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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69화 (69/104)

69화. 여름비

연하는 욕실로 가서, 화장품이 여기 있으려나 싶어 찬장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섬광이 치듯 어두운 이미지가 지나갔다.

빛, 피…… 번들거리는 눈들.

연하는 흠칫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파랗게 질려 잘렸던 부위를 잡았다.

그런데 온기가 닿자, 왠지 그 부위에 큰 손의 흔적이 느껴졌다.

연하는 제 팔을 보았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붕대 너머 다친 부위를 계속 감싸 쥐고 있는 온기가 떠올랐다.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괜찮아. 공격당한 경험이 처음도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위험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아무래도 약해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종종 표적이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 루아스들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존재가 공개되면서 인간 사회에서 자리 잡고 살 수 있게 됐지만, 남자들에 비해 포획하기 쉽다고 생각하는지 영생을 노리는 인간들이 떼를 지어 덤비는 일이 적잖았다.

사실 루아스는 성별에 따른 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오히려 혈통에 따라 다른 편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 하더라도 떼를 지어 기습하는 데는 별수가 없었지만, 남자보다 약할 거라는 인식 때문에 여자 루아스를 노리는 빈도수가 훨씬 높았다.

안 그래도 같은 여성 루아스인 윤 중령이 관련법을 제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연하는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장품을 보았다.

“이거 내 건데?”

그러고 보니…….

연하는 욕실과 방을 가볍게 훑었다. 그녀의 물건들이 있었다. 꼭 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처럼.

덕분에 불편함 없이 본인의 화장품을 쓰고 본인의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궁금해서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이반, 제 물건이 왜 다 여기에…….”

부엌에는 막 식사를 준비하려는 듯 재료들을 꺼내놓았는데, 이반이 보이지 않았다.

“이반?”

“이쪽이야.”

멀리서 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하는 목소리를 따라갔다.

부엌 너머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역시 사방이 유리여서 어떻게 보면 수족관 같은 통로를 지나가니, 좀 더 아늑한 거실 공간이 나오고 오른쪽 벽 너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연하는 그쪽으로 가보았다.

정말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널찍한 공간에 욕조가 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조명 빛을 받은 수면에 꽃받침까지만 있는 장미들이 연꽃처럼 떠 있었다.

물비늘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수면의 끝에는, 이반이 장미들을 띄우고 있었다.

“욕조…… 아니에요?”

“어차피 오래 살아 있진 못할 것 같아서.”

막 그의 손에서 마지막 장미가 떠났다. 장미들은 수면을 느릿하게 떠다녔다.

“다 띄울 만큼 큰 그릇도 없고.”

장미에 시선을 뺏겨 연하는 뒤늦게 이반이 앞에 서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스름한 조명 아래 짙어진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반, 오늘…….”

말을 멈추자, 이반은 말하라는 듯이 웃음기가 도는 눈으로 물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때 제가 이반을 따라서 2층에 가서 찾은 게 뭐였어요? 이반이 맛있는 걸 준다고 관사로 초대했을 때.”

연하는 갑자기 물었다. 이반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젖혔다.

“무슨……?”

“뭐였어요?”

“청소기.”

이반은 일단 대답했다. 연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중얼거렸다.

“본인은 맞는데…….”

“싱거운 녀석.”

이반은 연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평소 이반인 것 같아 그녀는 안심했다.

“저희 뭐 먹어요?”

연하는 이반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리스에 있으니까 그리스 음식을 하려는데, 먹어본 적 있어?”

“아뇨. 그리스 사람들은 뭘 먹는데요?”

* * *

그리스 사람들은 맛있어 보이는 걸 먹었다. 요리의 이름은 무사카라고 했다. 갈은 감자와 고기의 층이 섞인 라자냐 같았다.

“원래 들어가는 돼지고기는 콩고기로 바꿨어.”

“고마워요.”

이반은 웃었다. 요리를 하는 그는 평소와 같았다.

‘역시 달라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구나.’

“테이블에 그릇 좀 놔줘. 오른쪽 찬장에 있어.”

