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못하리”, 오페라 ‘투란도트’) (2)
도영은 가게로 돌아갔다.
어느새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대원들은 그를 능글맞게 보면서 비어 있는 한 자리를 탁탁 쳤다. 도영이 가서 앉자, 그에게 새 맥주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잘했어요. 이별을 받아들이고 한 단계 성장하셨군요. 다 그렇게 커가는 거죠.”
도영은 고개를 내젓고 술잔을 들었다.
“술이나 드세요.”
그러다가 목재 바에 박혀 있는 맥주잔을 보고, 뒤늦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 지금 죽을 뻔했던 거 맞죠?”
대원들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요. 솔직히 전 뱀파이어 여자친구 같은 거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사랑싸움이라도 한 번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거 아니에요.”
* * *
규하는 긴 머리를 들어 올려 묶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뒷덜미의 솜털이 반짝거렸다.
이미 온 집안이 습해질 정도로 몇 번이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지만, 렉스는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았다. 곧 돌아가 봐야 하지만 않았더라도…….
규하가 돌아보았다. 뒤에서 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가 연하고 깊어, 아름답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마치 신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니스타르의 자격을 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제 가.”
착각이 아니라면…….
렉스는 아직 서로의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에 누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규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원래 선약 있었어. 연하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
어차피 그도 가야 하긴 했지만…….
렉스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가보겠습니다.”
현관에 서서 말하자, 부엌 테이블에 앉은 규하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저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주 한참 후에야 규하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듣지 말걸.”
어쨌든 그라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고,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고, 모성애 잔뜩 자극하는 사연까지 들었다고 한들 어쩔 것인가. 같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할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이쪽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어도 저 녀석은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천 년 후나 똑같을 테니까.
어쩐지 렉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우울해져 한참 앉아 있다가, 규하는 시계를 보았다.
“그나저나 얜 왜 안 와?”
* * *
“저기.”
가리킨 곳은 도로 건너편의 인파였다. 거리에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한 무리의 대학생 뒤로 젊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보고 있어?”
상대는 작게 ‘아아’ 소리를 내었다.
[보고 있어.]
“청재킷을 입은 여자야.”
한동안 건너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사숙고하는 것 같았다.
“어때?”
[좋아. 저걸로 하자. 실수하지 마.]
“알아.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남자는 돌아보고 말했다.
“가자.”
후드를 깊이 눌러쓴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먼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후드를 쓴 사람은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를 보는, 후드 아래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 * *
다급한 발소리였다, 목적지를 가진 평온한 발걸음 사이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은.
그 소리에 이질감을 느꼈으므로 연하는 고개를 돌렸다. 스쳐 가는 인파 가운데 한 소녀가 울먹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움을 구하는 눈동자였다.
“저기!”
소녀는 외치면서 한 청년의 팔을 잡았다.
“네?”
청년은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도와주세요!”
소녀가 외치자 청년은 바로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도로 이어폰을 끼고 가버렸다.
“도와……!”
소녀는 정신없이 뒤에 오는 아주머니를 잡았다.
“어휴, 됐어요.”
그녀는 보지도 않고 소녀를 내쳤다. 하지만 소녀는 상처받을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바로 다음에 오는 대학생 무리에게 달려갔다.
“저기……!”
막 말하려던 소녀는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연하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학생 무리는 웅성거리면서 그들을 지나갔다. 소녀는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 것 같았다. 당장 연하를 붙잡고 울먹였다.
“도와, 도와주세요. 제 친구가 어떤 남자들한테 끌려갔어요.”
* * *
다리 아래는 조용했다. 검은 강물이 역청처럼 기름진 빛으로 출렁였다.
한쪽 구석에 장작불을 태운 것 같은 드럼통과 흔적이 남아 있고, 곳곳에 어디선가 주워온 것 같은 소파와 의자들이 널려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이 공간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였다.
“어떤 남자들이었다고요?”
연하가 묻자, 소녀는 주변을 불안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폭주족, 그런 거 같았어요. 조직폭력배라기엔 어리고…….”
남아 있는 흔적으로 짐작컨대 생각보다 규모가 커 보였다. 아무래도 지원을 넣어야 할 것 같아 연하가 전화를 하려는데, 소녀가 다급히 팔을 잡았다.
“아, 안 돼요! 경찰을 부르면 친구를 죽인다고 했어요. 제발요. 남자들 몇 명 정도는…….”
“이건 얼마나 안전하게 친구를 구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연하는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남자들 몇 명 정도는?
그럼 그녀가 루아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
부르릉.
그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헤드라이트를 빛내는 오토바이들이 밀려 들어왔다.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다들 각자 무기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들고 있었다.
각목이나 야구방망이, 쇠파이프도 있었지만, 몇몇은 경찰용 T자봉, 단검 같은 본격적인 무기까지.
어느 것을 들고 있든 단단히 준비한 모습이었다.
연하는 반사적으로 소녀를 등 뒤로 숨겼다.
“친구 어디 있어요? 보여요?”
소녀는 목을 빼고 보는 것 같았다.
“저기!”
그리고 황급히 오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연하는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갑자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제 허리에 박힌 테이저의 전극을.
“미, 미안해요.”
소녀는 떨면서 사과했다. 테이저를 든 채로.
엄청난 전류가 연하를 습격했다.
