사태에서도 가말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는 마침내 인정해야만 했다.

‘가말은 존재하지 않아. 더 이상.’

돌덩이처럼 단단한 사실을 삼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게 가말을 찾는 일을 그만둔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그만둘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가말이 없는 세상은, 받아들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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