“네.”

연하는 찬장을 열었다. 이반이 뒤에 다가왔다. 흠칫해서 돌아보자, 같은 찬장 위층에서 샐러드 볼을 꺼낸 그가 그녀를 보았다.

“왜?”

“아뇨…….”

이반은 이상한 녀석 다 보겠다는 듯 웃고는 가스레인지로 돌아갔다.

‘기분 탓, 이겠지…….’

그렇다고 주리를 틀면서 자백을 강요할 수도 없어서, 연하는 뒷머리를 긁적이고 테이블에 그릇을 세팅했다. 그리고 두 사람분의 식기가 놓인 테이블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루아스가 되고 나서는 누구와 요리해서 저녁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늘 식당에서 식사가 제공되니 애초에 요리 같은 걸 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할 만한 상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영과는 어쩐지 같이 요리를 해 먹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남자친구들끼리 그러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연하는 이반을 보았다. 계속 그러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이반이 돌아보았다.

“왜?”

“저희 진짜 가족 같아서요.”

“가족은 가족이지.”

또 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묘한 미소였다.

그가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 서 있는 것 같아 연하는 초조하다고 해야 할지,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반에게 다가가 팔에 손을 얹었다. 그는 그녀를 보았다.

역시 저 눈 때문일까, 자꾸 그가 달라 보이는 건.

평소보다 짙은 눈동자…….

몸에 희미한 열기를 일으켜 내내 이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반이 음식을 내밀었다. 맛을 보라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었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으므로 연하는 입을 벌렸다. 혀에 그의 손가락이 조금 닿았다.

“어때?”

연하는 자신이 뭘 먹었는지 몰랐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손가락에 남은 소스를 가볍게 빨아먹으면서 질문했기 때문이다.

“맛있어요.”

연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뭔가의 조각은 맛을 볼 새도 없이 통째로 넘어가고 난 후였는데.

사실 불의 조각을 삼킨 건 아니었는지, 뱃속이 뜨거웠다.

“다행이네.”

“컵은 어디 있어요?”

연하는 몸을 돌렸다.

“그건 왼쪽에 있어.”

연하는 찬장을 열었다. 신경은 온통 뒤로 향해 있어 이번에는 그가 다가오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요리를 마무리할 뿐이었다.

연하는 안도하면서도 어딘가 섭섭한, 묘한 기분으로 컵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평소에는 그와 둘이 있으면 오히려 편하다는 느낌인데…….

하지만 이반이 메인 요리를 식탁에 올려놓자, 뜨끈한 김을 풍기는 음식의 자태에 연하는 잠시 긴장감을 잊었다.

이반은 그녀의 몫을 떠서 앞에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연하는 한 입 떠서 맛보았다.

“맛있어요.”

아직 옆에 서 있는 그를 보고 거의 경이에 차서 말했다. 그때 그녀를 보는 이반은, 정말 아이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 같았다.

“묻었어.”

말하고는 그녀가 스스로 뗄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쥐고, 허리를 숙였다.

연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이반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금……?’

“물줄까?”

이반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연하는 자신이 눈을 뜬 채로 꿈을 꿨나 싶었다.

‘하지만 분명히 볼에 감촉이 남아 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연하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달칵. 달그락.

한동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밖에 울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죄지은 아이처럼 먹다가 흘긋 맞은편을 보자, 이반이 눈을 들었다.

그 순간 연하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포크가 우그러졌다. 깜짝 놀라 손을 펴는 바람에 포크가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가 났다.

연하는 다급하게 몸을 숙였다.

“제, 제가 주울게요.”

이제 힘 조절 정도는 숨 쉬듯 할 수 있는데 꼭 처음 루아스가 되었을 때처럼 제어가 되지 않았다. 뭔가, 너무, 전부, 당황스러웠다.

“아직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이반이 일어나 다가왔다.

“아니, 그게…….”

연하는 어물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도 주워주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어나면서 그의 품속에 들어간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연하는 흠칫하며 닿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의자에서 떨어질 듯 휘청거리자, 이반이 허리를 안아 지탱해 주었다.

