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장미와 섬
“강 상사의 부상을 처치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올바른 단어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이반은 언제 이 자리를 아예 없애 버릴 생각을 했냐는 듯, 바로 돌아서서 연하 곁에 앉았다.
후우웅.
폭풍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닥터 헬기가 내려앉았다.
쿵, 철컹.
랜딩기어가 바닥에 닿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리웨이를 선두로 의료팀이 달려왔다.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연하가 얼핏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떨리는 눈꺼풀을 들고, 이반을 보았다.
“이반…….”
바로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반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괜찮아.”
연하는 이반의 팔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제 팔을 돌아보려 하자, 이반이 얼굴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렉스는 정말로, 이반 이바노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처음 들었다.
리웨이가 달려와 외쳤다.
“어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의료팀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리웨이가 절단면을 지혈하는 동안 응급구조사가 절단된 팔에 생리식염수를 들이붓고 거즈로 싸서 이송용 장기 보관 냉장함에 넣었다.
“리웨이.”
그런데 연하가 갑자기 리웨이의 옷을 움켜잡았다.
“저 사람들, 저 사람들부터…….”
리웨이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너……!”
“난.”
연하는 단호했다.
“죽지 않아. 하지만 저 사람들은, 죽어.”
검은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내 피로, 누군가가 죽지, 죽지…… 않게 해줘.”
리웨이는 이를 악물었다.
“저 새끼들, 게워내게 해! 아주 오장육부까지!”
리웨이는 로터 블레이드 바람에 의사가운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연하를 돌아보았다.
피부는 거의 보랏빛을 띠는 푸른색으로 질렸고, 눈가 쪽에 혈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반과 의료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린 팔에 거즈를 두르고 있는 의사도, 링거액과 옥시코돈 진통제 팩을 들고 있는 응급구조사도 어쩐지 숙연한 얼굴이었다.
“고마워.”
연하는 말했다. 리웨이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보더니 거칠게 중얼거리고 가버렸다.
“호구 자식 같으니.”
피를 마신 사람들이 이송되는지 닥터 헬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연하야.”
연하는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헬기에서 시선을 돌려 까맣게 패인 눈으로 이반을 보았다. 이반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피를 마셔야 돼. 할 수 있지?”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다치게…… 할 거예요.”
피가 부족한 루아스가 얼마나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인지는 여러 사건을 처리하며 익히 봐왔다.
이렇게 피를 잃은 상태에서 흡혈하기 시작하면 그가 다치지 않기 전에 그만둘 자신이 없었다.
“연결하세요.”
하지만 이반은 말씨름할 시간이 없다는 듯 의사에게 고갯짓하고 팔을 걷었다. 연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이반…….”
이반은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내 피를 모두 네게 준다고 하더라도, 난 괜찮아.”
아니, 제 팔을 잘라 줘야 한다 한들.
연하는 더 이상 말을 할 힘조차 없는 것 같았다. 튜브를 타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연하는 시야가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열아홉 그날에.
배에 난 구멍으로 제 몸을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녀를 괴롭혔던 고통, 아픔, 공포 같은 감정들은 소리와 영상을 분리해 편집해놓은 비디오처럼 제거되어 있었다.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늘 초점이 맞지 않는 비디오처럼 뿌연 그림자…….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야가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 사이로, 물기가 짙은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이반은 꼭 중세의 수도자처럼 보였다.
은둔자 이반…….
이제야 그 별명이 어울려 보였다. 정장 차림과는 느낌이 천지 차이였지만, 노숙자 스타일의 묘한 레이어드룩도 잘 어울려서 신기했다.
‘노숙자 스타일을 하고도 섹시해 보이는 사람은 드문데.’
태평하게 생각해 버렸다.
빛이 잦아들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지금 이반과 모습이 겹쳐졌다. 검은 머리, 심각한 붉은 눈, 피로 물든 와이셔츠…….
연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금발도 잘 어울려요.”
“무슨…….”
이반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곧 깨달은 모양이었다.
“너 그때 기억이…….”
연하는 더 말하려는 이반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뒤로 헬기가 날아오며 빛이 쏟아졌다.
열아홉 그날, 빛 속에서 얼핏 지나갔던 얼굴이 기억났다.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보았다. 전혀 상관없는 돌멩이쯤을 보는 것처럼 무심한 눈을.
이후 충격 때문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와 달리, 지금 그녀를 보는 눈에는 이쪽이 안타까울 정도로 애절한 빛이 돌았다.
현장은 여전히 옆에서 울리는 소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그들 주변은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 눈 하지 말아요. 죽어가는 나에게 물어봤더라도…….”
말을 잇기 힘들어, 연하는 한 번 숨을 삼켰다.
“난 이 삶을 선택했을 거예요.”
그리고 연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을 감기가 두렵지 않았다. 다시 뜰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도.
* * *
도영은 군병원의 입구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이 인근은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에 전투복과 무장 모두 그대로였다.
자동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옆에 와 섰다. 피가 말라붙은 수술복 차림을 한 리웨이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인 게 싫어진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어요.”
도영은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리웨이는 언뜻 차갑게 들릴 정도로 말했다. 그녀답지 않은 어투가 의아해 도영이 돌아보자, 리웨이는 수술복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오늘에서야 싫어졌다고 하시니까요. 전 늘 싫었거든요.”
그리고 꽤 손에 익은 모습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도영은 의외라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담배 피웠었습니까?”
“끊었는데, 갑자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소령님도 줄까요?”
도영은 고민했다. 이 순간만큼 담배를 시작하기에 알맞을 때도 없었으리라.
“됐습니다.”
도영은 고개를 젖혔다. 조명을 비춘 잿빛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래도 계속 달릴 수 있어야 하니까.”