연하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그대로 넘어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소녀는 죄책감과 승리감이 범벅된 기이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해냈다는 성취감이 섞인─
소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니까 괜찮잖아요.”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하나둘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연하는 몸에 힘을 주었다.
“큭.”
극한까지 수축이 된 근육이 펴지느라 근섬유들이 파열되는 것만 같았다.
연하는 당장 허리춤에서 글록을 꺼내 겨누었다. 남자들은 흠칫하며 멈추었다.
뉴스에 나오는 뱀파이어 테러리스트들은 거의 인간의 무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녀도 막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연하는 빛에 멀어버릴 것 같은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인간, 인간…….’
모두 인간이었다.
“지금! 쏴!”
퉁.
압축 질소가 발사되는 소리가 나고 익막을 펼친 날다람쥐처럼 무언가 날아왔다. 그리고 몸을 덮쳤다. 연하는 휘청했다. 뒤늦게 넷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퉁, 퉁.
연이어 발사되는 소리가 나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물이 덮쳐 왔다. 연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다.
쿵.
해일에 휩쓸린 듯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몸을 뒤집자 빛이 눈을 때렸다. 그녀를 올라탄 누군가가 눈에 플래시 라이트를 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오토바이 재킷을 입은 다른 남자가 연하를 들여다보았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만 봐도 상당히 어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좋아! 가져와!”
그가 말하자, 동료들이 일사불란하게 무언가를 쿵, 옆에 내려놓았다.
길쭉한 합판에 허리 벨트를 직접 잘라 끼워놓은 것 같은 물건이었다. 조악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고문실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었는데, 두 남자가 그녀의 왼팔을 올려놓고 벨트를 잠갔다.
역할을 분담해 동선까지 고려해서 연습을 거듭한 것 같았다.
‘대체 이게…….’
“어때?”
그때 연하를 올라타 있는 남자가 물었다. 연하는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는…….’
빛이 잦아들며 얼굴이 보였다.
“인간한테 공격당하는 기분이?”
후드를 쓰고 있는 대공이었다.
그는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외모를 빼면 너무 평범해 보여서, 정말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인지 모르고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공은 씩 웃었다.
“영생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애들이야. 네 쌍둥이를 구했을 때처럼 영웅적인 태도로 기꺼이 베풀어보라고.”
연하는 세차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대공이 그녀를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널 봐. 네 쌍둥이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 운이 좋아서 되살아났지만, 그래놓고 고작 한다는 게 군인? 또 네 쌍둥이를 지키기 위해?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어.”
“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공은 고개를 가까이했다. 그리고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넌 흡혈귀야,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럼 그렇게 행동해.”
연하는 내쉬는 숨이 떨려왔다. 하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왜?”
너무 가까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대공은 멈칫하는 것 같았다.
“네가 그랬으니까?”
대공은 몸을 들고 연하를 보았다. 미간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녀석에게 드디어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그녀는 속이 시원했다.
“이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자가 말하자, 대공은 몸을 일으켰다.
“귀엽게 굴면 겁만 줄 생각이었는데…….”
역시 이바노프 혈통이라고 할까.
“신경을 제대로 긁을 줄 알아.”
대공은 남자들에게 고갯짓했다.
“시작해.”
한 남자가 칼로 자신의 손을 그었다. 그리고 연하의 턱을 잡아 입을 벌렸다. 남자가 손을 쥐어짜듯이 피를 흘려내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서 했다.
핏방울이 얼굴에, 입술에, 혀에 떨어졌다.
처음으로 맛보는 인간의 피는, 오히려 기묘했다. 혀가 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멍청한 자식들.”
그들이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연하는 사납게 소리쳤다.
“죽고 싶은 거야?”
“반대야. 살고 싶은 거지. 너 같이 어린 여자애가 가능했다면 우리도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
연하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대다수는 죽어!”
그들은 더 듣지 않았다. 몇몇이 비켜서고,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몸집이 큰 그는,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연하는 무언가를 깨닫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가 어깨에 다시 테이저를 쐈다. 연하는 울부짖었다. 남자들이 그녀의 팔과 합판을 바닥에 눌러 고정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남자들이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뭐 해? 어서 해.”
“하지만 너무 어린…….”
막상 상황이 닥치자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를 보는 검은 눈에 고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영원히 살고 싶다며?”
남자가 주저하자 대공은 반쯤 흥미를 잃은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해!”
옆에 있는 남자가 그의 어깨를 밀치며 재촉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는 주저했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이렇게 우리가 잡을 수 있을 만한 뱀파이어를 또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남자가 볼을 후려치며 일갈했다. 그 말에 도끼를 쥐고 있는 남자는 마침내 결심한 것 같았다.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내려쳐!”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하강했다.
연하의 눈이 팽창했다. 그 눈 속에, 이 모든 난리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다리가 있었다.
* * *
패널에 다리를 내려다본 위성 이미지가 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김 중령이 말했다.
“이 인근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젊은 폭주족 그룹의 근거지입니다. 최근 그룹 내에서 세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한 명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패널에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시신의 사진이 떴다. 이어서 두 번째 시신 사진이 떴다. 온몸의 구멍으로 피가 빠져나간 것 같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급성 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감염 증세를 보여서 부검해 본 결과, 루아스의 혈액을 복용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이반이 물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메일로 보고받은 사안이었다.
“루아스가 되려고 했다는 말입니까?”
김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