배에 그의 손이 펼쳐져 있었다. 입술은 바로 지척이었다. 빛을 등진 그의 눈빛이 어두웠다.

이반은 연하가 완전히 우그러뜨린 포크를 보았다.

“손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구나.”

“새것 가져올게요.”

연하는 갑자기 차갑게 말하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스쳐지나, 서랍이 아닌 냉장고를 열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반은 그 등을 의아하게 보았다.

“연하야.”

뒤로 다가가자, 연하는 홱 돌아보았다.

“하지 마세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어서 이반은 놀랐다.

“뭘…….”

연하는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냉장고에 포크를 집어넣고 새 포크를 찾는 것처럼 손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부요. 보는 거, 말하는 거, 숨 쉬는 것도.”

이반은 잠깐 그녀를 보았다. 얼핏 보이는 둥그런 볼이 약하게 떨렸다.

“내가 뭐 잘못했어?”

“자꾸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고, 덥고…… 꼭, 꼭…….”

적합한 표현을 찾는 것처럼 더듬거렸다.

“꼭 이반이 유혹하는 것처럼…….”

뒤에 있는 이반이 조용히 양어깨를 잡았다. 위로해 주는 거라고 생각한 연하는 계속해 말하려고 했다. 그때, 그가 그녀를 돌려서 키스했다. 냉장고에 밀어붙이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의 냉장고에 못 박힌 채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이 막혀왔다.

“이…….”

이반은 재차 입술을 겹쳤다. 이렇게 강압적인 건 버스 사고가 일어난 날 이후 처음이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자신을 쏟아내듯이 키스했다.

“맞아.”

입술이 조금 떨어졌다.

“유혹하는 거.”

연하는 눈을 크게 떴다. 빛을 등져 그늘에 잠긴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순서 같은 거 모르겠어.”

“네? 무슨 순서…….”

연하는 알 리 없는 이야기여서 어리둥절해하며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반은 몸으로 그녀를 더 밀어붙였다. 연하는 볼에 열기가 올랐다.

“네가 눈이 뒤집혀서 내게 달려들었으면 좋겠어.”

그런……. 연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대신 불쑥 그의 얼굴을 감싸 당겼다.

“모르겠어요? 이미 눈은 뒤집혔어요.”

치켜뜬 채 그를 노려보는 눈이 도발적이었다.

귀여운 연하, 사랑스러운 연하, 도발적인 연하…….

생각해 보면 한때 세상을 가지고 싶어 했던 욕심이었다. 그 욕심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순서도 모두 지켜서, 나중에 그녀가 다른 소리를 못 하도록 하려는 셈이었는지도 몰랐다.

연하는 그가 어디까지 바라는지 알 길이 없겠지만, 괜찮았다. 그가 그렇게 원하도록 만들 테니까.

어쨌든 그는 늙고 교활한 흡혈귀지 않은가?

이반은 연하의 볼을 감싸고 깊이 키스했다.

* * *

연하는 침대 깊숙이 내려앉았다. 방은 은은하게 어둑했다.

이반은 제 티셔츠 아래를 잡아 동작 한 번으로 벗어던졌다.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닿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 같은 몸이 드러났다.

갑자기 이반이 낮게 웃어, 연하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의식중에 이미 그의 몸을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벽하게 조각된 토르소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경탄하듯이.

이반은 온기가 도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그것이 더 이상 그녀를 주저하게 하진 않았다.

“만져도 돼요?”

“네 거야.”

이반은 다가왔다.

“전부.”

그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생명을 틔우는 따듯하고 싱그러운 빗줄기.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흐름을, 연하는 온몸으로 맞았다.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싱싱한 물방울들. 모든 것을 촉촉하게 적시는 해갈의 단비. 그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자신의 몸짓.

나의 생명. 나의 근원.

나를 살게 하는 축복의 물.

손안에 고인 빗물을 한껏 들이마시듯, 연하는 그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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