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67화 (67/104)

67화.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못하리”, 오페라 ‘투란도트’) (3)

“루아스가 되려고 했다는 말입니까?”

김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루아스의 신체를 통해 순환하지 않는 혈액은 그냥 독과 다름없지만, 약장수들 말솜씨에 따라 수은도 만병통치약이 되는 법이죠.”

김 중령은 손에 들고 있는 패드를 보면서 덧붙였다.

“그래서 한동안 블랙마켓에서 유통되는 양이 상당했습니다. 최근에는 법이 강화돼서 거의 근절됐는데, 회수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재고가 어린애들 손에까지 들어간 모양입니다. 자세한 경위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김 중령은 패널에 떠 있는 첫 번째 사진을 가리켰다.

“첫 번째 사망자는 감염에 의한 심정지가 사인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사진을 가리켰다.

“두 번째는 섭취한 혈액의 농도가 훨씬 옅어서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지만, 감염이 혈우병처럼 제8혈액인자를 모조리 파괴시켜서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혈액을 무언가에 섞어 마신 것 같더군요.”

“실험을 했군요.”

이반이 중얼거리자, 김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의견도 그렇습니다. 혈액을 섭취하는 방법을 바꾼 것을 보면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DNA가 변이된 혈액을 동맥으로 직접 맞았더군요.”

세 번째 시신 사진이 떴다. 이 자리에 있는, 온갖 꼴을 다 봤을 사람들도 가차 없이 인상을 썼다.

이반은 숙고하는 눈으로 사진을 보았다.

“그거야말로 어린애들이 가지고 있을 물건은 아니군요.”

“만약 누군가가 이걸 제공해 줬다면…….”

따르릉.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모두 돌아보았다.

“실례합니다.”

뒤쪽에 서 있던 렉스는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네.”

문밖에서 전화를 받았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기뻐하는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바로 전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이반은 못 말린다는 듯이 위를 한 번 보았다.

[혹시 연하랑 같이 있어?]

그런데 규하가 물었다. 이반은 반사적으로 문을 돌아보았다.

“같이 저녁 먹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그랬는데 오지 않아서. 연락도 되지 않고. 뭐 갑자기 작전에라도 나간 건가 싶어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렉스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반은 이미 책상 모니터에 손을 대고 있었다.

패널에 지도가 뜨고, 연하의 위치를 표시하는 붉은 점이 반짝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같이 시선을 돌린 김 중령은 움찔했다.

“저긴…….”

붉은 점은 조금 전까지 그들이 보던 다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렉스는 규하에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반의 미간에 심각한 빛이 스몄다. 그는 바로 말했다.

“드페흐 소령 연결해.”

신호가 가고, 스피커 너머에서 도영이 대답했다.

[예. 드페흐입니다.]

“드페흐 소령. 강 상사는?”

[별자리로 갔습니다.]

이반이 손짓하자, 프로그래머가 바로 실시간 위성 이미지를 띄웠다. 하지만 다리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근거리에 있는 UAV(무인정찰기)#가 가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22초입니다.”

눈치가 빠른 프로그래머는 이어서 무언가 작업하더니 말했다.

“FRS(얼굴인식시스템)#가 선별해 낸, 강 상사님이 포착된 CCTV 화면 띄우겠습니다.”

선명한 화면에 연하의 모습이 떴다. 연하는 갑자기 어딘가를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면 밖에서 한 소녀가 뛰어와 그녀 앞에 오던 대학생 무리에게 매달렸다.

아니, 그러려는 찰나, 연하가 사라졌다가 그녀 옆에 나타나 팔을 붙잡고 무어라 물었다.

폐쇄회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가로등에 달린 CCTV가 찍은 것 같은 둘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하와 소녀는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동 경로에 따라 화면은 계속 전환되었다.

굴다리 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멈추었다.

“여기서부터는 CCTV가 없습니다.”

렉스는 지도를 확인했다.

“있어야 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네, 하지만 전부 부서진 것 같습니다.”

“강 상사는 어째서 지원 요청을 하지 않고…….”

렉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반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국장님?”

다른 사람들도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제 임무에 충실한 프로그래머가 말했다.

“UAV 도착했습니다. 영상 띄우겠습니다.”

패널 가득 무인정찰기가 촬영하는 영상이 떴다.

렉스는 눈을 부릅떴다.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게 묵시록의 한 장면은 아닌지 눈을 의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렉스는 패널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귀 뒤쪽을 짚었다. 그리고 무전 너머로 중얼거렸다.

“TF(Task Force)?08 출동시켜. 당장.”

김 중령은 흠칫해 그를 보았다.

“TF-08이라면…….”

“학살극을 막고 싶다면.”

좀비 떼 같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패널을 비춘 붉은 눈이 심각했다.

* * *

그들은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는가 싶더니, 제 혀끝에 묻은 것이 영생으로 가는 열쇠라는 깨달음이 들자 조금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오랜 갈증 끝에 인간성마저 잃어버린 아귀들이라고 해야 할지, 불벼락이 내리기 직전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이라고 해야 할지, 연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하느님.’

연하는 탄식했다. 빠져나가는 피와 함께 의식도 멀어졌다.

“비켜.”