* * *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연하는 한참 멍하니 누워 있었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무의식중에 치웠다가, 흠칫 팔을 보았다.
왼팔이 붙어 있었다. 잘렸던 자국도 없이.
연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펴보았다.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침대를 짚고 일어나 보자, 처음 보는 방이었다. 온통 하얀 벽에 천장이 높았고, 햇빛이 차단된 전면창 너머에는 바다가 바로 보였다. 꼭 바다 위에 집을 지어놓은 것처럼.
“여긴…….”
[강 상사님, 일어나셨나요?]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하는 천장을 보았다.
“어, AI?”
[오늘은 6월 20일, 현재 시각은 17시 32분입니다. 날씨는 맑음, 습도는 48%로 쾌적합니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날로부터 나흘이나 지났다.
연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바닷물의 색깔이 왠지 국내가 아닌 것 같았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얼핏 소리를 들어봐도 집에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야?”
[이바노프 씨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이반의 집이라는 의미였다. 사실 AI가 말하지 않았어도 방을 보고 어쩐지 이반의 집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느낌이.
“이반은?”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창에 비친 제 몰골이 엉망이었다. 나흘간 씻지 못했을 테니 당연하지만, 머리가 거의 떡이 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이반이 이런 모습을 봤겠다 싶어 살짝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욕실 좀 써도 될까?”
[물론이죠.]
* * *
연하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샤워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막 타월로 머리를 말리는데,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돌아왔구나.’
연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일단 한쪽 벽에 걸린 가운을 둘러 입고 거실로 나갔다.
사방이 유리여서 바다가 거의 벽 무늬인 듯한, 거대한 온실 같은 집이 보였다.
헬리콥터 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연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집에서 바로 연결되는 헬기장에 막 헬리콥터 한 대가 내려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반이 내려섰다.
그는 흰 티셔츠에 재킷을 걸친 편안한 차림새였고,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들고 있었다면 낯부끄러울 만큼 크고 화려한.
하지만 그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까지도 자연스러워 보여서, 이제는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반은 연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왔다. 그녀도 마치 오늘 처음 그를 보는 것처럼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일어났어?”
그는 그녀가 낮잠을 자고 깨어난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네. 샤워 좀 했어요.”
젖은 머리끝을 매만지는데, 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연하는 조금 놀랐다.
“저…… 주시는 거예요?”
“지나가는데 예뻐서. 네 생각이 났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왠지 모르게 연하는 얼굴이 붉어지려고 했다.
“감사합니다.”
품에 겨우 들어오는 꽃다발을 받아들고 버릇처럼 거수경례하려다가 뭔가 아니다 싶어 얼른 손을 거두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들어가자.”
그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뭔가 모르게 부끄러워진 연하는 세상 조신한 여자처럼 꽃다발을 안고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 다급히 그를 보고 물었다.
“이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이반은 재킷을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내려놓다가 멈칫했다. 하지만 곧 마저 내려놓고 돌아보았다.
“다 살아 있어. 처치가 빨랐던 덕분이라고 하더구나. 몇은 장애가 좀 남겠지만.”
“장애라면…….”
“여기가 어딘지는 묻지 않는구나.”
이반은 화제를 돌렸다.
“아.”
연하는 소리를 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예요?”
“낙소스 근처의 섬.”
연하는 눈을 깜빡였다.
국내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저 바다가 지중해라고요?”
“정확하게는 에게해지만.”
이반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팔 좀 보자.”
그가 다친 부위를 확인하려고 하는 게 처음도 아니었으므로, 연하는 팔을 내밀었다. 여전히 장미 꽃다발을 피난민 봇짐처럼 안은 채.
이반은 팔을 유심히 보았다. 한 손은 팔 아래쪽을 살짝 받치고, 감정사의 전문적인 진지함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그런데 그가 다섯 손가락을 모두 깍지 껴와, 연하는 숨길 새도 없이 흠칫하고 말았다.
“제대로 움직여져?”
그가 물리치료사처럼 깍지 낀 손가락을 가볍게 뒤로 밀었다.
‘아, 그것 때문에.’
연하는 지레 놀란 가슴을 다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는 걸 들을 수 있을 텐데.
‘진정, 진정.’
이번에 이반은 팔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그의 손끝이 잘렸던 부위에 닿았다. 팔꿈치 안쪽의 조금 위, 지금은 흔적도 없는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떨리던 그의 목소리만은 기억이 나서, 연하는 미안해지고 말았다. 반대로 이반이 그랬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느꼈을 감정이 너무 생생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쓰다듬는 부분이 바로 혈관 위여서…….
연하는 흠칫거리는 몸을 억눌렀다.
갑자기 꽃다발이 휙 옆으로 넘어갔다.
“어, 어…….”
놀라서 붙잡고서야 꽃다발 아래쪽이 여러 번 쥐어짠 걸레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하는 민망해져 웅얼거렸다.
“간지러워서…….”
이반은 피식 웃고는 꽃다발을 들었다.
“이리 줘.”
그리고 꽃다발을 아일랜드 탁자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배고프지? 옷 갈아입고 와.”
그제야 연하는 자신이 목욕가운 하나만 걸친 상태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다는 인식이 없었으니 막 움직여서 가슴께가 거의 풀어져 있는 상태라고도.
급하게 이반을 보니, 그는 꽃다발을 보며 말했다.
“줄기를 다 잘라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연하는 가운을 슬며시 여몄다. 예전에는 짧은 바지 하나 입었다고 속옷 같다고 뭐라고 하더니…….
그것도 그렇고, 오늘 왠지 그가 다른 느낌이었다. 정확히 뭐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어쩐지…….
“이반.”
연하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그를 불렀다. 이반은 돌아보고 말하라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연하는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건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