마치 각자의 귀에 대고 말한 것 같은 기묘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나둘 비켜서기 시작했다.

대공은 돌아보고 혀를 내찼다.

“10분도 버티지 못했군.”

이반 이바노프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헤드라이트 속에 서 있었다.

갓 사무실에서 나온 샐러리맨처럼 넥타이를 조금 푼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하지만 와이셔츠는 얼핏 보면 화려한 무늬처럼 보일 정도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양손은 아예 핏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검붉은색 자체였다.

대공은 한숨을 삼켰다.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녀석들을 오는 길에 포진시켰는데……. 보아하니 한 놈도 이반 이바노프라는 지옥을 살아 걸어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대공은 정신을 잃은 연하를 보았다.

“난 가말을 해방 시켜준 거야, 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대공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아, 씨. 이것들은 잠도 안 자나.”

그는 중얼거리고 사라졌다.

사람의 바다 가운데로 난 길의 끝,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옆에 나뒹구는 도끼가 오히려 그의 심장을 내리찍은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반은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아무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연하에게로 뻗는 손끝이 떨려와, 이반은 손에 힘을 주어 떨림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얽매고 있는 그물을 찢어냈다.

“연하야.”

연하는 새파랗게 질려 반응하지 않았다.

“연하야.”

넌 언제나 상처 입은 모습이구나.

그녀를 담은 눈이 흐려졌다.

당장 지혈할 만한 것을 찾는데, 머리 뒤에 서늘한 것이 느껴졌다. 이반은 곁눈으로 어깨 넘어 보았다. 한 남자가 총을 겨누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이반은 일어났다. 남자는 따라 총구를 올렸다. 그런데 쫓기듯이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이반이 사라졌다.

남자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바로 뒤통수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붉은 눈이 있었다.

남자는 기겁해서 뒤로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물리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온 모공에서 솟아났다. 총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려왔다.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총을 잡았다.

남자의 손 채로.

남자는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좌중 한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뛰어나와 이반을 쇠파이프로 내리쳤다.

“죽어!”

하지만 다음 순간, 이반의 손이 쇠파이프를 잡고 있었다.

쇠파이프를 빼앗겼다 싶은 찰나─

남자는 총에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엄청난 거리를 날아갔다. 그에게 부딪힌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이렇게 어린 녀석들이라니…….”

이반은 중얼거리고 눈을 들었다. 붉은 눈이 횃불처럼 빛났다.

“언제 도망가야 할지조차 모르잖아.”

현실감이라는 망치가 후려친 듯, 모두 소리치며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 서로 밀치고 덮치며 정신없이 달렸다.

쩍.

그런데 발밑으로 균열이 일었다.

온갖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이 파였다. 이반의 발아래서부터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로지 다리의 힘만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바닥이 액체가 된 것처럼 울렁거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쿠우웅, 쿵.

머리 위의 다리가 울면서 잔재들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신의 분노 앞에 바빌론 탑이 무너지려는 듯이.

“다들 멈춰!”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사람들은 오토바이 재킷을 입은 남자가 높이 들어 올린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격기폭장치.

남자는 이를 갈았다.

“여길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양이야. 한 놈도 움직이지 마. 싹 다 없애 버릴 거…….”

“당신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평범한 사복을 입은 금발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눈을 보고 흠칫할 새도 없었다.

렉스는 파란 윤기가 흐르는 검을 아래서 위로 올렸다.

“다른 곳은 무사하고 싶다면.”

검이 우아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민하게 공기를 가르고─

“아아악!”

남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렉스는 그대로 검을 돌려 팔을 쳐 날렸다. 야구공처럼 날아간 팔을 누군가가 정확하게 캐치했다.

검은 제복, 검은 마스크를 쓴 붉은 눈의 남자─

사방으로 그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도 그들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예거들은 갑자기 한 몸처럼 이반을 향해 돌아섰다. 마치 그를 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반은 철저한 무표정이었다.

* * *

사무실 옷장에서 검을 꺼내는 렉스를 보며 김 중령은 납득을 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TF-08은 제로팀도 대비할 수 없는 상황을 위한 예거 내 니스타르 전담 대기팀이 아닙니까? 저긴 인간들밖에 없는데 어째서 지금…….”

“적을 제압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네? 그렇다면 더 문제입니다. 루아스 군인의 민간인 사살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

렉스는 문을 나서기 직전, 서늘하게 돌아보았다.

“지금 저분이 민간인 사살 같은 문제를 신경 쓸 것 같습니까? 저도 별로 막고 싶지 않습니다만.”

김 중령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렉스는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걸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이 자리에 숨을 쉬는 존재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는 길에 난자당해 있는 테러리스트들처럼.

도시 전체가 비상사태였다.

이 인간의 어린 것들은 도구일 뿐이지만, 그것도 이반에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터였다. 다행히 학살이 시작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로서도 딱히 이 잔악한 어린 것들의 목숨이 걱정돼서는 아니었다.

다만 일이 잘못되면 그들만 아니라 연하까지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 씨.”

이반은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 없는 눈 너머에 일렁이는 것에, 렉스는 짐승으로서의 본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강 상사의 부상을 처치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 Unmanned Aerial Vehicle

# Facial Recogni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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